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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현 May 23. 2024

지리산 오라클의 연잎밥과 쿠키

“어떤 것이 기특한 일입니까?”

“둥-퉁-둥-퉁-둥-퉁-둥-퉁”

“potato-potato-potato-potato”


갑자기 감자 타령을 하려는 건 아니고… 모터사이클 배기음을 표현해봤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한 번 소리 내어 읽어보시길!) 길을 걷다가 비슷한 소리가 나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간다. 이제는 소리만 들어도 대충 저 바이크가 고배기량인지 저배기량인지, 할리데이비슨 모델인지 아닌지 감이 잡힌다. 소리의 출처를 눈으로 발견한 다음에는 반가움과 동시에 아련한 감정이 든다.


한때 모터사이클을 격렬히 타던 시절이 있었다. 나이 서른을 넘겨 뒤늦게 2종 소형 면허를 땄고, 5년 정도 원 없이 탔다. “갑자기 웬 모터사이클?” 이런 질문도 종종 받았지만 마땅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걸 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타면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찬바람이 불며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2013년 늦가을.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울어린이대공원 근처에 운전면허 전문학원이 하나 있었다. 스산한 풍경의 시험장에는 이제 만 18세를 넘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배달업에 종사하는 걸로 보이는 중년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부는 본인 바이크를 타고 와서(?) 시험장에 있는 바이크로 기능 시험을 치른 뒤, 다시 자기 차량을 타고 유유히 귀가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를 발견했다. 모범생처럼 단정한 외모에 밝은 갈색의 머리칼과 홍채. 우연히 그와 인사를 나눴고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됐다. 알고 보니 그는 나보다 한두 살 위 형이었고, 미국에서 잠시 한국으로 들어와 제약회사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원래 국적은 미국이었다. 형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너무 바이크가 너무 타고 싶어 가와사키의 클래식 바이크를 이미 주문한 상태라고 했다. 나만 면허도, 바이크도 없구나.


다행히 둘 다 그날 기능 시험에 합격했고, 나도 겨우내 모터사이클을 한 대 장만했다. 이듬해 봄부터 우리는 주말마다 각자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 곳곳을 다녔다. 한국의 도로교통법 제63조에 따르면 이륜차는 고속도로 주행이 불가능하다. 그 제약이 두 바퀴 여행자에게는 오히려 좋았다. 36번 국도를 따라 달리는 울진 왕피천, 1003번 지방도를 따라 통영 가는 길, 33번 국도를 타고 안동 가는 길, 861번 지방도 따라 지리산 고개를 넘어 남해로 가는 19번 국도 등 한국에 이렇게 아름다운 지방도와 국도가 있는 줄 그제야 알았다.


어느 봄날, 17번 국도를 따라 지리산 끝자락에 있는 한옥 게스트하우스 ‘무검산방’에 도착했다. 원래 낯선 남자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지인을 통해 특별히 숙식을 허락받은 곳이었다. “어머, 난 또 오도바이 타고 남자 둘이 온다길래 두건 쓰고 가죽재킷 입은 사람들을 상상했네! 이렇게 샌님 같은 청년들인 줄 몰랐어요. 어여 들어와요.” 푸근한 인상의 주인장은 휠체어를 탄 채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최소 50~60대 이상의 터프한 아저씨들인 줄 알았는데 곱게 면도까지 한 30대 남자 둘이 왔으니 신기했을 만도.


주인장은 그날 저녁으로 갓 찐 연잎밥과 두부 된장찌개, 지리산에서 채취한 나물들을 내왔다. 뜨끈한 연잎을 펼치니 밤과 대추, 영양찰밥이 들어 있었다. 이 맛을 보려고 모터사이클 진동을 견디고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여기까지 내려왔나? 꿀맛인 건 차치하고, 이곳은 속세가 아닌 것 같았다.


일러스트레이션 by 최선 @amy_merrymerry

맛있는 음식만큼 인상적이었던 건, 주인장이 귀촌하게 된 사연과 이곳이 속한 산내면 마을 공동체만의 독특한 분위기였다.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으로 분류되며, 산으로 둘러싸여 이름도 산내(山內)다. 지리산 뱀사골 계곡으로도 유명한 이곳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듬해 열린 ‘실상사 귀농학교’를 통해 새로운 대안적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고, 2017년 기준으로 산내면에 사는 2000명 중 약 400명 이상이 귀농, 귀촌 인구다. 공동체의 주요한 가치는 자립과 자치. 도시에서 젊은 사람들이 이따금 내려온다고 한다. 주인장은 시골살이의 장점 중 하나로 ‘선의를 서로 잘 보여줄 수 있는 삶’을 꼽았다.


“저는 이제 도시로 안 돌아갈 것 같아요. 여기서는 연봉 500만 원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거든요. 교육이든 살림이든 농사든 서로가 가진 재능을 품앗이하기도 하고요.” 주인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당시 도시 생활에 지쳐 ‘무엇이 좋은 삶인가’를 고민하던 내게 이날 식사는 큰 화두를 던졌다. 이미 자기만의 답안지를 과감히 실천해 살고 있는 이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형과 나는 그날 저녁 내내 ‘삶의 다른 길’을 정말로 갈 수 있느냐는 화두로 제법 팽팽하게 논쟁하기도 했다. “현은 정말로 연소득이 500만 원만 되어도 지리산 산골 마을에서 살 수 있겠어? 만약 예기치 못하게 누군가 큰 병에 걸리거나 목돈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나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형의 논리를 당해낼 순 없었다.

가장 마지막 방문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인 2020년 12월 28일.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 주인장은 속 시끄러운 둘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직접 구운 쿠키를 커피와 함께 주셨다. 설탕과 버터를 보통 레시피의 절반만 넣어 구운 쿠키라고 덧붙였다. 그리 달지 않고 적당히 고소한 쿠키, 향긋한 풍미의 커피를 먹으며 법정 스님의 법문집 《일기일회》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한 스님이 백장 선사에게 묻습니다. “어떤 것이 기특한 일입니까?”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 백장 선사가 머물던 산 이름을 백장산 또는 대웅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홀로 대웅봉에 앉는다’고 한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선방에서 정진을 하든, 절의 후원에서 일을 거들든,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든, 달리는 차 안이나 지하철에 있든 언제 어디서나 홀로 우뚝 자신의 존재 속에 앉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잘못되지 않습니다. - 법정 스님, 《일기일회》


시골에서 살든, 도시에서 살든 제각각의 고충이 있지 않을까. 시골 생활에 너무 환상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도시 생활을 너무 못마땅해할 필요도 없을 거다. 형은 몇 년 뒤 미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몇 년 뒤 모터사이클을 중고로 팔았다. 내 삶이 조금씩 자기중심을 찾는 동안에도 무검산방을 1년에 한두 번씩 꾸준히 찾았다. 혼자 간 적도 있고, 결혼 전 반려견을 동반한 가족 여행 때 온 식구가 묵은 적도 있다. 지리산 종주를 마친 뒤 아버지와 둘이서 들르기도 했고, 지난겨울엔 고교 시절의 오랜 친구와 자동차로 갔다. 아내와는 두 번 들렀다. 주인장은 나를 ‘오두비(오토바이) 청년’으로 기억해주신다.

지난 2015년부터 나의 '숨구멍' 같은 존재인 지리산 산내면

주인장이 직접 구워주던 쿠키가 영화 <매트릭스>의 오라클이 네오에게 건네던 그 쿠키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럼 연잎밥은 진짜 현실을 각성하게끔 하는 빨간약일까? 한 번은 내가 연잎밥을 어떻게 만드냐고 물은 적이 있다. 주인장이 웃으며 답했다. “호호, 그건 기성품이에요. 인터넷에서 다 팔아요.” 그래, 연잎밥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지, 그걸 대하는 내 마음이 중요하지.


글 | 손현 (2021.8.2)


Note. 2021년 8월 12일 발송된 배달의민족 뉴스레터 <주간 배짱이>에 실린 음식 에세이입니다. 이때 연재한 원고는 <요즘 사는 맛> 1권에도 수록되어 있어요. 최근 북스톤 대표님 요청으로, 저의 '인생 공간'을 소개할 일이 있었는데 문득 지리산 아래 작은 마을인 산내면과 실상사가 떠올랐습니다. 그곳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떠올라서, 이곳에 뒤늦게나마 발행합니다.


이 마을이 더 궁금하시다면, 아래 기사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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