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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Sep 19. 2019

배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스노우보드를 탄다고 하자. 내가 다음 순간에 정확히 어떤 설질 (雪質)의 눈을 밟게 될 지는 그것을 직접 밟는 순간이 오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인생이 그렇듯, 한 치 앞을 모른다. 보드를 잘 타는 사람일수록 그 모름을 전부 순순히 받아들인다. 눈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고, 순간순간 만나는 있는 그대로의 눈에 자기를 맞춘다. 눈이 나에게 맞춰줄 수 없고, 내가 눈에게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안다. 눈에게 바뀌라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순순히 눈에게 맞추어 눈과 하나가 된다. 순종함이다.


보드를 타면서 욕심이 나서면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반면 보드를 잘 타는 사람은 여러 가지 동작을 수행하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 걱정 근심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균형이 첫째고, 속도는 둘째다. 그러므로 배움의 목적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기술을 발휘하면서도, 긴장된 상황에 처해서도, 갈수록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서도, 움켜쥔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는 것으로 본인 마음의 평화를 유지한다. 그럴 때에 있는 그대로의 눈을, 그 전체의 상황을 인식한다.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배움이 일어나는지는, 내가 그것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느냐에 달렸다. 기술의 난이도에 달린 게 아니라, 나를 얼마나 버릴 수 있느냐에 달렸다. 나를 움켜쥐고 있으면 남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포착하는데 실패한다. 나를 움켜쥐고 있으면 나는 둔감해진다. 예민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아집을 버리고, 나 아닌 그것의 변화를 주시해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 죽어있는 것은 예민하게 반응할 수가 없다. 아집은 스스로를 죽어있는 상태, 멈춰있는 상태로 만든다. 그러면 변화하는 환경에 나를 맞출 수가 없다. 환경이 변하든 자극이나 충격이 오든, 나는 변하지 못한다. 그대로 있는다. 배움을 잃는다. 움켜쥘 때가 아니라 놓아줄 때에 배움이 온다.


비유를 들자. 소금을 물에 녹여서 포화 용액을 만든다 하자. 불포화 용액, 포화 용액, 과포화 용액의 상태가 있다. 불포화 용액으로부터 소금을 끄집어내려면 무진 애를 써야만 약간의 소금을 얻을 수 있는 반면, 과포화 용액은 작은 충격에도 소금을 쏟아낸다. 전자는 둔감한 것이고, 후자는 예민한 것이다. 예민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면, 그러면 실적은 때가 되어 자연히 쏟아져 나온다. 배움에 있어서 실적이란 부산물일 뿐이다. 중요한 것도 아니고, 억지로 잡아뽑는 것도 아니다.


어른은 숟가락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숟가락을 본다. 필터라는 것이다. 어른에게는 이 숟가락과 저 숟가락이 같은 숟가락이다. 아이들은 개념을 통해서 사물을 보지 않는다. 숟가락이 때로는 삽 노릇을 한다. 어른이 될 수록 배우는 힘이 떨어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어른은 모르는 것을 상대하면서 자기가 아는 것을 들고 온다. 그러므로 배움에 실패한다. 아는 것을 계속 재확인 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한달 전 뉴스를 붙들고서 오늘 뉴스를 읽으려고 드는 셈이다.


악보를 외웠으면 악보를 잊어야 하고

개념을 배웠으면 개념을 잊어야 하고

기술을 배웠으면 기술을 잊어야 한다. 

그래야 과거의 필터를 통해 현재를 보는데서 오는 불일치를 없앨 수가 있다. 


요령이나 방법 이라는 것이 없어질 때

전체를 한 번에 볼 때

관찰자가 곧 관찰 대상이 되는 상태가 된다.

재물을 움켜잡을 줄 알면, 재물을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하듯

인연을 움켜잡을 줄 알면, 인연을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하듯 

그런 식이다. 

개념을 움켜잡을 줄 알면, 개념을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하고

지식을 움켜잡았다면, 지식을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

놓아줄 때에야 우리는 배울 수가 있다.


개념이란, 지식이란, 이미 지나간 과거로부터 두드러지는 특징을 포착하여 말로 기술한 것이다. 지식은 현재일 수가 없다. 언제나 과거의 것이다. 지식을 통해 현재를 보면 항상 어느 정도의 불일치가 생긴다. 배움에 실패하는 때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둘로 분리되는 때다.

아래: 어린아이, 중간: 어른, 위: 배우는 사람

그림의 세 가지 표현 중 가장 아래 것부터 보자. 어린아이에게는 필터가 없다. 사물의 전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본다. 계산 없이, 순수하게 그 순간만을 받아들인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 움찔거리지 않는다.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위험한 행동을 포함하여 아이의 모든 행동에는 인위가 없다. 위험하다는게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림의 중간에는 어른을 표현했다. 어른은 지식과 개념이라는 필터를 붙들고 산다. 위 그림에서 갈색 동그라미로 그려놓았다. 이론, 개념, 상식, 지식, 그런 것들에 자신을 옭아맨다. 관찰자인 나는 과거에 있고, 관찰되는 나는 현재에 있다. 자신이 둘로 분리된다.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이 둘로 분리된다는 말이 이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관찰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아는 것만을 재확인하면서 살아간다. 배움이 멈추는 것이다. 


그림의 가장 위에는 몸이 어른임에도 배우는 사람을 표현했다. 배우는 사람에게도 필터는 있다. 지식이 있고 개념이 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는다. 아는 것을 버리고, 모르는 상태에 그대로 몸을 가져다 댄다. 몸은 어른이라도 정신은 어린아이인 상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배운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 움찔거리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개념도 잊는 것이다. 


배움의 목적은,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둘로 분리된 인식, 개념에 사로잡힌 인식, 움켜쥔 인식을 풀어 자유롭게 하고, 그래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분리된 자아를 온전한 하나로 되돌리면, 그 때에 배움이 있다. 어른임에도 어린아이가 되는 그 순간에 배움이 있다. 사람이 행하는 어떤 기예의 대가이든, 늙어갈수록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이유가 이것이다. 배움을 위해서다.


그러면 교육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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