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6일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그렉 포포비치 감독이 감독직 사임을 선언했습니다.
지난해 11월 뇌졸중으로 팀을 이탈한 이후 복귀가 늦어졌기에 포포비치의 사임 루머가 돌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기자회견에 나와 "나는 더 이상 사령탑이 아니라, 보스다" 라며 6개월 만에 공식석상에서 사임을 밝히자 팬들의 충격은 컸습니다.
이제 포포비치는 감독이 아닌 샌안토니오 구단 사장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감독이었던 인물이 구단 사장이 되는 게 없었던 사례도 아니고 샌안토니오의 최근 성적이 좋았던 것도 아니지만, 감독 포포비치가 지금까지 이룬 업적들은 한 시대의 유산이라 평가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6년부터 팀을 이끌며 5번의 NBA 파이널 우승과 통산 1,422승-2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 등 샌안토니오를 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왕조를 만들어낸 전설적인 감독입니다.
데이비드 로빈스, 팀 던컨, 카와이 레너드, 토니 파커 등 기라성 같은 스타플레이어들 덕에 이룬 성과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스타플레이어에 의존하는 감독이었다면 29년간 한결같이 팀을 이끌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승수가 많은 감독이라고 쓱 읽고 지나가기엔 아쉬운 부분들이 많은데, 이번 글을 통해 포포비치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 좋을 것 같네요.
현 NBA 커미셔너인 애덤 실버가 NBA 엔터테인먼트를 총괄하는 수장으로 있을 때 일화입니다.
1990년대 말기에 NBA 엔터테인먼트는 세계화에 한창 힘을 싣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부터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끄는 LA 레이커스가 NBA의 인기를 이끌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1998년 조던이 은퇴를 선언하고 레이커스가 압도적인 전력으로 '1강'을 형성하자 실버는 이런 구도로는 팬들의 관심을 끌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레이커스의 라이벌들을 조명하는데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런 조건에 스몰마켓이면서 팀 던컨을 중심이 되어 우승후보로 떠오른 샌안토니오는 안성맞춤인 팀이었습니다. 실버는 샌안토니오를 중심으로 플레이오프 홍보 영상을 만들어 ABC 방송국에 제공했고, 야심차게 준비한 영상이 처음으로 전파를 탄 직후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바로 샌안토니오의 감독인 포포비치였습니다. 포포비치는 실버에게 홍보 영상에 유난히 한선수만 중심이 되어 영상이 구성된 것을 지적했다고 하는데요. "당신은 팀을 운영해 본 적도 없지 않냐. 당신에겐 사소해 보이는 문제도 우리 팀원들의 호흡을 깨뜨릴 수 있다." 면서 큰소리로 화를 냈다고 합니다.
포포비치가 팀워크에 해가 되는 일이라 판단되면 화를 내는 대상은 비단 실버뿐이 아니었습니다. 심판, 코칭 스탭, 기자 심지어 리그 고위 관계자까지 포포비치의 분노를 피해 갈 수 없었다고 하네요. 실버는 오랜 기간 포포비치를 지켜본 소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선수도 팀보다 위대할 수 없다는 변함없는 신념과 우승에 필요한 집중력과 세심함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렉 포포비치 감독의 뛰어난 유산에 대해 이야기할 때 5번의 NBA 파이널 우승을 이끈 그의 전술적 능력은 디폴트값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팀워크를 중심으로 한 탄탄한 수비농구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상황에 맞춰 선수들의 롤을 자유롭게 바꿔주며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다양한 공격전술을 세팅할 수 있는 유연함이 가장 큰 강점으로 꼽힙니다. 3점슛이 대세가 된 '大3점슛 시대'에 "난 3점슛에 몰입하는게 싫다."라고 밝혔으면서도 팀의 승리를 위해서 3점슛 활용도를 높인 전술을 들고 나오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술적인 능력과 우승 경력만으로 포포비치 감독의 사임이 많은 선수들과 팬들의 아쉬움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포포비치 감독은 非미국인 선수들을 가장 활발하게 활용하며 NBA에 해외 출신 선수들이 대거 진출하는 교두보를 만든 인물입니다. 1960년대부터 NBA에 해외 출신 선수들이 영입되긴 했지만 극단적으로 매우 적은 수의 선수들만 리그에서 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9년 지명한 마누 지노빌리와 2000년 지명한 토니 파커를 드래프트 하위 순위(지노빌리는 57번째, 파커는 28번째 였다.)로 지명해 명예의 전당급 선수로 성장시키며 샌안토니오 왕조를 이룩한 것은 포포비치 감독의 통찰력이 빛나는 부분입니다.
포포비치 감독은 최근 인터뷰에서 "1980년대 수석코치로 해외에서 선수들을 스카우트할 때, 나는 마치 사탕가게에 온 아이 같았다. 정말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 전 세계에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미국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라며 닫혀있던 NBA의 분위기를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지노빌리와 프랑스 출신의 토니 파커를 시작으로 샌안토니오는 해외 각지에 선수 스카우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호주, 터키, 중국, 세르비아, 이탈리아 등 다양한 농구 유망주들이 샌안토니오를 거쳐 NBA에서 자신의 진가를 펼칠 수 있었죠. 가장 최근엔 빅터 웸반야마(프랑스)가 샌안토니오의 드래프트 지명을 받아 신인왕까지 거머쥐었습니다.
샌안토니오의 성공을 벤치마킹한 다양한 팀들이 해외 스카우트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지난 6년간 NBA MVP는 모두 해외 출신 선수들이 독차지했죠.
니콜라 요키치(세르비아), 샤이 길저스-알렉산더(캐나다), 야니스 안테도쿰보(그리스)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그리고 많은 팀들이 지금도 해외 각지에 흩어져 농구 유망주를 발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바로 포포비치 감독이 만들어낸 트렌드입니다.
포포비치 감독의 또 다른 업적을 꼽으라면 '선수 부하 방지'란 개념을 사실상 최초로 도입한 감독이란 점입니다. 그전까지 NBA에 속한 선수나 감독들은 백투백(휴식일 없이 바로 이어지는 경기 스케줄) 원정 일정에도 주전 선수들을 모두 기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심한 부상이 있는 게 아니라면 주전급 선수가 '휴식'을 이유로 경기에 결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하지만 포포비치 감독은 스포츠 과학과 선수단의 건강 관리에 관심을 갖고 전략적으로 이를 활용한 사실상 최초의 감독입니다. 선수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왜 큰 업적으로 주목할 일이냐고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1승에 목숨을 걸고 성적이 떨어질 경우 경질을 당할 수 있는 숙명을 가진 감독이란 직책에서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NBA 리그사무국은 특별한 사유 없이 선수단에게 휴식을 줄 경우 벌금을 메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2012년 전국 생중계가 예고된 마이애미와의 경기에서 주전 선수들을 대거 휴식을 부여한 포포비치 감독에게 25만 달러의 벌금을 메겼지만,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죠.
"이 선수를 한 경기만 출전 시킬 것이냐? 3년 더 활용할 것인가? 그리고 부상 관리를 통해 플레이오프에서 써먹을 것인가? 이는 감독의 판단이다. 리그는 우리가 하는 일의 과학적으로 예전보다 훨씬 더 정교해졌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덕분에 선수들의 수명이 확실히 늘어날 것이다."
포포비치 감독이 2017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지금은 보편화된 트렌드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포포비치 감독의 사임 소식이 전해진 직후 다양한 곳에서 많은 반응들이 쏟아졌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골든스테이트의 포워드 드레이먼드 그린의 인터뷰였습니다.
휴스턴과 서부지구 1라운드 시리즈를 갖던 중 인터뷰에서 포포비치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린은 2021년 도쿄 올림픽 때 미국 대표팀으로 함께했던 추억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하는 도중 목이 메이며 매우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포포비치는 정말 놀라운 사람 중 한 명이에요. 그냥 겉모습만 보면 심술궂은 늙은이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정반대예요. 곁에 있고 싶은 가장 친절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정말 아끼고 아끼는 사람이에요."
"2021년 금메달을 딴 후 제 신발을 포포비치에게 선물했죠. 그리고 포포비치는 저희 팀과 경기를 할 때마다 그 신발을 신고 나왔어요. 하지만 올해는 샌안토니오를 상대로 경기하는 게 정말 끔찍했어요. 눈을 돌려보니 벤치에 그가 없었거든요."
"그런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경기 전 벤치에서 그를 꼭 껴안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포포비치가 죽은 것처럼 들릴지도 몰라요. 그는 죽은 게 아니에요. 포포비치는 이 리그에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갖고 있고, 저에게도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린의 인터뷰에서 포포비치의 사임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무뚝뚝하고 경기의 승패에만 관심이 있을 것 같은 승부사가 아닌 농구 전반의 트렌드를 선도하고 팀과 선수들에게 진심을 다하는 따뜻한 성품의 지도자라는 면에서 앞으로 많은 농구 지도자들이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실제로 현재 NBA에서 활약하고 있는 감독들과 코치들 중 포포비치와 샌안토니오가 만든 플랫폼 안에서 성장한 사례가 많습니다.
그들이 결국 포포비치가 만들고자 했던 가치를 계승하고 더 발전된 리그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이 글은 5월 8일 스포츠파이 채널에 등록한 글을 재업로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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