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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May 20. 2019

부장님은 나보고 열심히 살아라 회사에 열정을 바치라고 한다. 열심히 해봐야 결국에 월급쟁이지 뭐.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봐야 나만 손해다. 근데 회사 말고 내 인생을 위해서는 나도 자기계발도 좀 하고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다. 일단 게임 한판만 하고.


충돌, 회피, 순응은 마찰이 아니다.


열심(熱心)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뜨거운 마음이라는 뜻이다. 열정(熱情)은 뜨거운 정 이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뜨겁다는 단어는 동기부여가 잘 되어있는 사람, 혹은 있는 힘을 다 해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미지로 사용되어 왔다. 열심과 열정이란 무엇인가. 고용주가 직원에게 열정페이를 주면서 핑계로 사용하는 그런 하찮은 것일까? 열심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내가 열심히 살도록 시도해볼 수 있을듯 하다.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하루 12시간을 근무하면 열심히 하는 것일까?
1년에 책을 200권 넘게 읽으면 열심히 읽는 것일까?


우리는 열심을 양으로 재는데 익숙하다. 양으로 재어야 겉으로 드러나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내가 알지 못할 때는 눈에 드러나는 것을 지표를 붙들 수밖에 없다. 가짜 지표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열심은 양으로 재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핵융합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한자로 열심 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들의 개념으로 열이란 마찰에 의해 발생하는 그 무엇이었다. 부싯돌을 부딪혀 불을 내거나 마른 장작을 비벼 불을 내는 식이다. 열이란 어떤 것끼리 부딪혀 깎여나갈 때 발생하는 그 무엇이다. 거기서 불이 피어오른다. 부딪힌다고 해도 당구공이 서로 부딪힌 후 튕겨나가는 장면은 마찰이 아니라 충돌이다. 마찰은 충돌과 달리, 두 물질이 비스듬히 접촉해 깎여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을 빠르게 반복할수록 열이 잘 발생한다. 인생에서 열심이니 열정이니 하는 단어도 같은 이미지를 차용한다.


비스듬히 접촉해 부딪히고, 그래서 깎여나가며 열이 발생한다.
짧은 시간에 자주 접촉할수록 열이 잘 발생한다. 


책을 열정적으로 읽는다는 말은 책이 말하는 바와 내가 생각하는 바가 비스듬히 부딪혀 깎여나가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기를 자주 반복하면 열심 (熱心:뜨거운 마음)이 발생한다. 두 당구공이 정면으로 충돌했을 때는 마찰이라고 부르지 않듯, 다른 사람과 내 의견이 정면으로 부딪혀 한쪽의 의견을 관철하는 것은 열의 이미지의 해당하지 않는다. 깎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정에 대한 비유가 아래 영상의 6분 45초 지점부터 등장한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보냈는가 판단하는 기준은 오전 9시에 출근해 밤 9시에 퇴근했는지가 아니다. 돌을 12시간동안 가만히 놓아둔다고 마찰열이 일어나는건 아니지 않은가. 책을 열심히 읽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도 1년에 200권 300권을 읽었는지가 아니다. 책이 말하는 바와 내가 생각하는 바가 얼마나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로 나의 기존 관념이 얼마나 깎여나갔는지를 재어보자. 그 마찰의 빈도수가 열심의 정도다. 회사를 30년 다녔다고 해서 열심히 다녔다고 말할 수 없다. 단 일년을 열심히 다닌 사람보다 적은 마찰을 발생시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열심은 양 (amount)이 아니라 빈도수 (frequency)로 재는 개념이다.


마찰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부싯돌로 마찰열을 일으킨다고 하자. 부싯돌이 깎이는 방향은 때릴 때마다 일정하지 않다. 사전에 정해진 방향이 아니라 무작위로, 또 여러 방향으로 부딪힌다. 어디가 어떻게 깎이게 될지는 부딪혀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사전에 정한 계획대로 실천한다고 열심히 사는게 아니다.


이것은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초점이 다르다. 자주 부딪히고 나를 자주 깎는데서 열심이 나온다는 말이다. 어디가 깎일지는 사전에 알 수 없으므로 일단 부딪혀보고 깎는다책을 읽었는데 저자 말만 맞고 내 의견이 없다면 열심히 읽을 수가 없다. 서로 부딪힐 일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넘어가는 문화에 속해서는 열정이 발생하기 어렵다. 서로 부딪힐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충돌 뿐 아니라 회피나 순응도 마찰과는 거리가 있는 개념이다.


충돌, 회피, 순응은 마찰이 아니다.


모난 부분이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방면으로든 모난 부분을 가지고 있다. 일부러 그것을 부딪혀 지속적으로 깎는 사람은 세월이 갈수록 더 아름다운 돌이 될 것이고, 괜히 일 크게 만드는게 부담스러워 덮고 넘어가기를 반복하는 사람은 계속 모난 채로 살게 된다. 


부싯돌의 입장에서 마찰은 당장 피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 살이 깎여나가는데 아프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충격이 너무 강해서 내가 부서질 것 같은 큰 마찰은 피해야겠지만, 적당한 마찰을 꾸준히 유지하는 건 사람의 일상을 열정적으로 일구는데 필수 재료다. 아름답게 다듬어진 돌은 그 결과로 얻어진다. 마찰이 없으면 다듬어지지 않는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을 이겨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조언은 밑도끝도없는 고통을 억지로 참다가 몸져 누우라는 뜻이 아니다. 마찰을 통해서 나를 다듬어 명품으로 만들라는 뜻이다.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ärker.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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