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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위의청년학교 Feb 22. 2022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길위의청년학교 홍천행

길 위의 청년 1,2호 잡지에 수록된 청년비전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낯선너무나 낯선

 어릴 때부터 입시를 치르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정상(正常)의 삶이라는 선로를 이탈한 경험이 많지 않다. 초등학교, 중학교, 인문계 고등학교, 재수, 수도권 4년제 대학. 대학에서는 국가 근로, 어학원 알바 등의 알바를 하다 1년간 휴학을 했다. 2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는 교수님 연구실에서 일했다. 졸업 전까지는 학업과 생계 때문에 다양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졸업 후에는 육군 학사장교로 3년간 복무했다. 전역 전까지 큰 고민 없이 눈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삶을 살아갔다. 큰 고민을 하지 않고도 여기까지는 선로가 이어져 있었는데 전역할 때가 되니 선로가 끊겨 있는 것 같았다. 


 여태 큰 고민이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정규분포의 가운데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쓰던 많은 순간이 떠올랐다. 입시를 준비하던 시기,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했던 재수 생활, 학업을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대학 생활. 체제 순응적인 성향 때문에 어딜 가든 밉보일 일이 없었다는 것은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다 문득 장교로 군 복무를 하는 동안 부당한 시스템에 익숙해지는 나를 보았다. 불의한 시스템에 오래 머무르는데도 제도 안의 부당함을 낯설게 보지 않는다면 나치 정권 하에서 충직한 관료의 삶을 살았던 아이히만과 같은 관료처럼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민해지기로 했다. 여태 익숙히 따라왔던 선로를 이탈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낯설게’ 보기로 했다. 


 사실 선로를 따라 걷는 삶에 처음 회의를 느낀 것은 군 생활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였다. 2014년 4월 16일, 전 국민은 중계되는 뉴스에 집중했다. 세월호의 회사인 청해진 해운은 내가 대학생때 자원봉사활동으로 제주도에 갈 때 탔던 오하마나호와 같은 회사였다. 그래서 더욱이 세월호에 탄 이들, 특히 단원고 학생에게 이입해서 소식을 들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말을 따랐던 많은 학생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여태 너무 익숙했던 눈앞에 보이는 길이 문득 너무 낯설게 보였다. 이러한 참사는 말 잘 듣는, 통제에 잘 따르는 이들이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년학을 공부했고, 계속 청소년을 만날 생각이었던 나는 이런 낯섦을 해소해보고자 이후 국회에서 진행하는 토론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진실이 가리워진 채 쏟아지는 기사 속에서 진실을 찾는 것은 지난했다. 2015년 3월, 그렇게 진실을 좇던 나는 입대와 함께 그 걸음을 멈추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세월호 참사는 국방부 입장에서 정치적 발언이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낯섦과 두려움을 느꼈던 나는 아이러니하게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의 말에 순응했다. 장교로 복무했던 내내 가방에 노란 리본 하나도 달지 못했던 나는 사회에 부채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라.
 소대장으로 있을 때 나보다 두어 살 어린, 늦깎이 신병이 있었다.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마친 그는 불교 경전을 가지고 다니던 독특한 친구였다. 그 신병은 매주 하던 정훈교육 시간에 힘에 의한 평화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이후 그 신병은 생활관으로 복귀하지 않고 이상행동을 보였다. 나는 남은 병사를 막사로 인솔해야했기에 분대장에게 신병을 맡기고 복귀했다. 신병은 왜 그러냐는 선임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고 교육을 받은 대강당을 몇 바퀴 돌다 가부좌를 틀기도 했다. 그의 표정은 절망과 괴로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본청을 지나가던 연대장님의 눈에 띄었고, 연대장님은 신병과 면담을 시작했다. 


 연대장님의 이런저런 물음에도 답하지 않던 그는, 연대장님에게 문득 “평화란, 사랑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연대장님은 특별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연대장님의 물음에 그는 스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고, 영외에 있는 스님을 만나 면담을 했다. 면담이 끝나고 사찰의 옥상에서 그는 혼자의 시간을 가졌고, 그를 인솔한 간부가 스님과 대화하는 동안 그는 옥상에서 투신했다. 이후 헌병의 철저한 조사가 있었다. 그의 수첩에서 발견한 소대장님께 항상 고마운 마음이 있다는 메모 때문에 나는 수사에서 열외 되었다. 부대 내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사이버지식정보방 로그 기록을 통해 그가 명상에 심취해있었고 사후세계를 동경한 것 때문이라는 결과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함께 군 생활을 한 병사 중 일부는 과한 수사로 인해 여태 심리적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내가 군수과장일 때 주말에 작업을 하던 병사는 트럭에서 잘못 떨어져 식물인간으로 한 달 반을 지냈고, 나는 그 병사의 수발을 들었다. 또 기관총 총기 손질을 하던 병사는 스프링이 튀어 한쪽 눈을 잃은 채 군 복무 도중 전역했다.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탄약병은 흔히 100일 휴가라고 불리는 신병 위로 휴가를 떠난 날 아들을 태우러 온 어머니와 이모님의 차를 타고 출발하자마자 부대 입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3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나와 함께하던 동료 중 두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이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2019년 국군의 날, 문재인 대통령은 힘을 통한 평화에 대해 말했다. 강력한 힘을 통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데, 왜 우리네 군대는 평화롭지 않을까? 강력한 힘에 의한 평화는 누구를 위한 평화일까? 진정한 평화는 모두를 위한 평화여야 하지 않나? 고대 로마의 군사 전략가인 베게티우스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국가’라는 개념이 생긴 이래로 인류는 전쟁을 준비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과연 우리는 평화를 살고 있을까? 베게티우스의 문장에 영향을 받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평화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했다. 하지만, 히로시마 원자폭탄을 보며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고 남은 인생을 평화운동에 힘썼다. “평화는 무력으로 유지될 수 없다. 오직 이해를 통해 유지될 수 있다.” 그가 남긴 말이다. 강력한 힘에 의한 평화는 평화가 아닌 긴장 상태가 아닐까?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자”라는 문장이 마음에 담겼다.

     

Tame goes Wild.

 전역 이후의 진로가 정해진 것이 없는데도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속 편하게 서른 전에 혼자 배낭여행 갈만한 집안 형편은 아니었음에도 무언가 홀린 듯 출발했다. 돌아보면 정해진 게 없어서 외려 더 쉽게 떠날 수 있었다. 이러한 결정에는 대학 새내기 때 들었던 청소년학 개론 수업이 도움을 줬다. 과거의 청소년-성인기로의 이행이 Tame Zones(길들여진 길)이었다면, 현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성인기로의 이행은 Wild Zones(야생 들판 길)이라는 것이다. 2018년 7월. 이렇게 안정 지향적 성향으로 여태 선로만 보고 삶을 따라가던 나의 탈선이 시작되었다.


 45일간의 배낭여행은 일상을 낯설게 보기에 충분했다. 잠자리, 음식, 언어, 사회적 관계 등,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은 애써도 쉬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理想)이 되었다. 내게 쉬이 주어진 것들을 낯설게 느끼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일상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약 10,000km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다. 대부분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물론 나도 잘하진 못했지만!) 그래서 외려 자유로웠다. 

이르쿠츠크라는 도시에서 내린 뒤 승합차를 타고 다섯 시간쯤 가서 바이칼 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탔다. 알혼섬에서도 한 시간쯤 빨래판 같은 비포장도로 위로 달려 후지르 마을에 도착했다. 샤머니즘의 시발점이라 추측하는 부르한 바위를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이칼 호수는 바다보다 더 바다 같아서 몇 번이고 실수로 ‘바다’라고 불렀다. 이 엄청난 대자연을 보며 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시아-유럽 경계비를 보기 위해 Sub-urban 기차를 타고 갔지만, 기차에 내렸을 때는 우랄산맥의 정중앙, 울창한 숲에 나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 한참을 헤메다 찾은 오두막에 있던 가족에게 경계비를 물어보니 한참을 설명하다 자신의 오두막으로 초대했다. 이들의 환대 덕에 먹었던 러시아 가정식, 그리고 목적지인 아시아-유럽 경계비까지의 배웅은 아직도 환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순간이다. 


 조지아 카즈베기는 내 마지막 여행지였다. 트래킹을 하고 싶었지만, 돌아가는 일정을 맞출 수 없어서 포기했다. 한 여름에도 설산이 보이는 높은 고지에 위치한 마을은 평화 그 자체였다.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사메바 성당을 어쩌다보니 한국에서 여행 온 부녀와 함께 올랐다. 밤엔 그 마을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모든 여행 일정을 마치기 전 버스 카페에서 엽서를 썼다. 블라디보스톡, 하바롭스크, 바이칼 호수, 카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엽서를 보내고 싶어서 계속 샀지만 쓰지 못하다가 마지막 날에서야 겨우 써 내려갔다. 엽서를 부칠 시간이 없어서 호스텔 사장님께 부탁했다. 바이칼 배경의 엽서는 아마 조지아 트빌리시발, 한국행 우편이겠지. 누구한테 보냈는지, 잘 도착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지만, 못 쓰는 글씨로 꾹꾹 눌러 담은 그때의 감정은 여태 소중한 자산이다.

     

여리고 내려가는 길

 여행 중에 SNS를 종종 했다. 여행 전부터 관심이 가는 이슈가 있었는데 ‘제주 예멘 난민 사태’였다. 관심은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여행 중에 제주도에 긴급구호 목적으로 만들어진 난민 신청자 캠프 자원 활동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여행 중이었고, 더 여행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 방문했던 한인교회에서의 설교는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꿔주었다. 


 설교의 주제는 강도당한 자를 도운 사마리아인이었다. 설교자는 설교 본문을 통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과연 예루살렘성 안의 사람들인가, 과연 성문 밖의 이들을 포함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했다. 구체적인 ‘동성애자’라는 예시를 들어 “여러분은 본문과 같이 피아를 구분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느냐”고 질문했지만, 나는 이러한 질문에 애써 외면하고 있는 제주의 상황이 떠올랐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직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길이었고, 신의 뜻을 따라 산다는 그들이 피했던 강도당한 자에게 여행 중이었던 사마리아인은 시간과 돈을 내어주었다. 나도 여행 중이니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카이프로 난민 신청자 캠프를 꾸린 대표님과 인터뷰를 하고, 이후 계획했던 여행일정을 취소했다(사실 나는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터키를 거쳐 이집트, 북아프리카 국가를 거쳐 모로코에서 스페인, 그리고 유럽을 여행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다음 주에 가장 저렴한 비행기를 찾아서 귀국했다. 그리고 목포발 제주행 배에 내 차를 싣고 제주로 향했다. 


 8월 말부터 10월까지, 두 달이 조금 넘는 시간, 예멘에서 온 난민 신청자들과 동고동락했다. 한국어를 가르쳐주기도, 아랍어를 배우기도, 김치찌개를 끓여 먹기도, 아랍 음식을 대접받기도 했다. 함께 들로, 바다로 소풍도 가기도, 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함께 구해보기도 했다. 이들이 입을만한 구제 옷을 후원받았는데, 너무 많은 양을 받는 덕분에 받은 옷을 잘 분류해서 제주이주민축제에 참가한 다른 이주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제주 들어가는 배에 내 차와 몸을 실을 때 이젠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세월호 참사가 떠올랐다. 제주에서 만났던 예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이 피해온 내전을 생각하면서 군 복무기간 떠나보냈던 두 명의 병사, 그리고 크게 다쳤던 두 병사의 기억을 상기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가도 한 달 반 동안의 여행 기억을 꺼내면 정규분포 가장자리의 삶이 불안하지 않다. 나는 이렇게 여리고 내려가는 길의 사마리아인으로 살기로 했다.

     

     

시선 주는 삶을 넘어 대면하는 삶

 삶을 살아나감에 있어 타자의 시선을 배제하고 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부재하며, 모두는 누군가와 불화한다. 인권의 역사는 시선에 대한 투쟁이었다. 


 2018년 늦봄, 550여 명의 예멘사람이 제주 땅을 밟았다. 맹목적 혐오와 성찰 없는 환대 사이에서 이들은 길을 잃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진영에 속한 모두는 예멘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2018년, 예멘사람들의 등장으로 촉발된 난민법 폐지 국민청원은 70만을 돌파했고 같은 해, 우리나라의 유엔난민기구 민간 공여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았다. 


 우리나라는 분단으로 인해 북은 막혀있고 3면은 바다이기 때문에 난민 문제를 머나먼 타국의 문제라 여겼지, 우리의 문제로 여기지는 않았다. 94년 난민법이 제정된 이후로 난민 신청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2013년에 1,500여 명에 불과하던 난민 신청자는 작년 기준으로 열 배쯤 되는 15,000여 명이 되었다. 6년간 난민 신청자가 10배나 늘어났음에도 정부의 대책은 진전이 없다. 난민을 향한 시선은 점점 나빠진다.


 시선에 대한 투쟁에는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시선을 보내는 이들에 대해 선을 긋고 피아를 나누어 싸우는 방식, 또는 타자의 시선에서 오는 불쾌를 감수하고 그 시선의 부당함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식은 지난하다. 빈정거림을 피하기 어렵다. 집단을 대상으로 한 설득은 더 고되다. 난민 문제도 마찬가지다. 불쾌한 시선이 작동하지만, 이러한 시선에 분노할 힘도, 설득할 능력도 난민 당사자들은 가지지 못한다.


 사르트르의 ‘시선과 타자’에서 타자의 시선에 의해 주체성을 잃기 때문에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말을 했다. 반면 레비나스는 정반대의 의미로 타자를 언급했다. 그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 초월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낯선 타자의 얼굴을 통해 무한을 경험을 경험하는 것, 타자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것이 초월의 영역으로 나를 이끌어주는 선물 같은 경험이라고 말한다.


 내게 제주 난민 신청자 캠프에서의 시간은 그러한 경험의 순간이다. 아랍어로 ‘이오니’, 또는 ‘아이오니’는 ‘나의 눈동자에 당신이 담겨있다.’라는 다소 느끼한 우애, 또는 사랑의 표현이다. 제주에서 수없이 많은 순간 이러한 표현을 주고받았다.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이유를 반응할 수 없는 타자에게 투사해서 분노의 대상으로 삼는 것보다, 타자의 고통을 눈에 담아 함께 울어주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잘 사는 삶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이것을 배운 삶이었고, 나는 이러한 충만함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다. 시선 주는 삶을 넘어 대면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게 내가 이 길 위에 서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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