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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위의청년학교 Jun 16. 2022

배움을 얻는 경험과 삶에 대한 이끌림

길위의청년학교 조용준

꿈은 평생에 걸쳐 정하는 것


“지금 좋아하는 일을 나중에 할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꿈은 평생에 걸쳐 정하는 것이고, 직업을 가진다고 해서 꿈은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부터 문학, 번역, 언론 등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나에게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되돌아오게 되더라도 배울 점이 있다면 놓치지 않도록, 넉넉하지 않더라도 나눌 수 있도록 마음과 행동으로 지지해주신 것이 내가 쭉 걸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며칠 전 아버지와 나란히 누워 이름 모를 외국 드라마를 보다 문득 궁금해져서 여쭤봤다. “다른 집 같으면 아들이 집에 안 붙어있는 게 걱정돼서라도 한 번은 말렸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러셨대요?”라고. 


그러자 “네가 그 때 그 때 너무 진심이었으니 말릴 수도 없었지. 회사 사람들한테는 ”우리 아들 구글에 청소년기자로 이름을 검색하면 나온다”고 지금도 자랑한다.”고 말씀해주셨다.


주말 오후 2시에 활동이 있어 나가보겠다던 아들이 막차를 타고 들어왔는데 새벽까지도 방에 불이 켜져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평일에는 학교 끝나고 지역아동센터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 밤 늦게 돌아오고 토요일에도 어느새 집 밖으로 나가있으니 집에서 밥도 안 먹는다면서 걱정하셨던 것이다. 사실 어느 쪽이든 내가 받는 것이 더 많다고 느끼고, 내가 감사와 즐거움을 얻었기에 이렇게 글로 적는 것도 다소 민망할 따름이다. 선생님들께서, 아이들이 반겨주니 상황과 능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함께했으니 말이다.

뒤에서도 설명할 내용이지만 토요일에는 청소년기자단 활동으로 공간에 모였다. 활동 중 유명했던 별명이 있었는데, 바로 ‘수액보이’이다. 왜인지 활동을 하던 중, 몸에 힘이 없어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가는 정도였다. 그래서 그 때마다 병원에 수액을 맞으러 가서 생긴 별명이다. 병원에서는 류마티스 관절염, 기립성 저혈압 등의 진단을 받기도 했는데 후에 다시 번복하신 것을 보니 별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건강한 걸 보면 괜찮은 게 맞다. 아버지께서 내가 매번 진심이라고 하셨던 것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초등학생 때 지역아동센터에서 마음과 인생을 공유하고자 진심을 다하시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을 보고 나 또한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꿈의 처음이었다. 다만 그 때는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다. 선생님에 대한 감사와 존경과 함께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럴 자신이 있어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공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도전 정도가 될 것 같다. 어떤 직업을 가지든 지금까지의 감사를 센터와 후배들에게, 또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진로는 계속해서 바뀌어왔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지금 사회복지학과 그 가치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제 2의 가족아이소리


“오빠인데, 선생님이예요!” 학부모님이나 현장실습 등으로 아이소리 지역아동센터에서 새롭게 만나는 분들에게 아이들이 해주는 내 소개이다. 센터가 아직 공부방으로 불렸을 적인 10살부터 이용아동으로 있다가 지금도 졸업생으로 봉사하다보니 나온 설명이다.


2021년 올해로 13년간 함께하는 셈인데, 아직도 센터에서의 처음이 기억에 남는다. 저녁 식사가 끝난 시간, 당시 공부방 형누나들이 설거지를 두고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신기한 것은 하기 싫어 미룰 법한 설거지를 서로가 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어리다고도 느낄 수 있는 초등 고학년들이 식사 후에는 스스로 나서서 선생님과 함께 설거지를 하고, 공부 시간에는 어려워하는 동생들을 알려주는 모습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당시에는 아동 수에 비해 선생님이 부족했기에 이 부분이 더욱 드러났는데, 동생들을 돌보는 것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나서는 모습이 정말 가족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도 형과 오빠가 되어갔고, 공부를 하다가 동생들이 모르겠다고 하면 알려주곤 했다. 영화관이나 스키장에 처음 가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악기를 배워 무대에 서보기도 했다. 에어로빅 프로그램으로 내가 굉장한 몸치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고, 제빵을 배우기도 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방학숙제를 함께하기도 하고, 자치회의에서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를 이야기하는 등 학교에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하고 배우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 


야간보호를 포함해 많은 프로그램의 유치와 운영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는 어린 나이에도 어느 정도 알았기에, 센터 모두가 더 열심히 참여하며 사랑을 배웠다고 본다. 그런 진심어린 애정이 졸업생들을 센터로 찾아오게 만들고, 지금도 많은 선후배들이 그렇게 감사의 뜻을 전하러 오곤 한다.


나 역시도 고등학생이 되며 지역아동센터를 졸업했지만 아이들은 계속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용돈을 모아 간단한 간식을 사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 빈 손으로 가더라도 아이들은 항상 반겨주었다. 그러면서 매년 생일, 수능을 비롯한 각종 시험, 군 입대와 복무 도중, 전역을 포함해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축하 혹은 지지와 응원 등을 받으며 마음을 주고받는 법을 배워왔고 그것이 지금 나의 뿌리가 되었다.

특히 최근에 군생활을 마친 만큼 특별한 일화가 있다. 코로나19가 국내로 들어오기 직전에 공군 병으로 군 입대를 했는데, 잘 다녀오라는 의미에서 센터에서 다함께 외식을 다녀왔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보고 싶을 거라며 다가와 안아주기도 했다. 


훈련단에 있을 때 유일한 낙이라고 한다면 역시 편지인데, 행군훈련을 다녀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부분대장으로서 보고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후 생활관에 들어왔더니 내 자리 침상 위에는 아이소리에서 보내준 편지로 가득했다. 너무나 기쁜 마음에 군장을 내려놓기도 전에 편지다발을 소중이 챙겼다. ‘우체부 아저씨 감사합니다’라고 봉투 하나하나 쓰여서, 코로나 조심하라고 많이 힘들겠지만 아이소리 생각하면서 힘내라는 내용으로 소중한 이야기들이 적혀있었다. 맘 놓고 읽을 시간도 없는 빡빡한 훈련일정이었지만, 챙겨갔던 지퍼백에 소중히 담아 수료할 날을 기다리며 편지 한 장 한 장을 보고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도 그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나를 소개하면서 ‘지역아동센터에서 졸업생으로서 함께하고 있다’라고 말하지만, 특별한 실천기술이나 전문지식이 있어서도 자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오랜 기간 봉사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낄 때가 많다. 


최근에는 대학 수업 외에 시간이 날 때마다 센터에 가려고 하는데, 시험기간인 중학생 친구들과 함께 수학공부를 하다보면 서로 많이 웃곤 한다. 개념정리가 중요한 삼각비 단원인데 중학생 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다보니 그 부분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설지와 문제를 번갈아보며 이해한 후에 설명하다보니, 사실상 알려주는 게 아니라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남에게 설명하면 더 공부가 잘 된다더라는 학습법을 의도한 것도 아니며 나도 함께 배우고 있는데도, 그걸 이해해주고 유의미한 배움으로 쌓아가는 아이들에게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꼭 여유 되면 따로 공부해오겠다고 약속도 했다. 이런 교과목의 부분이 아니더라도 서로간의 상담 내지는 조언이 오가기도 하고, 요즘은 무슨 드라마가 재밌다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한다.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도 있지만, 거리감 없이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지역아동센터라고 하면 누군가에겐 굉장히 생소할 테지만 나에게는 자라온 곳이고 또 다른 가족이며, 깊이 사랑하며 사랑받는 공간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닌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을 하나 둘씩 늘려나가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이기에 내게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인생 배팅 편집팀에서의 배움


지역아동센터 졸업 후, 한 때 프로그램 외부 강사로 뵈었던 사무국장님과의 인연으로 청소년자치연구소 달그락달그락의 활동에 함께하게 되었다. 달그락은 당시 영상, 봉사, 경제, 작가단 등 다양한 분야의 동아리가 청소년자치기구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교지편집부 활동 중이었기에 청소년기자단에 흥미를 갖고 활동하게 되었다. 


그렇게 ASPECT 청소년기자단 2기 교육팀에 소속된 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ASPECT는 측면과 초점이라는 의미로, 사회 전반을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슬로건을 갖고 있다. 지역 일간지 새전북신문과 협약을 맺어 16면에 청소년기자단의 기사를 기고하는데, 이 16면이 굉장히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어느 가운데가 아닌, 신문을 받았을 때 뒤집으면 나오는 면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새전북신문 대표님과 기자님께서 매년 청소년기자 위촉식에 함께하며, 기자교육까지 진행하시는 점을 보고 더욱 자부심을 갖고 활동할 수 있었다. 


공교육과 사교육, 입시제도 등에 의문을 갖고 있었기에 교육팀을 선택했다. 부족한 글임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정권에 따라 무분별하게 바뀌는 교육과정에 대한 주제와, 의무제로 인해 퇴색되는 봉사활동의 의미를 다룬 칼럼이다. 특히 입시를 위해 생활기록부에 기재하기만 하고 실제로 활동은 없는 일명 ‘페이퍼 동아리’에 대한 칼럼에서는 흥미로운 주제라며 신문사 작가님께서 삽화를 그려주시기도 하셔서 주변에 자랑도 많이 했던 것 같다.

매주 지면에 기사를 기고하니 모임 역시 매주 가졌는데, 편집회의에서 청소년들이 구성과 주제 등을 기획해서 실제 취재에 나섰다. 그 현장은 가까이에서는 달그락의 청소년활동에서부터 학교현장이 있었고, 넓게는 대선 투표소와 광화문 광장 등 다양한 곳으로 확장되었다. 


청소년자치기구에서 고등학생들 대부분은 3학년이 되면서 대입 준비에 집중하고자 하지만 난 활동을 지속하고 싶었고,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과 함께 편집팀 ‘Desk’를 조직했다. 팀의 슬로건은 인생을 건다는 의미에서 ‘인생 배팅(betting) 편집팀’이 되었다. 고3이 입시공부 외에 매 주말에 시간을 내어 다른 활동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나온 아이디어이다.


ASPECT 2기에서 아쉬웠던 점은 기사가 신문사에 전달되는 과정이었다. 담당 청소년기자가 기사를 작성하면 사회참여팀 간사님을 통해 1차적인 편집이 진행된 후 기자님에게 전달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기고되는 기사 4편이 매주 간사님께 몰리면 해야 하는 일이 많다. 기본적인 맞춤법이나 문장구조의 첨삭은 물론이고, 담당 청소년과 피드백까지 진행해야 하는데 많은 주의력과 수고가 드는 일이다. 익숙한 기존 팀에서 활동을 이어나가지 않고 편집팀을 개설한 이유 2가지는, 청소년이 작성한 기사를 청소년이 함께 피드백하는 공식적인 체계 만들기와 간사님의 부담 덜어드리기이다. 


편집팀의 전체적인 역할은 이랬다. 팀 계정을 만들어 다른 팀의 기사를 받아 1차적으로 첨삭과 피드백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주된 일이었고, 기자교육을 보조하거나 자체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기고 일정을 조율과 설문조사 기획도 담당했는데, 작성이 완료된 기사 뿐 아니라 주제를 선정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까지 도움을 요청받기도 했다. 편집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팀 기획기사 등으로 내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청소년기자들 저마다의 생각과 고민이 담긴 글들을 보면서 다양한 분야에 문제의식을 갖기도 하고, 개인이 아닌 조직으로서 활동하는 법을 배웠다. 내 시선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이 모이는 과정과 이 역시 사회에 참여하는 일이라는 생각들이 꿈을 키우는 데에 더 도움이 되었다. 


편집팀을 조직하기 전 기사 수정제안 때의 이야기이지만, 당시 정치사회팀에서 졸음운전으로 인한 다중 추돌사고에 대해 다룬 기사가 있었다. 운전자의 졸음 방지와 차량 안전장치 등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수정제안 회의에서 담당 청소년기자의 설명을 듣기도 하고, 자세한 기술이나 경험에 대한 내용을 조사하기도 했다. 방학이었고 보도기사의 핵심인 시의성을 지켜야 했기에 달그락 공간에서 꽤나 자주 만나서 담당 청소년기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왜 이 사안에 대해 다루게 되었는지, 자신이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들으면서 관심을 갖지 못했던 분야도 알게 되었다. 


기고 활동 외에 청소년사회참여발표대회와 군산시 청소년의회, ‘군산시 청소년자치권 확대를 위한 조례’, 청소년 칼럼집 ‘달그락꿈뜨락’ TF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18세 선거권에 관련된 활동에도 다방면으로 참여했는데, 입대 직전에 선거연령이 만 18세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직 먼 길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 참정권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어떤 일이든 자신과 관련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기자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청소년기자단의 큰 역할이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이 생각하는 문제를 널리 알리고, 그것을 청소년만이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로 공감하게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기회를 얻어 부족하게나마 청소년 활동에 함께하려 하는데, 그 이유를 꼽자면 그런 공감의 과정이라고 본다. 후기 청소년으로서, 그리고 청소년과 청소년이 될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입장에서 청소년이 겪는 문제는 어느 특성을 가진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아동에서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이 청년이 되기까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들과, 거기서 얻은 배움들이 진로를 정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역아동센터에서 선생님들을 보고 일선 실천현장의 사회복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청소년자치연구소에서는 거시적이고 사회 전체적인, ‘사회참여’의 관점에서 사회복지를 보게 해준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 역시 많은 활동가 선생님들의 노력에 기초한 것임을 알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 함을 안다. 그만큼 앞으로의 경험에서 그 안의 배움에 주목하고, 사회에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일단은 아이들을 위하는 데에서 


길 위에서 만난 배움앞으로의 나아갈 나의’ 


청소년자치연구소에서 활동한 인연을 바탕으로 군 전역 후, 길 위의 청년학교에 함께하게 되었다. 사회복지계 현업에서 종사하시고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수많은 고민을 거쳐 오셨을 대선배님들과 함께 ‘청년’으로서 활동하는 곳이다. ‘선생님’으로 존중받으며 주제에 대한 고민을 주고받는 것이 아직 조금은 어색하지만, 경험 그 자체가 아닌 배움으로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해보려고 한다. 사람에 대한 이끌림에서 배움을 얻고 그것을 지역사회로 확장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내게 평생에 걸쳐 꿈을 찾고 나아가 나를 찾는 삶의 현장으로 바뀌어가기를 바란다. 막연하게나마 목표가 있다면 내가 속한 지역사회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높은 지위나 봉급 면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내가 속한 군산 내지는 전북 지역에서 ‘성장’을 이루고 싶다. 나의 뿌리가 되어준 이 곳을 구석구석 알고 성장하여 기여하는 것이 사회의 성장으로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아가 시민으로서, 실천가로서 지역사회 전문가가 되어 함께 소통하고, 함께 바꾸어나가는 것이 지금의 내 꿈이다.


글쓴이인 조용준 청년의 개인 블로그 링크도 첨부합니다. 활동소회와 다양한 기록이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whdydwns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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