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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Oct 20. 2023

귤 한 박스 배달

여독 때문인지 3일째 골골거리고 있다. 오늘은 좀 제대로 쉬고 싶어서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마트에 들러서 늘 사건 계란, 요거트, 그리고 자잘 자잘하게 사던 과일도 귀찮아서 귤 한 박스를 냉큼 들었다. 생각보다 무겁다. 점원에게 배달되냐고 했더니 여기서 가까운지 물어봤다. 바로 옆 아파트라고 말했더니 20분 내로 가져다주신다고 했다. 계란과 요거트는 먼저 가지고 가려고 집어 들었다. 


계산을 하던 중에 점원이 '5558' 맞으시죠?라고 묻는다. 내 적립 번호를 외워버렸나 보다. '맞아요, 제 번호 외우셨어요?'라고 묻자 자주 오셔서 외워졌다고 말했다. 이 마트에 일하는 직원, 알바생, 사장이 모두 친절한 건 알았는데 오늘은 유독 살갑게 느껴진다. 괜히 기억해 준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았다. 


인사를 나누고 느리게 느리게 걸어 엘리베이터에 도착했는데, 귤 박스를 든 마트 사장님과 같이 타게 됐다. 멋쩍기도 했으나 오늘은 무거운 짐을 들 컨디션이 아니었다. 내 귤인 걸 보고 '안 올라가셔도 돼요! 엘리베이터 바닥에 두시면 제가 가져갈게요'라고 말하자, 오히려 내가 들고 있는 계란을 귤 박스 위에 올려놓으라고 하셨다. 


이 분 정말 끝까지 친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곱씹어보면 엘리베이터까지만 가져다줬어도 됐고, 엘리베이터를 탔다면 각자 자기 물건을 들어도 됐고, 내려서까지도 현관문을 잡아주지 않고 바로 내려갔어도 됐다.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가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충분히 그러지 않아도 마트 사장님의 할 일은 충실한 거니까.  


내가 참 부끄러워졌다. 엉덩이 무겁게 자리 나 지키고, 니일 내일 가르면서 모른 척했던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끝까지 상냥함을 잃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이 마트가 승승장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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