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현 Jun 06. 2021

단행본 표지에 관하여

“하루키 이번 책 표지, 너무 이뻐서 깜짝 놀랐지 뭐야”

“하루키 이번 책 표지, 너무 이뻐서 깜짝 놀랐지 뭐야”라고 감탄하며 책을 산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가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들려줄까 기대하며 살 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책을 고를 때, 표지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주로 저자 이름이나 소개 글, 목차, 프롤로그 정도만 살핀 다음 살지 말지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기억을 꼼꼼히 더듬어보니 위 내용은 왜곡됐다. 일단 눈에 띈 책을 발견하고 집어 든 다음, 나머지 정보들을 확인한 게 아닐까.


책 만드는 입장에서도 표지 고르는 일은 어렵다. 한 명에게만 결정권이 있고 그가 책임까지 진다면 상관없지만, 대부분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스트레스를 받으며 끝까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조마조마한 경우는 내가 저자로 참여할 때. ‘출판사가 고른 표지가 내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내가 이만큼 주장해도 되나?’ 출판사와 저자 양측을 모두 경험했으니 고민이 더 크다.


“두 가지 옵션을 줄게요. 현 씨가 원하는 디자이너 있으면 데려와요. 아니면 우리가 주로 작업하는 분께 맡겨도 되고.” 북스톤 김은경 실장의 말이다. 김실장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유인성 디자이너의 작업실을 찾았다. 2013년부터 매거진 B를 통해 알게 된 지인이자 동갑내기 친구다.


북스톤이 인성에게 처음 제안한 컨셉은 콜라주다. 기록, 저자와 연관된 오브제를 콜라주하는 컨셉을 설명하며 레퍼런스를 보여줬다. “콜라주는 자칫 난해해질 수 있는데, 괜찮을까? 내가 마르지엘라도 아니고… 게다가 네 책이라니, 왕부담이다.” 친구 얼굴에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인성 디자이너의 작업실과 작업 노트 ©손현


얼마 뒤 1차 미팅. 그는 콜라주 시안과 더불어 마지막에 테니스 코트 시안 하나를 살짝 보여줬다. “네게 관련 자료들을 이만큼 받고, 작업실에 남아 그걸 계속 봤는데… 여전히 모르겠더라. 문득 테니스가 떠올랐어. 색감도 신선하고. 글쓰기와 직접 연계성은 없지만 작가와 접점이 있으니까 미팅 직전에 급하게 넣었지.”


우당탕탕 &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북스톤에서도 테니스 표지를 골랐다. (인성의 전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콜라주 시안이 실제로 난해하게 나오기도 했고, 테니스 시안은 상대적으로 산뜻했다. 나보다 훨씬 더 책을 오래 만들어온 북스톤 입장에서 글쓰기 책에 더 이상 펜이나 손글씨, 원고지, 커서, 타자기 등을 넣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최종 시안을 다듬는 과정에서 인성은 공의 리듬감이 느껴지는 선을 반짝거리는 은박으로 추가했다.


1차 미팅 때 인성의 깜짝 테니스 시안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표지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손현


마침 러시아 친구도 물었다. 글쓰기 책인데 왜 테니스 공 심볼을 쓰는지, 그게 나만의 글쓰기 방법이냐고. 이 책 뒤표지와 본문 중 테니스에 관한 글에 그 답이 있다.


“일상 속 글쓰기는 매번 다른 속도와 회전수로 날아오는 테니스 공을 쳐내는 일과 비슷하다. 치기 편한 공을 골라내는 대신 ‘어떤 상황에서든 받아치자’는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든 쓴다’는 마음과 같다. 살고 싶은 삶만 골라 살 수는 없으니까. 막상 마주하는 테니스 공은 예상보다 빨라 그 크기를 가늠할 여유가 없다. 땀이 주룩주룩 나면서 순식간에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공도, 글도, 삶도 후루룩 날아가버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잘하고 싶은 마음에 계속한다.” - 본문 중에서


단행본의 표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루키와 같은 유명 작가나 경제/경영 서적, 참고서조차도 어떻게 하면 더 시선을 잡아끌 수 있을지 고민하는 마당에, 나 같은 초보 저자의 표지는 얼마나 더 중요할까. 책이 나온 후 친구와 지인들에게 과분한 축하를 받고 있다. (책 리뷰들도 하나하나 다 읽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여기에는 글쓰기 책답지 않은, 그러나 저자를 닮은 표지가 분명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의쓸모 해시태그로 검색하면 앞으로도 표지 사진이 가장 많이 나올 것이다. 혹시라도 표지를 보면서 왜 테니스 코트인지 궁금해하셨을 분, 출간을 앞두고 여전히 표지를 고민 중인 분들께 이런 과정이 조금이나마 힌트가 되면 좋겠다. 표지에 정답은 없다. 다만, 눈에 띄어 집어 들게 하느냐는 중요하다. 오늘도 많은 출판사는 그 목적을 향해 고심한다. 끝까지, 치열하게.


글쓰기의 쓸모: 내가 보기에 좋은 것, 남이 알았으면 싶은 걸 알릴 때 쓴다 | 출판사: 북스톤 | 표지 디자인: 유인성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의 쓸모> 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