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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Jun 07. 2019

선 (禪)

분리되기 전의 과포화 용액

공부를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나는 머리가 나쁜가보다. 
질에서부터 퍼져나가는 혼돈과 질서

그림에서 검은색 호 (arc)표시는 이성, 이론, 질서를 상징한다. 세상의 어떤 패턴을 포착해 사람의 언어로 표현한 생각들이다. 과거를 해석하는 사고의 틀이며, 실용적이지만 정적이고 불연속적이다. 수학 공식이나 영어 문법과 같은 것들이다. 사람의 주관에 독립적이면서 누구에게나 객관적인 법칙으로 이해된다. 

그림에서 검은색 호 사이로 드문드문 빈 자리는 이론이 미처 덮지 못한 혼돈, 실재, 낮은 수준의 질서를 상징한다. 편안하고 낭만적이다. 덜 중요하고 꼭 지킬 필요도 없지만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낮은 수준의 이론들을 의미한다. 예컨대 밥을 먹은 뒤에 이빨을 닦는다든지, 기념일에는 선물을 준다든지 하는 식이다. 사람의 주관에 따라 제각각인 질서다.

그림 가운데의 파란색 점은 질서도 혼돈도 아니다. 참도 거짓도 아니다. 정적이면서 동적이고, 고전이면서 낭만이다. 이로부터 질서와 혼돈이 태어난다. 정확하게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인데, 여기서는 질 (quality)이라고 일단 부르자.


태초에 말씀 (言)이 있었다. 말은 대상에 질서를 부여한다. 말이란 패턴을 포착하는 힘, 이성의 힘이다. 말 위에 말이 더해져 점점 수준높은 이론을 만든다. 질서정연하여 엔트로피 (=무질서도)가 낮아지는 방향이다. 어떤 다른 가능성도 없이 단 하나의 결론, 규칙, 법률, 법칙을 향한다. 여기서는 높은 질서가 좋은 질서다. 질서는 가능함과 불가능함, 참과 거짓이 결정된 영역이다. 객체적이다. 사람의 주관과 분리되어 객관성을 띄는 그 무엇이다. 


A라고 말하면 동시에 A아닌 것이 생긴다. 높은 곳이 있으면 어디엔가는 낮은 곳이 있다. 높은 곳이 있음으로 낮은 곳과의 분리가 드러난다. 질서가 드러나면 어딘가에 혼돈이 나타난다. 혼돈은 질서가 미처 자리하지 않는 영역이다. 낮은 수준의 질서다. 무질서하여 엔트로피가 높은 영역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제각각이으로 소란한 영역이다. 주체적이다. 객관과 분리되어 주관성을 띄는 그 무엇이다.


질서와 혼돈, 이성과 감성, 객체와 주체의 이분법은 뭔가가 분리되었음을 말한다. 


활의 명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궁사는 활의 위쪽 끝으로 하늘을 찌르고, 아래쪽 끝에는 비단실로 대지를 묶어 건다. 발사가 강한 흔들림과 함께 이루어지면 실이 끊어질 위험이 있다. 그러면 음흉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에게 이 천지 간의 균열은 영원한 것이 되고, 인간은 하늘과 대지 사이의 구원 없는 세상에 머무른다.' 
                                                                                                                   - 마음을 쏘다, 활 p. 54


질서와 혼돈은 새로운 것을 낳는 개념이 아니라, 이미 분리된 그것을 나중에 일컫는 개념이다.


그런데 그가 진심으로 생각하는 바는 글이 모두 완성된 다음 그 글에 덧붙인 것이 바로 규칙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사실에 앞서 상정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뒤이어 덧붙인 것, 인과 관계에 대한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흉내 내야 하는 모든 작가들은 규칙과 관계없이 자신에게 옳다고 생각되던 것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되는가를 가늠해보고,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면 그것을 고친다는 것이 파이드로스의 생각이었다.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p. 317


언어가 있기 전, 태초에는 어떤 질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언어가 있기 전이란 시간적으로 이전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어떤 질서를 담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림에서 파란색 점으로 표현된, 질서와 혼돈의 모태가 되는 <그것>을 이제부터 살펴보자. 참과 거짓으로 양분되지 않고, 있기도 하면서 없기도 하다. 질서도 혼돈도 아니지만 질서와 혼돈을 낳는 모태가 된다. 질 (quality)이다. 주체도 객체도 아니다. 가능하지도 불가능하지도 않고, 아직 어떤 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로 얕게 얼어붙은 수면처럼 잔잔하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이유는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곧 이론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질'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이것도 제대로 된 묘사가 아니다. 


도 (道)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질서로 표현할 수 있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질은 비유하자면 과포화된 용액과 같다. 소금 등이 과포화된 용액을 장시간 놓아두거나 아주 약간의 충격을 주면 바로 포화 상태로 이동하면서 용매와 용질이 분리되어 고체 결정이 가라앉는다. 질은 그 자신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작은 충격에도 자연스럽게 결정되어지는 수 밖에 없다. 인위가 없는 자연현상이다. 마치 대나무 잎에 쌓인 눈이 툭 떨어짐과 같다. 이 현상은 무위 (無爲)의 기예를 이해시킬때의 비유로 사용된다.


"눈이 쌓이면 대나무 잎은 점점 더 고개를 숙이게 되지요. 그러다가 일순간 대나무 잎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데도 눈이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이와 같이 발사가 저절로 이루어질 때까지 최대로 활을 당긴 상태에 머물러 있으세요.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최대로 활이 당겨지면, 발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발사는 사수가 의도하기도 전에, 마치 대나무 잎에 쌓인 눈처럼 떠나가야 합니다."
                                                                                                                      - 마음을 쏘다 활 p. 78


우리는 일이나 공부를 할 때 인위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인위적으로, 애를 쓴다는 것은 이미 분리된 사고나 개념 체계를 기반으로 그 위에 또다른 질서를 쌓겠다는 뜻이다. 질서가 손에 잡히지 않으면 불안해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런데 질서란 이미 아는 것을 다른 아는 것으로 해석하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 내가 모르는 것, 결정되지 않은 것, 미지의 것에 대해서는 사용할 수 없다. 질서는 이미 결정지어진 결과다. 어떤 것의 원인일 수 없다. 그래서 질서를 기준으로 일을 하려 들면 반드시 움찔거림을 동반한다. 영어문법을 토대로 어색하게 말하듯 사고의 흐름이 툭툭 끊어지는 것이다. 인위 ()는 항상 부자연스럽다. 


무위의 기예란, 그렇게 되어지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기 때문에 행하여지는 자연스러운 기예다. 내가 하는게 아니라 <그것>이 한다. 내가 하는 일이란 파란 점의 상태에 가능한 머무르는 것 뿐이다. 그러면 때가 와서 자연스러운 질서를 낳는다. 이 질서는 내가 낳은게 아니라 <그것>이 낳은 것이다. 머무르기를 유지하면 자연히 때가 오고 춤추듯 자연히 기예를 발휘하게 '되어진다'. 기예가 발휘되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는 상태에서 기다렸기 때문이다. 참된 기다림이다. 오직 의도하지 않은 긴장만 남은 상태 (파란 점)에 머무른다면, 나머지 일은 <그것>이 한다. 하지 않으면서 하는 것, 무위 (無爲)의 기예다. 소금으로 과포화된 용액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소금 결정을 자연스럽게 쏟아내는 모습에 비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생각에 잠긴 채 물었다.
"참된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배울 수가 있지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이지요. 단호하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버려서, 오직 의도하지 않은 긴장만이 남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의도를 가지고 무의도적으로 되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아직 어떤 학생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답은 모르겠군요."
"그럼 언제 그런 새로운 연습을 시작하게 됩니까?"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 마음을 쏘다, 활 p. 55


사람의 지식으로 만물에 질서를 부여할 때부터 혼돈이 함께 생긴다. 질서가 없으면 혼돈도 없다. 질서나 혼돈은 결정된 (deterministic) 영역이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non-deterministic) 상태가 바로 질이다. 이 상태는 인위로 결과를 내는 영역의 밖에 있다. 사람은 <그것>에 오로지 반응 (respond)하는 수밖에 없다. 질에 반응 (respond)하는 연습이 선 (禪)이다. 사람이 주체나 객체가 되어 인위를 행하는게 아니라 사람이 <그것>에 반응하여 하나가 됨으로, <그것>이 나를 통하여 세상에 어떤 질서와 혼돈을 낳는다. 나는 순순히 그 통로가 된다.


그림을 1차원으로 바라보자. 가운데 파란 점과 그 주변의 물결파라고 생각해보자. 물결이 크게 요동칠수록 그 패턴을 발견하여 이론을 부여하기 수월하다. 이성은 파형의 높낮이가 두드러지는 곳, 혼돈은 파형의 높낮이가 두드러지지 않는 곳이다. 물결에서 두드러지는 패턴을 포착한 결과가 이론이다. 이론은 동인 (動因)일 수 없고 언제나 결과를 해석하는데 사용된다.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규칙을 어기게 되었다는 말은 성립하지만, 규칙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은 부자연스럽다. 규칙은 언제나 나중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면서 종종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어딘지 모르게 툭 툭 끊기거나 막혀서 꼼짝 할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찌할 바를 몰라 움찔거리게 된다. 내가 이미 아는 이론이 작동하지 않는 현상에 당황하는 것이다. 영어를 말하는데 표현이 어색하고, 글을 쓰려니 글이 안 나오고, 프로그래밍을 하는데 사소한 오류에 막혀서 진척을 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한다. 로직에는 문제가 없는데 에러가 난다. 코드를 아무리 뒤져봐도 틀린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당장 내일까지 완성해야 하는데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 공학적인 사고로는 모든 현상에 질서로운 답을 내놓아야 한다. 정답이 없으면 근사해 (approximation)라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답이 나오지 않으니 짜증이 난다. 답이 어떠해야 한다는 이론을 기반으로 사고하므로 길이 막힌다. 이론은 결과이고, 언제나 불연속적이며, 이미 결정이 완료된 사건을 해석하는 틀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면 이론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과학이나 기술 공학 분야에서 이는 드문 일이 아니다. 아니, 이는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상황이다. 별도리 없이 꼼짝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관리 방법의 측면에서 볼 때 최악의 순간이란 바로 이 같은 순간이다. 너무도 난감한 상황이어서 당신은 그런 상황에 빠져들기 전에는 이에 대해 아예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게 마련이다. 

이제 관리 지침서는 당신에게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는다. 아울러, 과학적 이성도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찾아내기 위해 그 어떤 과학적 실험을 할 필요도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는 너무도 명백하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홈이 망가진 나사를 빼내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가설이지만, 과학적 방법은 이 같은 가설들 가운데 어떤 것도 당신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애초 가설들을 세울 수 없으니 과학적 방법도 동원할 길이 없다. 

...

이 지점에서는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이 뒤섞여 폭발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끌과 망치를 사용하여 옆면 덮개를 떼어내고 싶어 할 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대형의 쇠망치로 끌을 내려쳐 옆면 덮개를 떨어져 나가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이런 해결책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런 해결책에 대해 점점 더 오랫동안 생각을 하면 할수록, 모터사이클을 통째로 높은 다리 위로 들고 가서 그 아래로 내던지고 싶은 충동에 이끌리게 될 수도 있다. 그처럼 아주 작은 홈이 이처럼 완벽하게 당신을 패배시킬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p.495


<그것>은 왼쪽이면서 오른쪽이라는 말처럼, 분리됨이 드러나기 이전의 총체적인 영역이다.


"그것은 어떠한 숙고의 과정 없이 영 (zero)이 곧 무한이고, 무한이 곧 영임을 인식하는 직관이다. 이러한 인식은 상징적이거나 수학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경험이다. 그러므로 해탈은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자아의 한계를 넘어선 피안의 영역이다. 논리적으로는 긍정과 부정의 종합이고, 형이상학적으로는 불변의 존재가 곧 생성 운동이고 생성 운동이 곧 불변의 존재라는 직관적인 파악이다."
                                                                                                                - 마음을 쏘다 활 p. 8-9


<그것>은 곧 질 (quality)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면서 모든 말의 원천이 된다. 내가 하는 일은 말로써 인위를 부여하는게 아니라, 미결정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자연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만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발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발사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 말씀은 이미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러니 다르게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내'가 더 이상 거기에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제가 무아의 상태에서 발사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최대로 당긴 상태에서 기다리며 머무릅니다."
"그렇다면 이 <그것>은 누구 또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 스스로 경험하는 단계를 생략하고 바로 그 길로 가도록 돕는다면 나는 최악의 스승이며 이 자리에서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이에 대해 논하지 말고 연습을 합시다!"
                                                                                                                  - 마음을 쏘다 활 p. 84


도는 사람의 언어 바깥에 존재한다.


당신이 직면해 있는 난관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긴 하나 서양의 사유 체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난관이며, 서양의 사유 체계가 경험해본 적이 없는 빈 공간이다. 당신은 무언가 묘안을, 무언가 가설을 필요로 한다. 서양의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은 불행하게도 어디에 가야 이처럼 필요한 가설을 좀더 많이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정확하게 말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마음의 여유를 누려본 적이 없다.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은 시력은 뛰어나지만 앞을 못 보는 헛똑똑이, 기껏해야 이 같은 헛똑똑이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다.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은 당신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확인하는 데는 훌륭한 역할을 한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진위를 테스트하는 데도 훌륭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당신이 가야 하는 곳이 과거에 당신이 가고 있던 곳으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곳이 아닌 경우, 당신이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창조성, 독창성, 창의력, 직관, 상상력 - 한마디로 말해, "꼼짝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능력"-은 완벽하게 이 영역 바깥쪽에 존재한다.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p.496


질에 반응한다는 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이란 주파수를 조절 레버를 더욱 예민하게 맞추어 더 깨끗한 소리를 듣는 것 뿐이다. 내가 주파수를 예민하게 유지하는 한 정보는 라디오로부터 흘러나온다. 방송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다. 정보를 듣겠다고 인위적으로 정보를 움켜잡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질 (quality), 덕 (德), 아레테 (arete), 도 (道), 그 무엇으로 부르든 간에 탁월한 그 무언가를 의미한다. 인위로 휘두르는 영역이 아니라 반응함으로 들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표현했다. 나는 그 음성을 '듣고', 받아적는 일을 수행한다. 내가 수행하기 전에 이미 그것이 있었다. 나는 이미 있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통로의 역할만 할 뿐이다.



신의 음성을 듣고 만드는 작품에는 인위가 없다. 사람의 이해를 초월한듯한 작품은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장인의 칼놀림이다. 내가 그것이고 그것이 나인 상태에 오래 머무르는 것으로 성취된다. 


동양의 모든 종교에서 지고의 가치는 타트 트밤 아시 (Tat tvam asi -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산스크리트어의 교리에 놓인다.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p.258


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가 소에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려 칼을 움직이는 동작이 모두 음률에 맞았다. 문혜군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어찌하면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포정은 칼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손끝의 재주 따위보다야 우월합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어느새 소의 온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그러면 천리(天理)를 따라 쇠가죽과 고기, 살과 뼈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보통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긴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 일의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여 경계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서 둘레를 살펴보며 머뭇거리다가 흐뭇해져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의 도를 터득했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질에 반응하는 구체적인 지침을 살펴보자. 미술, 음악, 글쓰기, 요리, 프로그래밍 같은 작품활동을 한다. 결정되지 않은 그 무엇을 떠올린다. 아직 만들지 않은 짧은 노랫말일수도, 글의 개요일 수도 있다. 아주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고 다만 느낌으로만 보이는 그 무엇이다. 뭔가를 일부러 결정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다. 다른 일을 하면서 방치하는게 아니라 계속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러나 일부러 결정하지는 않는 상태에서 기다린다. 그러면 날이 지나면서 기어이 어떤 형상이 떠오른다. 그때를 포착해 언어로 질서를 부여하면 작품이 겉으로 드러난다. 그것을 내놓기 전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일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어떤 느낌일지는 알고 그 느낌이 실체 있는 모습으로 현현 (顯現)하는데 나는 통로로 사용된다. 나는 꾸준히 기다리면서 그 느낌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반응할 뿐이다. 


인간이 내놓는 질서는 이성이다. 인간이 내놓는 혼란은 낭만이다. 이성과 낭만은 인간의 두 성향을 일컫는 축이다. 이성을 또 다른 이성으로 덮고, 그 이성을 또 다른 이성으로 덮으면서 허울좋은 말잔치가 되어 버렸다. 질서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어떤 일을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수행하는데, 정작 그 일을 하고 있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맥락없이 결과만을 나열해놓은 사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가득 찬 법률 조항이다. 


지식은 모름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알면 알수록 모름을 상대하는 법을 잃게 된다. 천지가 영원한 분열의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아담이 열매를 먹고 눈이 밝아져 더는 그 눈으로 도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지식이 도를 가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극단적인 혼돈은 아무 결과도 내놓지 못한다. 모든 질서와 통제를 거부하고 쾌락에 취하는 히피적인 성향이라 볼 수 있다.


누구나 어릴 적에는 자연스럽게 성취하던 것들을 어른이 되면 잊는다. 한국어는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영어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한국어를 배울 때는 내가 <그것>에 반응하는데에 장애가 되는 지식이 없었고, 영어를 배울 때는 내가 <그것>에 반응하는데에 장애가 되는 지식이 있었다. 지식으로 무장한 교수에게 그가 모르는 질문을 던지면 당황한다. 모름을 상대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앎으로 또다른 앎을 쌓는 법만 안다. 그럴 때 드러나는 모습이 움찔거림이다. 자료를 외워서 발표할 때의 어색함이다. 


질서도 혼돈도 아닌 제 3의 대안은 선 (禪) 이다. 그저 반응하는 상태에 머무름이다. 그 결과는 마음의 평온이다. 마음이 불편하면 선 ()을 행할 수 없는데, 이는 어떤 관념을 기준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장인은 결코 정해진 일련의 지시에 맞춰 일을 하지 않아. 그는 일을 해나가면서 매 순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바로 그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부산을 떨지 않아도, 그는 열중해서 일을 하게 되고 자기가 하는 일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게 돼. 그의 동작과 기계가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지. 그는 활자화된 지시 사항 어느 것도 따르지 않아. 왜냐하면 현재 다루고 있는 재료의 성질이 그의 생각과 움직임을 결정하기 때문이야. 동시에 그와 생각과 움직임이 다루고 있는 재료의 성질을 바꾸게 되지. 재료와 그의 생각이 변화의 과정에 함께 변화하는 셈이지. 마침내 재료가 다루기에 적당한 것이 되는 동시에 그의 마음이 평온해질 때까지 말이야."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p. 301


질서와 혼돈, 이성과 감성, 객체와 주체의 이분법은 질의 다음으로 따라나온다. 뭔가가 존재한 후에 덧붙이는 것이지, 뭔가를 낳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진심으로 생각하는 바는 글이 모두 완성된 다음 그 글에 덧붙인 것이 바로 규칙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사실에 앞서 상정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뒤이어 덧붙인 것, 인과 관계에 대한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흉내 내야 하는 모든 작가들은 규칙과 관계없이 자신에게 옳다고 생각되던 것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되는가를 가늠해보고,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면 그것을 고친다는 것이 파이드로스의 생각이었다.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p. 317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배운다. 모름에 반응하는 연습이 선 이고, 그를 통해 닿는 것이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는 모름의 상태, 곧 질 이며, 나는 질이 드러나는 통로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것을 배운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이런 생각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만일 그들이 옳고 그름을 미리 알고 있다면, 그들에게는 애초 강의를 택해 수강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강의 시간에 학생의 자격으로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추정체 하는 것은 그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그들에게 말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선생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이다. 강의실에서 학생 개개인이 창조성과 표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모든 생각 자체가 대학에 관한 모든 생각과 정말이지 기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p. 359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는 활동을 가지고도 선을 행하는 사람과 인위를 행하는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인다. 인위를 행하는 사람은 항상 끊김, 움찔거림, 부자연스러움, 분리됨을 겪는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연속됨, 자연스러움, 하나됨을 겪는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시선에는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산행과 자존심을 초월한 채 하는 산행이 같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두 종류의 사람이 모두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옮긴다. 두 사람이 모두 동일한 속도로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두 사람 다 피곤할 때 휴식을 취한다. 휴식을 취하고 나면 두 사람 모두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차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산행을 하는 사람은 통제가 되지 않는 기계와 같은 존재다. 그는 한순간 너무 빠르게 발을 내딛거나 한순간 너무 늦게 발을 내딛는다. 그는 필경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아래를 비춰주는 아름다운 햇살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흐트러진 발걸음이 자신에게 지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조차 계속 걷는다. 그도 이따금씩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그는 조금 전에 보았기 때문에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앞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고자 애를 쓰면서 산길을 올려다본다. 

그는 상황에 맞춰 걷기보다는 너무 빨리 가거나 너무 느리게 간다. 그리고 이야기를 할 때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어딘가 다른 곳, 무언가 다른 것에 관한 것뿐이다. 그는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여기를 거부하고, 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한결 더 먼 곳 저 위에 있기를 원하며, 일단 그곳에 도달하면 그곳은 다시 '여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불만을 느낀다. 그가 찾고자 하는 것,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그의 주변에 있지만, 그것이 바로 그의 주변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외부에 있고 저 멀리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육체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쏟아붓는 노고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현재 크리스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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