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bae lee May 12. 2021

미쿡공돌이에서 VC가 되기까지 (8)

방탄복을 벗고, 새로운 밑바닥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하다

읽어 주신 분들 중에 전편을 읽고 난 후 제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많이 보내 주시네요. 일부 분들에게나마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

이제 드디어 삼성과, 엔지니어 커리어를 그만 두게 되는 시점까지 왔습니다.


전편에서 이야기했듯, 삼성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항상 저의 self image 를 신경 쓰면서, 조심하며 튀지 않도록 저자세로 지내는 데에 주력했습니다.


병특 기간은 3년입니다. 저는 2011년 초에 입사했으니, 2014년 초에 의무기간이 끝나게 되고, 그래서 2013년까지는 사실 "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잘 지내는 것에만 집중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다 보니, 일종의 '원만하게, 필요한 만큼만, 적당히만 하자' 라는 마인드셋이 계속 저를 '적당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 으로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딱히 일을 해 내는 거 이상으로, 더 잘 하려는 마인드가 없었습니다. 더 잘 할 필요가 없고 해야 하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성에서는 또, 일을 잘 하는 사람에게 일이 많이 몰리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마냥 부럽지만은 않았던 것도 은연 중에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티베이션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저는 그냥 안주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해가 바뀌고 2014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야금야금 갉아 먹던 작은 생각이, 묻어 두고 생각을 하지 않으려던 그 씨앗이, 눈 깜짝할 새 커집니다.


'나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평생 엔지니어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 나도 저랬으면 지금 이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겠지. ... 하지만 저 사람에겐 행복한 고민일지 불행한 고민일지는 모르는 일! ㅋㅋㅋ.


애플을 다니면서 수도 없이 봤고, 또 삼성을 다니면서 알게 된 많은 AAA급 개발자 분들은, 확실히 다릅니다. 이슈 또는 상황에 대한 반응속도와 머리회전의 속도가 다르고, 아는 폭과 깊이가 다르고, 만들어 내는 속도가 다릅니다. 결과물의 완성도도 다르지요. 하지만 그에 비해, 저는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코드를 접했을 때, ‘아 이게 이런 거구나’ 에 겨우 도달할 때쯤엔, 옆 사람들은 거기에 얹어 다른 걸 추가하거나, 아니면 비평하고 완전히 뜯어 고칠 수 있어서 이미 갈아 엎고 있거나, 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프로그래머/엔지니어로 밥벌이를 하다 보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새로운 코드를 짜는 줄의 수 보다는 남이 작성해 놓은 걸 빠르게 이해하고 고치고 얹고 하는 부분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지에서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오픈소스 코드를 베이스로 시작한다면, 마찬가지로 코드 독해력이 중요하죠.)

이 현상은 사실 대학교를 다닐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나중에 삼성전자를 다닐 때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즉, 항상 선두 그룹에서 뛰고 있는 달리기 선수가 아닌, 2차그룹 23차그룹에 속해서 뛰어야 하는 그런 느낌을 항상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morale 은 물론, 성과 평가 기간에 “난 남들보다 이걸 더 잘 하고 많이 했어요” 라고 말할 건더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걸 5년 이상 반복을 하고 살다 보니, 제 머릿속엔 ‘나는 그냥 평범한 수준의 엔지니어’ 라는 자기 인식이 강했습니다. (물론, 남들이 보셨을 때, 특히 tech 분야 비종사자 입장에선 “야 너 애플도 다녔고 삼성도 다니고 있잖아 너 정도면 ㅁㅁㅁ 인 거야”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전 자기객관화를 냉정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관점에서 전 so-so 였다고 생각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인재? ㅎㅎㅎ.)


물론, 5년차 이상이 되어 갈 때쯤에는 “감” 이라는 게 조금 생겼습니다. ‘아, 이 바닥은 어떻게 돌아 가는 거구나’, 또는 ‘아, 내가 앞으로 내 족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거나, 어쨌든 peer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이 정도의 노력이나 이 정도의 성과는 더 내어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 하지만, 꿈에서도 코딩을 하고, 코딩을 더 잘 하는 게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꿈또는 희망사항이고, 더 노력하고 싶고, 업계 1등이 되지는 못 하더라도 상위 1% 가 되고 싶은 욕심이 점점 더 생기고 해야 할 텐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자기객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냉정하게, 내가 이 바닥에서 계속 남아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를 많이 생각 하려고 했습니다.


어쨌든, 할 줄 아는 게 코딩 밖에는 딱히 없었기 때문에, 삼성전자 재직기간이 끝날 때 쯤 (= 3년이 다 차고, 또 참여했던 프로젝트가 후반부에 접어들 때쯤) 부터는 회사 몰래 다른 곳들을 알아 보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제 틈새분야를 눈여겨 본 헤드헌터의 연락도 링크드인을 통해 받았었고, 또 미국에서는 마찬가지로 링크드인의 키워드 검색을 통해 “embedded engineer” 류의 검색어를 넣어서 JD를 찾아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전화인터뷰도 몇 군데 기업이랑 봤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Fitbit 이었고, 업무 시간 동안에 전화 부스에 들어가서 땀흘리며 면접을 봤던 기억도 납니다. 에헴...


삼성에서의 퇴사 과정


하지만, 아무 것도 확정된 것이 없는 채로, 관여했던 프로젝트가 여차저차 해서 끝나게 되었습니다. 별로 성공적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게 지금 시점에선 중요하진 않고... 2014년 5월 또는 6월 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프로젝트 중간에 시간이 비어 있을 때 퇴사 선언을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편하고 안전하겠다’ 싶어서, 퇴사 의향을 밝히게 됩니다.


삼성에서 퇴사를 했을 때의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인사과에서는, 통보를 했을 때 별로 놀란 눈치도 아니었습니다. 아마 통계적으로 ‘외국에서 유학하고 + 병특으로 입사한 + 몇 살 정도의 임직원은 = 몇 년을 넘기지 못한다’ 이런 통설이 있지 않았을까...


1) 프로젝트 종료 후, 퇴사를 결심하고 HR 에게 통보하고, 붙잡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인 받음

2) 아마 그 후에 부서장과 면담 및 상위부서장(전무급 그룹장 아저씨)와 면담 진행함

3) 그 후에 팀원들에게 공유하고, 퇴사일 전에 퇴사 송별회 회식을 진행함


... 하지만 사실, 1번 절차 훨씬 이전에, 다른 이벤트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름 삼성 내에 남아 보려고 한 번 시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뭐냐면, 바로 지금의 Samsung Next 라고 불리는 조직의 전신인 Global Innovation Center 라는 조직에 부서이동 지원을 하고, 가차없이 인사과에게 컷트 당한 이벤트 입니다. 아마 2014년 연초였을 겁니다. (삼성 내부 전산시스템 상에서만 지원했고 외부 기록이 될 만한 그런 게 없었어서, 이런 기억을 일기든 개인블로그든 어딘가에 적어 놓았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지금의 후회를 합니다...)



David Eun 이라는, 지금은 삼성에서 물러나신 뛰어난 교포 임원이 있었습니다. (한 때 삼성전자의 C-level 까지 역임. 이 분의 행보는 이런 류의 기사 참조​.) 이 분이 세팅하신 조직이 GIC 인데, 아마 그 전엔 OIC 즉 오픈이노베이션센터 였던 걸로 알고 있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삼성전자에서 오픈이노베이션을 먼저 해 보려다가, 이 분 영입된 후에 이름도 바꾸고 좀 더 글로벌하게 가라고 mandate 를 넓혀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GIC 가 지금까지 해 냈던 성과 들 중 제일 잘 알려진 딜이 루프페이를 인수해서 삼성페이를 만들어 낸 것, 그리고 스마트띵즈 인수, 이렇게 있다고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 여담인데, 공교롭게도 저 분의 대타로서, 실리콘밸리 투자자 중에서 아주 유명한 분 중 한 분인 David Lee 라는 또 다른 데이비드 교포 아저씨가 부임을 했더라구요. SV Angels, Refactor 등의 다양한 투자사를 직접 운영하고 또 후덜덜한 유니콘 기업에 투자를 많이 하신 분인데, Samsung Next 총책임자로 오셨다고 해서 아주 재미있는 조합이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컨퍼런스콜을 하며 인사를 할 일도 있는데, 과연 어떤 역할을 하실 지 기대되네요.


어쨌든, 어느 날 사내 잡포스팅 시스템에 들어 가 보니, GIC 에서 지원 신청을 받는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오픈이노베이션이고 투자고 뭐고 아무 것도 모르는 코딩쟁이 였기 때문에, 해당 역할이 정확히 어떤 role 이 될 지에 대해서는 감으로 아는 상황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 그래도 나름 미국에 오래 살았고 미국에서의 근무 경험도 있으니, 실리콘밸리의 기업들과 파트너십/투자/인수 등의 다양한 기능 수행을 한다고 하는 저 조직에 가면 뭔가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소위 ‘이번에도 나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지 않을까’ 하는 심보를 발동해서 지원을 해 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거의 바로 인사과에게 ‘불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아마 1차 필터링에서 바로 걸러낸 것 같습니다. 이 연락을 받았을 때, 저는 딱 ‘와 열받네’ 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표면적 사유가, “현재 S직군 (원래 E직군이었다가, 소프트웨어 관련 임직원만 S직군이라고 발라내서 따로 관리평가 하기로 함) 에서는 채용을 하지 않는다” 였기 때문입니다. 즉, 사업 또는 운영 등 스탭조직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만 받겠다는?


지금 생각해 보면, 저 같은 직원을 다른 조직에 넘겨 주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을 법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현재까지의 실제 성과가 어떻든 간에, 기껏 “해외채용” 분류된 어렵게 공들여 뽑아 온 사람인데, 아무리 삼성전자 내의 영향권에 있는 Samsung Next 라고 해도 엄연히 외부조직이라, 일단 사업부 밖으로 내보내는 것 자체가 인사과 또는 고위임직원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상대편 조직에서 “와 이 사람 당장 가용 가능한 human resource 인데, 우리 꼭 데려 와야 합니다” 라고 할 만한 스펙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을 맡겼어도 천천히 learning curve 를 탔어야 했을 겁니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제게 이 일련의 사태는 ‘삼성은 사람을 알아 보지 못 하고 믿어 주지 못 하는 조직이라는 방증’ 으로만 인식됩니다. 속으로, “그래, 삼성 인사과는 갑갑한 구습 위주의 절대 바뀔 일 없는 조직이고, 내가 저기를 믿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오래 있는 한 어차피 어느 부서에 가든 저 사람들에게 좌지우지되고 휘둘리는 삶 밖에는 없다” 라고 비뚤게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이 건 한 편으로는 단편적인 임프레션이 아닌, 누적값이기도 합니다. 입사 초반에 인사 조직의 최고봉이라는 인재개발원의 원장 아저씨에게 수모를 당한 일도 있고, 또 중간중간에 부서 내에서 그 동안 있었던 일들 (예를 들면, 어느 박사급 개발자가 본인의 전공분야와는 전~~~~혀 관련 없는 부서에 배치되어서, 업무 적응하느라 너무나 고생을 한 사례들) 을 봐 오면서, 이 대기업의 시스템에 한계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평소에 했던 것도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게 7년~10년 전 일이고, 지금은 많이 바뀌었을 수 있고 해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게 정말 전부는 아닐 수 있다고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실제로 한 때 친했던 중학교 동창 중에서 아직까지 삼성전자에서 평생 인사과 조직에만 몸담으며 자기 커리어를 쌓아 나가는 그런 지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개인 레벨에서는 ‘우리 조직 우리 회사 이런 건 참 싫고 짜증나고 하지만 싫어도 해야 하니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윗선이 바뀌어야 하고, 그리고 자연스러운 bottom-up 변화이든 외부충격에 의한 변화이든 어쨌든 변화를 가져 올 만한 요인들이 계속 생기게 될 것이라고, 필연적인 진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도 조직도 사회도 진화를 해야 살아 남을 테니까요.


(삼성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말이 길어지네요.) 어쨌든, GIC 라는 조직은 “내가 삼성에 남아서 계속 일한다면 유일하게 가서 더 비벼 보고 싶은 조직” 이었습니다. 그 점프의 시도가 무산된 후에는, 삼성에 더 이상 남아야겠다는 미련이 싹 없어졌습니다. 그 덕분에 시원하게, 깔끔하게, 속 편하게 퇴사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우 파랗다... 받아 주지 않았어서 고마웠다 삼성넥스트.


‘No idea what, but... something must be out there for me.’


보통의 경우에는, 이직을 할 때 건너갈 직장을 확정지어 놓은 후 퇴사를 하지요. 저도 그랬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종료기간의 기약이 없는, 백수 선언을 합니다.


제 커리어 이야기를 오프라인 자리에서 이야기 할 때, 이 대목에서 정말 많은 분들이 지금까지 놀라워 하셨습니다. “정말로 걸쳐 놓은 곳 없이 삼성을 나왔었다구요?” 라고요.


그 이유 또한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딱 봐도 risk-averse, 안정추구형 인간인데. 또는 삼성을 들어갔었다는 것 자체가, 단단한 입지가 있어야만 하는 사람일 텐데, 하는 가정이 끼어 있다던가. 아니면 어쨌든 안전망 없는 이직이라는 것 자체가 아직 한국에서는 쉽사리 통용되지 않는 그런 사회여서 이던가.


당시의 저의 생각을 다시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퇴사시점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새 프로젝트를 던져 받기 전에 튀어야 한다.

- 퇴직금 등이 나오니까, 그걸로 당장 몇 개월 정도는 먹고 살면 되고, 천천히 고민하고 찾아봐도 될 것 같다.

- 난 미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당장 한국에서는 국경도 점프하고 회사도 동시에 옮기는 그런 이직이 쉽지 않으니, 일단 현지에 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퇴사가 답이다.

- 아직 미국 시절 사귄 친구들도 자주 연락되고, 친하고, 또 그들이 뭐하고 사는지를 보다 보면 영감과 기회도 저절로 생길 테니, 잠깐 쉬어가는 셈 치고 한시적 무직 상태를 유지해도 떳떳할 것 같다.


실제로, 가서 비비기만 하면 뭐든지 될 것 같았습니다. 자신감이 넘쳤나 봅니다. John Mayer 노래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 중 하나가 No Such Thing 이라는 제목의 노래인데, 가사 마지막 부분의 “I’m gonna bust out the double door / And when I stand on these tables before you / You’ll realize what all those time was for” 이라는 식의, 거 봐라 내가맞지 않았냐 라는 그런 우쭐의 세레모니를 해 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습니다. 분명히 사람들은 “야 왜 그 좋다는 직장인 삼성을 그만 두려고 하느냐” 또는 “그래서 나가서 뭐해먹고 살 건데” 라는 질문을, 우려 섞인 비판을, 하리라고 예상했습니다. 특히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과 친지들이 그런 생각을 뻔히 하리라는 걸 감안했고, 그 관념을 어느 정도 깨 주고 싶었나 봅니다. 지금 생각하면 역시 참, 당시엔 아무리 ‘나는 성숙한 인간이다’ 라고 생각하고 살았어도, 참으로 개선의 여지가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인간이란 이렇게 한없이 불완전한 존재인가 봅니다.


그 때 주변인 설득에 버무려서 활용했던 대표적인 키워드가 “창업” 이었습니다. 타이밍도 한몫 했던 게, 당시에 이미 배달의 민족이나 미미박스 같은 서비스들이 잘 되기 시작하고, 지면 기사로도 나오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부모님이 보시는 메이저 신문들을 펼쳐 봐도, 전통적인 커리어패스가 아닌 스타트업/창업 테크트리를 타도 이렇게 ‘나름의 성공’ 을 할 수 있고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명분으로 쓰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요, 이것 보세요, 이렇게 창업 비스무리한 걸 한 미국 친구들도 있고 (실제로는 잘 안 되었지만 어쨌든 있었음) 그러니 저는 삼성 밖을 나가서도 이런 류의 노력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안되면 다시 취업하면 되고 등등등” 이라는 말씀을 드렸던 순간과 장면도 아직 기억 납니다.




이렇게만 놓고 보니, 저는 결국 지금 하고 있는 이 쪽 일에 자연스레 저도 모르게 끌리고 있었나 봅니다. 영어로는 Gravitate towards 라는 좋은 표현이 있습니다. 중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에 저절로 그 쪽으로 가고 있는 양상.


창업이라는 키워드도 남발하고, 또 삼성 내에서 스타트업들과 같이 지지고 볶고 같이 뭔가를 해 내고 또 되면 투자 등등 다음 단계 일도 하고. 이런 과거사를 돌아 보니, 저는 계속 이 쪽 분야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 맞네요.


그리고 정확히 어느 시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의 소개를 받아서 (지금은 꽤 친하게 지내고 있는) 알토스벤처스의 현직 투자자도 만나 인사해 보고, 미국에 사시는 먼 친척분의 소개를 통해서 또 같은 회사의 미국 본사 파트너(=임원)도 만나 보고, 한국의 다른 투자사 사람들이랑도 티타임을 하거나 실제로 가벼운 면접까지도 보고. 이런 일련의 노력들을 백수 기간에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벤처캐피탈 이라는 업계가 정확히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으니, 여기에 꼭 들어가겠다” 라는 그런 스탠스로 접근을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마냥 호기심에, 주변을 가끔 배회했던, 한 마리 새 같은 입장이었다고나 할까?


백수 기간동안에는 많은 것들을 했습니다. 즉:

1) 첫 한달 동안은 한국에서 팽팽 놀았음

2) 두번째 달에는 한달 동안 미국 전역을 싸돌아 다니며 친구들과 캐치업 했음

3) 그 후에는 한국에 돌아와서, 갑자기 멘탈이 무너지며 전전긍긍하게 되고, 불안함에 쌩뚱맞은 공부를 하기 시작함


2014 10월부터는, 저는 정말 인생 최고의 암흑기를 2~3개월  보내게 됩니다. 하필 겨울도 오고... 당시에 저를 알던 친한 친구들은, “ 얼굴 근육 굳었다 / 웃음기가 없어졌네라고   우려 섞인 걱정을  줬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갑자기 나락으로  수도 있구나 하는 아주 소중한 경험. ( 때부턴 돈도 아끼느라 매일 김밥을... 쿨럭)


그 때의 감정을 생각해 보니, 오늘 글의 상단 이미지, 심해잠수부 diving bell outfit 이 생각이 나서, 퍼 와서 박아 봤습니다. 아휴. 회상할 때 마다 참 감회가 아주 새롭네요.


... 글이 너무 길어졌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쓰고, 정확히 무슨 공부를 하게 되었고 또 그게 결국 어떻게 이어져서 위기에서 헤어 나오게 되는지를 다음 글에서 써 보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쿡공돌이에서 VC가 되기까지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