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소스 신화, 알려지지 않은 뒷 이야기
나르시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랑에 빠져 굶어 죽은 지 딱 1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가 죽은 연못 앞에 수 만 명의 요정들이 모였다.
호박 요정, 토마토 요정, 참외 요정, 포도 요정, 딸기 요정, 그 밖의 각종 과일, 채소 요정들과 참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잣나무, 은행나무, 올리브 나무, 온갖 나무 요정뿐만 아니라 빗자루, 행주, 밥그릇, 밥솥 요정, 각종 잡화 요정까지 참석하여 숲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뒤에 서 있는 요정은 조금이라도 앞으로 가려고 밀고, 앞에 선 요정들은 앞자리 안 뺏기려고 온 힘을 다해 버티는데, 그 와중에 발을 밟았다고 소리를 꽥꽥 지르는 요정들, 나르시소스에 대한 팬심이 자기가 더 깊고 대단하다고 우기다가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요정,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자기 자리를 빼앗겼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요정들까지 대단한 소동이 일어났다.
그 소리가 2.5킬로미터 떨어진 옆동네 숲에 까지 들릴 정도라서 이웃 숲의 나르시소스에 관심 없는 배불뚝이 아저씨 요정들을 비롯하여 동물들이 올림푸스 산에 민원을 넣을 정도였다.
<올림푸스 신이여, 헌법 35조에 따른 우리의 환경권을 지켜주십시오.>
소란 중에, 연못 앞 단상에서 땅이 쿵쿵쿵 울리는 묵직한 소리가 났다. 초대형 탱크가 굴러가는 것 같았다.
요정들이 소동을 멈추고 연못 앞을 바라보았다.
집채만큼 크고 뚱뚱한 참나무 요정이 소녀처럼 다소곳하게 가지를 모으며 인사를 했다.
숲은 순간 고요해졌다.
<우리 나르 오빠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오빠가 떠난 1년 전 오늘을 잊지 않으시고 다 함께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신 오빠도 여러분의 사랑을 잊지 않고, 하늘에서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참나무 요정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멈추자 여기저기서 통곡 소리가 들렸다.
참나무 요정은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사랑하는 오빠에게 편지를 낭송하고 편지를 불에 태워 하늘에 계신 오빠에게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가슴속에 고이 간직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앞으로 전달해주세요.>
수 만 무리를 이루는 요정들이 자신의 품 속에서 편지를 꺼내어 앞으로 전달했다. 그 모습은 위에서 보면 마치 개미 떼가 음식물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운반하는 것처럼 장관이었다.
편지 더미는 참나무 요정 앞으로 전달되었는데, 그 편지 더미의 높이가 3미터나 되어 참나무 요정의 턱밑에 까지 다다랐다.
참나무 요정은 애써 침착하게 가지를 뻗어 편지 더미 중 호박잎에 빼곡히 적힌 편지 하나를 끄집어내어 펼쳐 읽었다.
무리 중에서 기뻐서 폴짝폴짝 뛰는 호박 요정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요정들이 호박 요정을 부러운 눈으로 혹은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나르 오빠. 오빠가 떠난 지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저는 한 시도 오빠를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오빠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 깊어가고, 달처럼 더 커갑니다. 제 허리둘레만큼이나 오빠를 사랑해요.>
참나무 요정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자,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어났다.
<저도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다!>
<내가 더 사랑한다!>
<나는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참나무가 굵은 다리 뿌리로 땅을 때리며 소리 질렀다.
<조용해!>
순간 지진이 일어났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참나무 요정이 다시 소녀처럼 다소곳하게 가지를 모으며 말했다.
<조용히 해주세요.>
<이제 다른 편지를 읽어보도록 하지요.>
그때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는 한 요정이 손을 들고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무슨 질문이시죠. 물어보세요.>
숲 속의 요정들이 그 요정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서 수군수군 대는 소리가 들렸다. 왜냐하면, 그 요정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였고, 게다가 얼굴이 둥글 납작한 못생긴 얼굴의 아저씨였다.
<저기, 죄송한데, 나르시소스가 그렇게 미남이었나요?>
<그럼요. 당연히 미남이시죠. 그렇게 묻는 님은 나르 오빠를 잘 모르면서 여기 왜 오신 거죠?>
<저는 사실은 여기 연못의 요정입니다. 매일 같이 나르시소스 씨를 만났지요.>
<그럼 누구보다 우리 나르 오빠를 잘 아시지 않나요?>
<실은 잘 모릅니다. 다만, 나르시소스 씨의 눈에 비친 저의 아름다운 모습을 봤을 뿐이지요. 이제는 다시는 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쉽네요.>
말을 마치자 연못 요정은 숲 속의 그 누구보다 더 목 놓아 울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숲에 모인 요정들은 이성을 잃었다.
흥분한 요정들은 온갖 오물과 쓰레기, 흙덩이, 썩은 달걀 등을 연못에 던졌고, 순식간에 연못은 쓰레기 늪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