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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극장옆골목 Apr 19. 2021

본 영화 또 보기

나는 음식 메뉴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먹는 스타일이다. 그 맛에 심취해서 계속 생각난다. 점심이고 저녁이고 계속 한 군데 식당에 가다 보면 단골이라고 서비스를 받는 일도 흔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영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본다. 집에 있을 땐 TV를 켜놓듯이 영화를 반복해서 틀어놓기도 한다. 영화의 장면 하나 대사 하나를 꼼꼼히 보려고 한다. 게장의 숨은 살 하나 놓치지 않고 전부 발라먹겠다는 심정으로.


그중에서도 특히 많이 본 영화가 뭐가 있더라. 먼저 생각나는 건 '500일의 썸머'(2009). 요즘은 로맨스 영화를 잘 찾지 않지만, 20대엔 참 많이 봤더랬다. 이 영화는 첫사랑의 풋풋하면서도 찌질한 감성을 잘 담아서 인기가 많은 영화다. 처음 봤을 땐 톰에게 감정을 이입하느라 썸머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를 반복해서 보다 보니 그녀의 감정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중간에 1967년작 영화 '졸업'이 두 번 나오는데, 톰이 어렸을 때 '졸업'을 잘못 이해했다고 설명하는 장면 — 일레인! 일레인! — 과 영화관에서 '졸업'을 보다가 썸머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톰이 무엇을 오해한 건지, 썸머가 무엇을 느꼈는지 이해하고 싶어서 영화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다음으로 생각나는 영화는 '아수라'(2016)다. '500일의 썸머'와는 상반되는 영화다. 가상 도시 '안남'을 배경으로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누아르. 출연진이 워낙 쟁쟁하고, 무한도전에 몇 번 나와서 홍보하기도 한 탓에 기대가 많았지만, 개봉 당시 흥행은 저조했고 평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모든 장면과 대사를 줄줄 욀 정도로 많이 봤다. 이 영화가 특이한 점은 등장인물이 모두 악인이라는 점이다. 악인들이 얽히고설켜서 서로를 물어뜯어야 살 수 있는 지옥 같은 상황이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다. 그 극한의 상황과 처절한 분위기는 우리나라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좋아서 시작한 영화 리뷰를 쓰면서부터다. 글을 쓸 때 내용이나 대사를 확인하려고 다시 보는 경우는 많지만, 영화 자체를 즐기려고 다시 보는 경우는 없어졌다. 글을 주기적으로 써내려면 빨리 다른 영화를 봐야 했다. 본 영화 개수를 늘리려면 빨리 다른 영화를 봐야 했다. 끌리는 영화보다는 유명하고 상을 받은 영화들을 봐야 했다. 하지만 봐야 할 영화가 숙제처럼 느껴질 때. 분명 보고 싶다고 찜해놓은 영화 속에서, 정말 볼 영화가 없다며 목록을 뒤적이고 있을 때.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냥. 오늘은 오랜만에 '아수라'나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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