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사회 고발이나 현실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영화를 싫어한다. 그런 영화를 보면 우울해진다는 것이다. 반면 나는 고발 다큐나 냉엄한 현실을 다루는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동질감을 느끼고 거기에 빠져든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눈물이 나와도 참지 않는다. 어떤 땐 감정이 복받쳐 박자가 틀어진 호흡에 꺽꺽 흐느끼기까지 한다. 그럴 때면 아내는 ‘그러니까 그런 걸 왜 보냐’며 한 마디 한다. 나는 아내가 큰 고생 안 하고 커서 타인의 고통에 감정 이입하기가 어려운가 생각했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했다거나 기죽게 하는 궁핍을 견뎌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내보단 어렵게 자랐으니 스스로 ‘궁핍함에 대처’할 줄 안다고 생각했었다.
어느 날, 실은 정반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남의 고통을 그저 관찰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들을 보면서 진짜 고통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닐까? 정말 고통스러웠다면 피하려고 했을 텐데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내야말로 힘든 장면을 보면 진짜로 우울해져서 견디기 어려웠던 건 아니었을까? … 나이 들어, 마치 자신이 따뜻한 사람인 양,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사람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거나, 큰 고통 중에 있는 타인에게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해선 안 된다는 걸 배웠다. 진정한 위로의 말엔 따로 어법(語法)이 있는 것이 아니며, 때론 어떤 말로도 공감해주기 어려운 상황이 있다는 것을.
단순화시키자면, 우리 인생의 한쪽 절반은 보여주기다. 기회만 있으면 우리 외모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외쳐대는 나 자신이 어쩌다 무대에 오를 때 유독 자주 거울 앞에 서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어쩌다 있는 이벤트-가까운 벗들의 가족 행사든 더 큰 다른 모임이든-에서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정성을 쏟는다. 그러고 나면 나머지는, 혼자 마주쳐야 하는, 남들이 거의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견디는 일이다. 양상이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남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뚜렷이 가를 만한 분리막은 없다. 결국 모든 고통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공감의 대상이 된다. 지금 공감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 공감하게 될 것이다. 다른 이의 슬픔을 볼 때 자신은 그런 슬픔을 겪지 않을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이의 고통을 대할 때 지금보다 더 진지해져야 하는 이유다. ***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계속 함께 신음하며 함께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로마서 8:22)
사진: At the Heart of Suffering (Phoenix Sini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