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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위의청년학교 Aug 16. 2022

태어난 김에 사는 편

길위의청년학교 이동환

#1. 질풍노도의 학창시절     


[태어난 김에 사는 편]

늦둥이라는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서울에 계시는 할아버지 댁에서 제법 이름 있는 사립초등학교를 다니며, 흔히 말하는 “금수저” 학교를 다녔다.


“금수저” 친구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유학을 가거나, 공부 또는 자신의 적성을 찾아 몰입했고,나 또한 공부를 제대로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거주하고 있는 근처의 일반 중학교로 입학을 하게 된다. 바닥에 카페트가 깔려있고, 여름에는 추울 정도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겨울에는 더울 정도의 따뜻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고 깔끔한 디자인의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중학교 생활에 쉽게 적응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면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는데, 나의 초등학교 친구는 단 3명이었고 그 친구들은 심지어 초등학교 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외로움이 많았던 나는 흔히 말하는 잘나가는 친구들과 친해지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친구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담배를 시작으로 술도 마시고 오토바이까지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하는데로 친구는 많아졌지만 중학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운동부 친구들보다 더 낮은 내신성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도 입학을 못할 정도였으니 “태어난 김에 그냥 사는거지 뭐” 중학교 3년 내내 입에 달고 살던 말,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2. 위기의 순간     

[태어난 김에 멋지게 살아보자]

다행히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인근 공업고등학교로 입학을 하게 되었고 다시 한번 공부를 열심히 해보자는 다짐을 하고 새롭게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된다. 하지만 새로운 친구들과 만남, 고등학생으로 새로운 상황들이 마냥 신났던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보니 어느새 고3이 되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인문계에 다니는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같이 공부를 하며 여자친구보다 공부를 잘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선의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공부한 결과 작년 모의고사 평균등급 8등급에서 4등급으로 향상되었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과의 약속 그리고 나만의 목표를 이루게 되었다. 그때의 기분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뚜렷하게 기억된다. 나와의 약속과 도전에 승리의 맛을 맛본 나는 “태어난 김에 멋지게 살아보자!”라는 꿈을 갖고 대학교 입학에 도전하지만, 내신성적도 좋은 편이 아니었고, 무단결석/무단조퇴는 치명적이었다. 정규 4년제 대학교 입학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학사편입”이라는 막연한 목표를 갖고 학점은행제에 입학한다.    


[태어난 김에 멋지게 놀자!]

입학 당시 나만의 계획으로는 최단기간 내 4년제 학사학위를 취득해서 정규 4년제 대학교 편입이 목표였다.

하지만 학점은행제 OT를 시작으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성인이 된 나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내 자신도 나를 통제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재미를 갖게 되면서 입학 당시 목표를 잃어버린 채 “학사편입 → 학점은행제 학위취득”으로 목표를 바꾸게 된다. 이후에 나는 대학생 CEO아카데미, 대학생 리더십 아카데미, 이태석신부기념 멘토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하며 미래에 대한 고민이 점점 늘어가고 군 입대가 다가오면서 지금 내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잊고 지냈던 것. 바로 “군대” 였다. 친구들은 이제 곧 있으면 제대하는데 내가 이제와서 군대를 가면 친구들보다 뭔가 패배자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경영학을 공부하고, 첫 발표를 할 때 말했던 SWOT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보자”. 그래도 학점은행제에서 2년 6개월 기간에 4년제 학사학위를 받았기에 나는 학사장교에 지원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불합격의 쓴맛을 봤고,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노력했다. 그렇게 나는 두 번의 도전 끝에 해병대 학사장교에 합격 하게 되었다.


#3. 내꿈을 위한 여행  

   

[해병대 장교]

16주간의 혹독한 해병대 장교 훈련소를 수료하고 해병대 소위로 임관해서 꿈에 그리던 장교 생활을 시작한다. 첫 부임지는 김포/강화도에 있는 전방 부대. 고등학교를 공업고등학교의 졸업시험 “무선설비기능사”라는 국가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나는 정보통신장교로 선발 되었고, 주로 부대의 전산장비, 통신장비, CCTV, TV 등 통신에 관련 된 모든 장비들을 관리하고 정비까지 하는 업무들을 맡게 되었다. 다행히 첫 부임지에서는 마음 잘 맞는 부사관들과 병사들이 있었기에 빠른 적응과 피곤하고 힘든 하루하루 속에서도 즐겁게 생활 할 수 있었다.      


어느 덫 시간이 흘러 다른 부대로 발령을 받아 전방부대에서 조금 떨어진 후방부대로 이동하게 된다. 전방부대에서 적응 되어있던 나는 후방부대에서 하는 훈련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훈련에서 흔히 말하는 고문관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6개월 정도의 많은 훈련과 경험 속에서 인간 이동환은 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이해하면서 병사들과 부사관들과 원활한 관계를 이끌면서 생활하면서 어느 새 4년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내 나이 27세가 37세가 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렇게 전역을 다짐하고 전역까지 남은 기간동안 야간 대학원을 다니기로 다짐한다.


 [해병대 장교에서 민간인으로]

군 협약 야간 대학원이었기에 민간인들을 많이 만나기는 힘들었지만, 야간 대학원을 나올만큼의 자기계발의 의지가 있는 군인들은 적어도 생각이 고지식하지는 않았다. 대부분 원활한 커뮤니티 능력, 사회는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군대에서 몰랐던 사실들을 좀 더 알기 위해, 전역 후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등 다양한 지원동기를 갖고 동기생 14명이 입학을 하게 된다. 그 중에는 육ㆍ해ㆍ공군 부사관부터 대위, 소령, 중령 등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다행히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중에는 전역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이때 청소년지도사라는 자격증도 처음 접하게 되면서 청소년이란 분야에 관심이 가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전역 시기가 다가왔고, 전역을 앞두고 나는 “주니어사관지도사”라는 자격증을 취득하고 명함을 만들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명함 뒷면에 넣을 이력을 달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20대 초반에 군대에 입대해서 나에게 이력이란 단 하나. “해병대 대위” 그리고 몇일 전 발급 된 “주니어사관지도사”가 전부였다.     


[태어난 김에 멋지게 살자]

나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고정수입이 없는 보험영업을 시작했지만 매일 이어지는 술자리와 주말에도 고객을 찾아 해매는 쉼 없는 삶이 계속 악순환 되고 있었다. 열심히 활동을 하다보니, 금전적인 부분은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내가 생각한 제대 후의 내 모습이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그렇게 과감하게 보험 일을 정리하고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생활을 하면서 일명 “스팩쌓기”를 시작했다.

청소년지도사 2급, 평생교육사 2급, 봉사활동 등을 통해 군대 제대 전 계획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세부계획을 만들어 실천했고, 그 과정에서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에서 운영하는 “평화교육”이라는 프로그램의 강사로 첫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는 주니어사관지도사 관계자와 연계가 되어, 청소년 진로탐색 프로그램 강사로도 활동할 수 있게 되면서 점점 강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

청소년들과 2년여간 다양한 분야의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면서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청소년들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질풍노도의 후회 막심한 나와같은 삶을 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은 나는 잠시 강의활동을 중단하고 공공기관에 입사해서 이곳에서 청년, 청소년 정책과 법에 대해 시행되고 제정되는지, 이러한 절차들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간 궁금했던 상황들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업무를 시작하였다. 


처음 만들어지는 곳이므로 업무가 많을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운영계획, 프로그램 계획, 개소식 준비 등 업무가 화산 폭발하듯이 넘쳐나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기에 최선을 다하면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길 위의 청년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많이 이야기 됬던 “자립”에 대해서도 더 많은 정보를 모으고, 정리해나가고 있다.


[길 위의 청년학교를 만나고]

길 위의 청년학교를 SNS에서 본건 작년 이맘쯤이다. “길 위의 청년” 이란 말이 가장 인상 깊었다. 지금 내 모습 같았고, 내 주변의 청년들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면접 때 “정건희”선생님을 처음 온라인으로 뵙고,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에 사실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주시던 피드백들이 짧던, 길던 나에게는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었다. 길 위의 청년학교를 만나고 되돌아보기 싫었던 과거까지 되돌아보면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거에 이랬던 내가 지금 이렇게 정상적으로 삶을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고, 삶은 설계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길 위의 청년학교를 만나기 전 자립, 독립에 대한 생각은 해본적이 없다. 마냥 돈을 많이 벌 생각(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구체적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고정수입이 나오게 일을 하면서 꿈을 차근차근 이뤄나가는 것이다. 요즘과 달리 1980~90년대에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인기 없는 직업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여 요즘은 가장 안정적인 직업으로 공무원을 꼽는다. 많은 청년이 공무원 준비로 여념이 없고, 통과하기도 매우 어렵다. 특히 특정직 공무원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는데, 특정직 공무원 중 나는 직업군인을 준비하는 청년, 청소년들을 1:1 코칭 해주며, 필기고사 →  체력검정 → 면접까지 최종합격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내 목표이다.     


그동안 마인트컨트롤을 하면서 나름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서와 운동이었던 것 같다. 어떠한 일에 있어서 건강과 올바른 마음가짐은 필수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만들어주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독서와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고 버티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버팀 몫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길 위의 청년학교를 만나고 독서와 운동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내 자신의 진실 된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런 모습이 큰 자신감과 버팀 몫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길위의 청년학교와 함께 내 꿈을 위한 여행을 계속 해 나갈 예정이다.




https://brunch.co.kr/@youth-road/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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