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는 떠올리는 죽음
살면서 죽을 뻔한 고비를 두 번 겪었다. 2015년 모터사이클을 타고 러시아를 횡단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한 번은 2차선 왕복 도로에서. 앞 차를 추월하려고 모터사이클 스로틀을 당겨 중앙선을 넘으려는 찰나, 맞은편에서 오는 대형 트럭을 뒤늦게 봤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내가 피한 건지 트럭이 피한 건지 모르겠지만 사고는 면했다. 잊고 싶은 기억이라 일기장에도 자세히 적진 않았다. 트럭이 울린 경적 소리 정도만 기억에 남는다.
또 한 번은 바이칼 호수 근처의 알혼섬을 여행할 때다. 전날부터 내리던 비로 섬 곳곳이 미끄러운 진흙으로 변했고, 무거운 바이크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계속 달려야 했다. 시야에 크레바스처럼 움푹 파인 골짜기가 들어왔다. 설마 저기로 빠지진 않겠지… 싶었는데 바이크는 왠지 그곳을 향하는 것 같고 핸들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골짜기를 간신히 옆에 두고, 반대 방향으로 넘어졌다. 바이크가 구덩이에 빠졌더라도 아마 목숨은 건졌겠지만 상당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물론 바이크는 그대로 폐기 처분하고 여행은 끝났겠지.
노르웨이의 트롤퉁가에서는 ‘내가 원한다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을 처음 해 봤다. 트롤퉁가는 북유럽의 신화나 민화에 나오는 괴물인 트롤의 혀를 뜻한다. ‘T’라고 표시된 코스를 따라 약 11km를 가면 혀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가 나온다. 그 바위 너머로 피오르 전망이 보이는데, 아찔한 배경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문제는 바위 주변에 가드레일 등 안전장치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바닥에 엎드려 절벽 아래를 봤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신 그날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그 절벽 위에 서 있을 때의 기분은 아직도 선명하다. 삶과 죽음의 무게가 딱 절반으로 나뉜 느낌이었다.”
— 2015년 9월 1일 일기 중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앞서 말한 경험들도 ‘죽음’ 대신 ‘여행 중 해프닝’으로 부르고 싶다. 바꿔 말하면 죽음을 진지하게 떠올릴 일이 없을 정도로 운이 좋았고, 삶에 대한 의지가 컸다고 해야 할까.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뒤, 2016년부터의 삶을 일종의 보너스 인생으로 여긴 건 자연스러운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내면에서는 상반된 두 마음이 충돌하곤 했다. ‘나는 참 운이 좋으니 큰 욕심부리지 말고 매사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소박한 욕망과 ‘그래도 한 번 사는 인생, 전력을 다해 열심히 살아보자’는 현실적 야망 사이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2023년 현재에도 유효하다. 그동안 수현과 결혼하고 출생과 육아를 경험하며 내적 싸움은 더 복잡해졌다.
지난 7월 하순, 나의 만 39살 생일이었다. 아내 수현이 생일 선물로 육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하루치 시간을 선물했고, 성수동의 초록집(개인 작업실)으로 나왔다. 공교롭게도 태어난 날, 죽음을 구체적으로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최근에 본 영화 <사랑하는 당신에게 Last Dance>나 HBO 드라마 <석세션 Succession>, 정현채 명예교수의 롱블랙 인터뷰, 류이치 사카모토의 유고집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주제도 ‘죽음’이었다. 몇 달 전에는 아진 님의 글을 인상 깊게 읽기도 했다.
생일을 맞아 괴로운 상상을 해봤다. 내 인생의 마지막까지 D-10, 나는 매일 어떤 일을 할까?
D-10
오전에 테니스. (남은 시간에 운동하는 일정을 꾸준히 넣었다. 땀 흘리는 활동을 통해 부정적 감정이나 기운을 억지로나마 떨쳐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다.) 오랜만에 성당에 가서, 차분하게 남은 9일 동안 뭘 해야 할지 생각하고 싶다. ‘내가 왜 지금 세상을 떠나야 하는지’에 대한 억울한 마음도 있겠지만,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는 게 차라리 낫겠지. 사후 장기기증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남은 자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전문가(변호사나 금융기관)와 상의한다. 전부터 가고 싶었던 여행지 하와이로 항공, 숙박 편을 예약한다.
D-9
오전에 자유 수영. 필요한 서류나 행정 업무 등을 처리한다. 내가 곧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회사에 알리고, 사직서 제출. 수영복이나 테니스 라켓 등 간단한 짐을 싸서 가족(수현, 송이)과 출국 준비. 오후 8시 35분 비행기로 인천 공항 출국.
D-8
오전 9시 30분 비행기로 호놀룰루 도착. 오아후 섬의 어느 호텔에 체크인 후 휴식. 아무 생각 없이 걷고, 해수욕을 하며 놀다가 석양을 본다. 수현과 송이에게 함께 이곳으로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하기.
D-7
여행 2일차. 조식 먹고 해수욕하고 (가능하면 테니스도 치고) 관광하기. 저녁에는 수현과 송이에게 편지 쓰기. 서울에 있는 다른 가족들과 영상 통화.
D-6
여행 3일차. (정작 내가 하와이를 가본 적이 없어서, 어디를 관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적어 본다.) 블로우 홀, 샌드비치 등을 보고 디너 크루즈. 저녁을 먹으며, 내가 인터넷에 남긴 기록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가족들과 상의. 대부분의 계정을 비활성화하거나 삭제할지, 아니면 기간을 정해 잠시 보존할지 의논. 한국의 부모님, 미국의 삼촌과 통화.
D-5
여행 4일차. 콜 올리나 비치파크 수영. 산책, 조깅. 쇼핑센터에서 선물 사기. 가족에게 남길 영상 편지 기록. 나의 작은 바람 중 하나는 송이와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같이 걷는 건데, 이번 생은 늦었다. 적어도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신 수현과 송이에게 기회를 주면 좋을 것 같다. 둘이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유럽행 항공편을 미리 예매하기.
D-4
여행 5일차 및 귀국일. 조식 먹고 호놀룰루 공항으로 이동. 오후 12시 20분 비행기를 타고 출국. 비행기 안에서 내 인생을 돌아보는 짧은 회고 글 쓰기. 삶의 소회와 감사 인사를 담은 글을 비행시간 안에 다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D-3
온종일 이동하는 날. 일상으로 돌아와 죽음으로 전환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오후 5시 45분 인천공항 도착. 저녁 먹고 휴식. 이날은 일찍 잠들기.
D-2
송이의 어린이집 등원과 하원을 맡는다. 송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수현의 사무실로 나가 레디투킥 일을 돕는다. 틈틈이 아래 일들도 처리한다.
- 임종 직전의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 장례 방법(화장), 수의 등을 정하고 관련 비용을 모두 미리 정산
- 일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고마움 표현하기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죽음을 주제로 대화 나누고 싶다. 죽음을 너무 터부시 하지 말자고, 나처럼 언제든 급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는 일임을 알리는 게 좋겠다.
D-1
생의 마지막 날. 마음이 바쁘겠지만, 가능하다면 차분히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싶다. 그날의 컨디션을 보고 오전에 테니스 또는 수영을 한다. 테니스를 친다면, 평소 플레이를 같이 하던 친구들을 부르고 싶다.
오후에는 내 삶에 나름 의미가 있던 노래들을 몇 곡 듣고 싶다. 양희은의 '참 좋다', 데이비드 랑의 ‘last spring’, 영화 <애프터썬>의 사운드 트랙을 작곡한 올리버 코츠의 ‘One Without’, 후반부에 등장한 퀸의 ‘Under Pressure’, 루크 하워드의 ‘Future Coda’, 안토니 앤 더 존슨스의 ‘The Lake’ 정도를 듣고 매치박스 트웬티의 ‘Bright Lights’로 마무리하면 어떨까? ‘Bright Lights’는 내가 수현에게 프러포즈할 때 틀었던 곡이기도 하다. 노래 제목처럼 남은 이들의 미래가 찬란하게 빛나길. 시간이 된다면, 성당을 한 번 더 찾는다. 명동 성당이 그나마 나을 듯.
가족과 마지막 저녁을 먹고 여행 중 틈틈이 쓴 편지를 전달한다. 하와이에서 산 선물과 함께. 그렇게 편안히 잠든다.
D-Day 00:00 죽음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김영민 교수가 쓴 칼럼에 나오는 문장이다. 여전히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생일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평상시 죽음을 인지하면 삶의 선택지가 간결해집니다. 죽음이 한 달 남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실한 일에 몰두하며 일주일을 살겠죠. 일의 경중이 저절로 나눠질 겁니다. 남을 해치거나 나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누군가를 미워할 시간조차 아깝거든요.”
— 롱블랙, 정현채 : 죽음을 사유하는 것은, 삶을 사유하는 것이다 (2023.7.20.)
평소라면 해보지 않았을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보니 인생의 우선순위가 명확해졌다.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고, 그중 고마운 마음과 나누는 행위가 남았다. 보잘것없는 나의 존재를 빛나게 해 준 가족과 공동체와 더욱 시간을 자주 보내고 틈틈이 고마움을 표현해야겠다. 남은 열흘은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기에도 버거웠다. 죽을 때까지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며 바쁘게 지내고 싶진 않다.
현실적 고충도 보였다. 첫째, 하와이를 5일만 여행하기엔 너무 짧다.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팀원은 죽기 전에 굳이 머나먼 하와이까지 다녀오는 건 찬성하지만, 경험상 2주 여행도 짧았다며 5일을 머문다면 오아후 섬 정도만 여행하라고 조언했다.
둘째, 약소하게나마 내 자산을 내 의지대로 나누려면, 적합한 절차를 미리 취해야 한다. 이 역시 열흘 안에 해결하기 어려워 보였다. 유산을 체계적으로 나누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유언대용신탁’이란 상품을 발견했다. 참고로 유언신탁에 맡긴 자산은 가입 후 1년이 지나면 유류분(遺留分)*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판결도 있다. 정말 자산이 많고 자신의 의지대로 유산을 배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미 다들 계획이 있겠지만) 최소 죽기 1년 전에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하는 걸 권한다. 비율을 나눈다면 아내에게 30%, 송이에게 30%를 물려주고, 기부 등을 통해 40%를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
* 상속자들이 일정 비율의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의무화한 제도. 유언만으로 상속이 이뤄지면 특정인에게 유산이 몰려 나머지 가족의 생계가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에서 1979년 도입됐다.
마지막으로, 나의 가정이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걸 안다. 죽기 직전까지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하고 테니스까지 칠 정도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실제로 한국인은 암으로 가장 많이 죽는다. 두 번째는 심장질환, 세 번째는 폐렴이다. 2022년 기준, 한국인 사망자의 74.8%가 의료기관에서 생을 마감했다. 암이나 알츠하이머에 걸리지 않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생의 마지막 행운이자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건강 관리가 필수다.
수현과 영화 <엘리멘탈>을 보고 나눈 대화가 마음에 남는다. 앰버와 웨이드가 잠시 이별하는 대목에서는 눈물이 날 정도로 슬펐다. 대화는 ‘앰버와 웨이드는 영화 결말 이후로도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 부부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로 흘렀다. 그리고 수현이 말했다.
“누가 먼저 세상을 떠나든, 그 사람이 떠나는 순간, 곁에 있으면 좋겠어. 혼자 눈 감으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아.”
그동안 무엇이 좋은 삶인지 고민했는데, 39세 생일을 기점으로 고민의 방향이 바뀌었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나의 인생이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고작 몇 차례 일어날까 말까다. 자신의 삶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억조차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많아야 네다섯 번 정도겠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름달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스무 번 정도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가 무한하다고 여긴다.”
— 영화 <마지막 사랑>의 대사 중. 류이치 사카모토,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