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맛
아침: 오늘은 영어문제 세 페이지랑 수학문제 다섯 페이지를 풀어야겠다. 오늘은 꼭 해내야지.
점심: 그런데 하기 싫으니까 이따 저녁에 해야겠다.
저녁: 저녁인데 이걸 다 하려니까 못하겠다. 재미없다.
약을 먹을때는 복용량을 기준으로 생각한다. 하루 세 번 알약 한 개씩을 복용한다는 식이다. 쓴 약을 만들면서 일부러 단맛을 첨가하기도 하지만 약의 목적은 맛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효과에 있으므로, 어쨌든 복용량을 지키는게 우선이다. 약을 맛으로 먹는 사람은 없다.
밥을 먹을때는 맛을 기준으로 생각한다. 떡볶이를 먹을지 피자를 먹을지 하는 식이다. 양이 많으면 좋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맛이 있어야 한다. 먹은 뒤에 배가 부르거나 에너지를 얻는다는 효과를 얻지만, 우선은 맛이다. 또 밥을 먹기 전에는 먹을 양을 사전에 정하지 않는다. 내가 배부를 때 식사를 그만두면 되기 때문이다. 밥을 양으로 먹는 사람은 있지만 아주 특수한 경우, 예컨대 많이먹기 대회를 나가는 경우에서다. 보통은 맛으로 먹는다.
약이든 밥이든 입에다 넣고 삼키는 것은 같으나, 효과를 우선으로 두느냐 맛을 우선으로 두느냐 하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 때문에 약을 대하는 태도와 밥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러면 공부는 나에게 약인가 밥인가.
약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약이고, 밥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밥이다.
공부를 하기는 싫은데 미래를 위해서 해야하는 그 무엇으로 인식한다면 공부는 약이다. 몸에 좋다니 먹기는 하지만 입에는 쓰다. 따라서 하루에 해치울 양을 미리 정한다. 약은 맛이 아니라 복용량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싫지만 먹어야 하니 복용량을 정해두고 지켜 먹는다. 그래서 양이 많아질수록 부담이다. 맛도 없는데 이걸 언제 다 먹나 싶어진다. 그러니 공부는 약으로 비유하는게 옳은듯 하다.
그런데 공부를 즐겨 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밥으로 본다. 맛이 나기 때문이다. 수학 문제를 통해서는 방정식의 의미를 곱씹어보고, 음악 연주를 통해서는 화음의 의미를 곱씹어본다. 그러면서 맛을 느낀다. 의미 (意味) 라는 단어는 '뜻의 맛'이기 때문이다.
의미 (意味)란 '뜻의 맛'이다.
사람에게는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이렇게 다섯 가지 감각 외에 또 하나의 감각이 있다. 어떤 개념의 의미를 맛보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머릿속에서 느껴지고, 그래서 추상적이지만, 실재한다. 예컨대 어떤 화두나 단어를 오래도록 곱씹으면 거기서 앎이 온다. 뜻을 맛보는 감각을 통해서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추상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맛볼 수 있다. 음식을 먹어서 느끼는 맛과는 다르지만, 뜻에도 맛이 있다.
공부를 즐기는 사람은 공부를 밥으로 보기 때문에 의미를 맛본 후에 삼킨다. 공부가 싫은 사람은 공부를 약으로 보기 때문에 맛은 모르겠고 삼키기에 바쁘다. 이 사람들은 정해진 분량의 약을 처리하는게 급선무다. 정한 양 만큼을 뱃속에 밀어넣겠다는 식이다. 맛도 모르고 밥을 먹는다니 매 끼니 식사시간이 얼마나 지겨울까.
공부를 밥으로 인식한다면 오늘은 이 맛을 맛볼까 저 맛을 맛볼까 기대가 된다. 그래서 떡볶이를 먹을까 햄버거를 먹을까는 정하지만, 그걸 얼마나 먹을지는 사전에 정하지 않는다. 내 입에 맛있는 쪽을 따르고, 먹다가 배부르면 그만 먹는다. 정해진 양을 먹어 없애기 위해서 밥을 먹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맛을 보다가 더이상 안 느껴질 즈음에 그만둔다. 맛을 보다 보면 배부르다는 결과를 자연히 얻는다. 정한 분량의 밥을 전부 삼키려고 애쓰면 그 맛을 모른다. 정한 분량의 문제를 다 풀어 해치우려고 애쓰면서 그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 답을 내놓으려고 애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맛을 알면 자연히 넘어가는 것을, 맛도 모르고 삼키려니 몸이 거부하는 것이다.
맛을 먼저 보면 자연히 앎이 온다. 양을 지키다 보면 앎을 잃는다. 뱃속에 넣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나중에는 소화도 못하고 다 토해내어 몸이 영양실조에 걸리고 만다. 현대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결과로서만 인식되고, 그래서 맛을 음미하기보다 정해진 양을 뱃속에 다 집어넣기만을 바라는게 아닌가.
양적인 면으로도 보자. 사람이 평생에 걸쳐서 약을 먹는 횟수가 많은가 밥을 먹는 횟수가 많은가. 밥을 먹는 횟수가 훨씬 많다. 맛이 있으니 밥 때를 기다려가면서 하루 온종일 먹고, 내일도 온종일 모레도 온종일 밥을 먹는다. 그렇게 평생 먹어치우는 양이 맛없는 약 삼키는 것에 비할바가 될까. 공부를 맛으로 하는 사람은 당장에 적게 먹더라도 꾸준히 먹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 차원이 다른 성장을 한다. 먹는대로 전부 소화하는 것이다.
뜻을 맛보자.
그렇다면 뜻을 어떻게 맛볼 수 있을까. 눈을 감고 와인 종류를 맞추는 소믈리에를 떠올려보자. 미각을 예민하게 유지하는게 중요하다.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마시는 와인의 양이 아니라 내 감각이 얼마나 살아있는지다. 맛을 볼 때는 적은 양을 입에 넣고 곱씹는다. 그러면 맛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공부하는 태도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를 맛보는 감각을 예리하게 세워두는 것이다.
사람이 내어놓는 어느 분야의 기예이든지 극단적인 섬세함이 극단적인 정밀함과 완성도를 낳는다. 섬세함 없이 명품을 만들 수는 없다. 감각은 우리가 자극에 더욱 잘 반응 (response)하도록 한다. 감각이 무디면 반응할 수 없고, 반응할 수 없으면 책임 (responsibility)질 수 없고, 책임질 수 없으면 의미를 느낄 수 없다.
감각을 사용할 때는 주의 (attention)를 기울인다. 글을 읽을때, 수학 문제를 풀 때, 노래를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곱씹어보자. 음식을 입으로 맛보듯, 또 봄 냄새를 맡듯, 부드러운 털을 만지듯, 그렇게 의미를 맛보자. 글자를 음미하면서 맛보자. 그러면 앎이 ‘온다’. 앎은 내가 노력해서 얻는게 아니다. 앎이 내게로 오는 것이다. 밥을 맛있게 먹다 보다 보면 자연히 배가 부르는 것과 같다. 반대로 배를 부르게 하겠다고 덤비면 맛을 잃는다.
의미란 '뜻의 맛'이라 했다. 어떤 음식의 맛을 제대로 볼 때는 입 안에 소량의 음식을 넣고 천천히 씹는다. 많은 양을 우겨넣으면 맛을 알기 어렵다. 맛을 느끼게 해주는 건 감각이다. 그래서 감각의 상실은 곧 의미의 상실이다. 현대인의 초상이라면 왠지 회색빛의 무감각한 월급쟁이가 출퇴근하는 장면이 떠오르는데, 감각의 상실이 도가 지나쳐 삶 전체의 의미 상실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나는 공부를 약으로 보는가 밥으로 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