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안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현 Apr 27. 2022

돌잔치 때 신을 양말 챙기셨습니까?

좋은 아빠보다 좋은 남편 먼저

백미러를 슬쩍 본다. 송이는 잠든 것 같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한다. “이따 집에서 마저 이야기하자.”


돌잔치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차 안에서 아내와 다투고 말았다. 서서히 억양이 높아지다가 아차, 싶어 송이를 살핀다. 행사 주인공은 피곤했는지 이미 자고 있다. 오후 9시 30분이 넘어 집에 도착했고, 송이는 마지막 분유도 마시다 말고 잠든다.


‘피곤한데 내일 이야기할까?’ ‘아니야, 서로 불편한 기분으로 시간만 끌면 오히려 안 좋을 거야.’ 그 와중에 맥주 한 모금이 절실해 캔 하나를 딴다. 치이익. 효모가 발효하면서 내뿜는 탄산가스 소리가 유독 요란하다. 오늘 밤은 그동안 쌓인 걸 다 꺼내야겠다고 다짐한다. 설령 그게 맥주 거품처럼 시간이 흐르면 꺼질 걸 알면서도.


아내는 물 한 잔, 나는 맥주 한 잔을 놓고 대화를 이어 나간다. “서로에게 서운한 게 있으면 하나씩 말해보자. 고쳤으면 좋겠는 점도 하나씩 알려줘.” 내가 하나씩 알려달라고 한 이유는 단순하다. 둘 이상 넘어가면 기억을 못 하기 때문이다. 하나조차 고치기 어려워 집안 행사를 마칠 때마다 티격태격해왔다.


본 결혼식에 앞서 운경고택에서 ‘청첩’ 행사를 준비할 때는 좌탁 위에 서예용 붓을 몇 개 놓느냐는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나는 그날 방문할 손님 숫자 중 서예를 동시에 할 법한 인원을 고려해 두 개면 충분하다고 했고, 수현은 네 개를 고집했다. 행사가 당장 내일인데, 준비한 붓이 두 개뿐이라 수현 말대로 하려면 화방에서 두 개를 더 사 와야 했다. 아마도 내가 가야겠지. 나는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 손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중 (브런치, 2020.5.1)


2018년 5월, 아내 양수현(이하 양실장)과 결혼한 지 4년이 되어간다. 5년째 같이 살다 보니 부부간 다툼에도 나름의 역사와 맥락이 생겼다. 이제는 갈등 요인을 서로가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다툼의 촉매만 조금씩 바뀔 뿐.


지난 아이템이 붓이었다면 이번에는 넥타이와 정장 양말이다. 모두 내가 챙겨야 하는 것들이다. “송이 돌잔치 때 넥타이랑 정장 양말만 잘 챙겨줘.” 몇 주 전부터 양실장이 신신당부를 했지만,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챙기지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육아휴직을 개시하기까지 회사 일을 마무리 짓느라 바빴고, 휴직 뒤에는 육아를 전담하느라 매일매일 그로기 상태가 되어 뻗었다. 한편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는 꼬박꼬박 치러 갔으니 변명이 맞다. 실은 무심했다.


결국 양실장이 돌잔치에 관한 모든 걸 준비했고, 나는 넥타이와 정장 양말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해 양실장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말았다. 이렇게 팩트만 적으면 잘잘못이 분명한데, 어리석은 나는 또 실수를 범했다. 연료가 다 떨어진 전투기 안에서 비상탈출 핸들을 당겼어야 했는데 전투기를 살리겠다며 비상착륙을 시도한 격이랄까.


“그깟 양말 하나 내 마음대로 신게 좀 놓아줘. 왜 이것까지 간섭해?” 전투기는 비상착륙에 실패했고 거친 바다 표면에 수직으로 박혔다. 아내 마음에도 생채기가 났다. 육아휴직을 사용하며 다짐한 게 세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 때문에 깨져 버린 순간이었다. 양실장에게 화내지 않기. 아이에게 화내지 않기. 스스로에게 화내지 않기.


양실장은 지난 1년 3개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동안 내게 서운한 점을 토로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마지노선이었어. 이거 끝날 때까지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버티고 또 버텼다고. 당신 육아휴직 때 곰곰이 느껴보길 바라.” 야근을 많이 한 건 아니지만 내 귀가시간은 종종 오후 8시를 넘기는 등 애매하게 늦었고, ‘오늘은 꼭 일찍 퇴근하겠다’는 말로 양실장을 더 힘들게 했다. (바람직한 표현 예시는 썬데이 파더스 클럽 6화 참고.)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육아휴직 3주 차인데 벌써 힘들기 때문이다. 양실장이 일찍 귀가하는 날이면 그렇게 든든하고 고마울 수가 없다. 7시까지만 귀가해줘도 기쁘더라.


자정 무렵, 나는 다툼 막바지에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했고 너무 피곤해진 우리는 금세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영문도 모를 송이가 먼저 깼다. 양실장이 늦잠을 잘 수 있도록 나는 송이를 유모차에 태워 밖으로 나섰다. 일요일의 청계천은 어제 다툼이 가소로울 정도로 평화로웠고, 공기도 모처럼 깨끗하고 상쾌했다. 마트에서 장만 보고 오려고 했는데, 아까운 날씨라 양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도 좋은데, 근처에서 간단히 아점이라도 먹을까?” 송이가 낮잠이라도 자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이는 도무지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대신 신당 중앙시장 근처에 갓 생긴 에스프레소 바에 들러 음료를 한 잔씩 주문했다.


“네가 변해야 모든 게 변한다 everything changes when you change.”


에스프레소 바 유리창에 붙은 문구를 읽으며 현타가 왔다. 작가이자 연설가 짐 론(Jim Rohn)의 말이란다. 우리의 부부싸움에는 패턴이 있다. 갈등 상황에서 둘 다 서로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편인데 매번 내 말이 엇나간다. 후반부에 이르면 뿌옇던 게 또렷이 보인다. 그건 바로 내 잘못. 아, 이번에도 내 잘못이 맞는구나. 상대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하며 복기해보면 이렇게까지 싸울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빳빳한 재질의 새 검정 양말 하나만 잘 챙기면 됐을 일인데. 나부터 변했어야 했는데. 머쓱해진 나는 짐 론의 문장을 보며 다시 용서를 구했고, 우리는 다행히 다툰 뒤 24시간 내에 화해할 수 있었다.


그래, 나부터 변하자.


“현님이 당시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 것 같아요. 저도 반항아 기질이 있잖아요. 하지만 전 1차 경고를 절대 무시하지 않아요. 농구 경기에 비유하면 파울(foul)이잖아요. 파울 누적되면 바로 퇴장당한다고요.” 며칠 뒤 지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는 내게 오반칙 퇴장*을 주의하라고 덧붙였다.

* 농구에서 다섯 번 반칙하면 퇴장으로 해당 경기에 더 이상 나올 수 없다. 테크니컬 파울(Technical Foul)과 언스포츠맨라이크 파울(Unsportmanlike Foul)의 경우 두 번만 받아도 바로 퇴장.


육아가 어려운 이유는 공동의 양육자가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함께 키우기 때문이다. 프로덕트는 하나인데 프로덕트 오너 또는 프로덕트 매니저가 여러 명인 셈이랄까. 부부생활의 두 번째 챕터로서 긴밀한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가정마다 주 양육자는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엄마가 고려하는 범위를 아빠가 따라가기도 어렵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는 2019년 하버드 래드클리프 연구소 강연 때, ‘어떻게 하면 소설을 통해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가 시도하는 건 역사에 대해 정직한 자세를 취하는 일이에요. 논쟁의 한 부분에서 어떤 작업을 시작할 때 종종 증거나 현실 앞에서 제 주장이 틀렸다는 걸 직면하기도 하죠. 그럼 현실로 돌아와 선입견을 바로잡아요.” 우연히 그의 강연 영상을 접하면서 우리 부부가 겪은 ‘돌치레’가 떠올랐다. 역사는 국가나 민족뿐 아니라 가족 단위에도 존재한다. 나 역시 논쟁을 접할 때, 증거나 현실을 무시하면 안 될 일이다.


역사는 그 모습을 조금씩 바꿀지언정 반복된다고 하지 않나. 실수를 망각할 미래의 나에게, 그리고 돌잔치를 앞둔 모든 아빠들에게 부탁한다. 돌잔치 때 양복을 입어야 한다면 단정한 넥타이와 양말을 꼭 챙기시길. 특히 나처럼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방해도, 뒤늦게 지적질도 금지다. 안 그러면 퇴장당하니까. 모든 부부의 건강한 페어플레이를 기원한다. (참, 증거 자료도 덧붙인다. 특히 두 번째 사진을 보면 남편의 양말은 의외로 많이 노출된다.)


글 | 손현 (2022.4.24)


Note. 지난 2월부터 육아 중인 아빠 지인들과 모여 '썬데이 파더스 클럽(Sunday Fathers Club)'이란 이름의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어요. 위 글은 4월 24일에 발송된 열두 번째 레터입니다. 이번에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돌잔치 때 다툰, 아니 제가 혼난 이야기를 썼습니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은 매주 일요일, 옆집 아빠가 보내는 육아일기 뉴스레터예요. 다섯 명의 아빠들이 번갈아 가며 육아일기를 가장한 성장일기를 전합니다.


이 뉴스레터는 여러분과의 공감을 통해 전투 같은 육아현장에서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갑니다. 부모와 양육자들의 진솔한 생각이 궁금한 분에게 이 레터를 추천해주세요. (구독 링크)

매거진의 이전글 수수꽃다리 같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