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는 '언제까지'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디자이너가 아닌 나를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였을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여러 사람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아왔고, 이제는 이 질문 뒤에 놓인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
"디자인을 평생 할 건 아니잖아. 언제 그만둘 거야?"라는 질문에는 일에 대한 고단함이 묻어있다. 또한 조직으로부터 버림받으면 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는 불안이 묻어있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디자인을 시작한 친구들이 모이면 언제나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가 화두로 올라온다. 실제로 직종을 바꾸거나, 조그만 가게를 열어 디자이너이기를 그만둔 사람들을 여럿 목격하기도 했다.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려오다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나 역시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마흔에도, 쉰에도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현장에서 일하는 50~60대 선배를 본 적이 있던가?'
'자기 사업을 하거나, 잘 나가는 회사의 임원급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전문가는 곧 함께 잘하는 사람
나는 칼럼 [ 실력은 연차와 비례하지 않는다 ]에서 '드라이퍼스 5단계 모델'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전문성의 수준을 측정하는 척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 한편으로는 가장 높은 단계인 전문가가 고작 1~5% 밖에 없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드라이퍼스 모델이 말하는 요점은 하나다. 그저 오래 일한다고 해서 전문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며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역량에 대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숙련자에서 전문가로 넘어가는 시점에 급격히 비율이 줄어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소프트웨어 장인 협회(LSCC)를 설립한 개발자 산드로 만쿠소는 책 <소프트웨어 장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소프트웨어 장인은 마스터로서 수련생을 멘토링하고 그들의 여정에 도움을 준다. 지식, 아이디어, 성공 그리고 실패까지도 커뮤니티에서 공유하고 토론하여 업계가 한 걸음씩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 소프트웨어 장인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배우려 하는 겸손한 사람이어야 하고 경험이 적은 개발자와 지식을 공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산드로 만쿠소 <소프트웨어 장인> p.71
그의 말에 의하면 마스터 단계까지 올라간 전문가는 혼자 잘하는 사람이 아닌 함께 잘하는 사람이다.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후배들을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의무이자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더불어 사람 자체로 지식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레퍼런스가 된다.
기술을 배우고, 연습하고, 실행하다 보면 실력을 향상할 수 있다. 그런데 실력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가면 경쟁자 간에 차이가 미미해진다. 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성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혼자서만 잘하는 사람은 4단계인 숙련자까지 올라가더라도 그 이상으로 도약하기는 어렵다. 내적 성취에만 머물러 있다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한계를 느끼는 시점이 반드시 온다.
함께 잘하는 사람인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현상이라기보다 집단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 사람이 전문가인지 여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단지 성과만이 아니라 전문가가 속한 공동체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리고 공동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숙련자와 전문가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인 영향력은 오직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공동체로부터 받는 보상, 성공
만일 전문가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분야마다 전문가가 극소수만 존재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세상에는 실력과 재능이 있어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명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또한 대외적인 소통을 부담스러워하며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실력자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성공이 아닌 성장을 지향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데 필요한 것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복잡계 이론을 창시한 세계적인 과학자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는 성취와 성공을 구분해서 설명한다. 성취는 개인적이면서도 내적인 차원의 경험이라면, 성공은 대외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인 차원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놓고 봤을 때 숙련자 레벨에서 얻는 것이 성취라면, 전문가 레벨에서 얻는 것은 성공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성공은 사람들이 당신의 성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측정하는 집단적인 척도다. 다시 말해서 (...) 성과나 업적만 따로 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당신이 속한 공동체와 당신이 기여한 바에 대해 그 공동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성공의 공식 포뮬러> p.47
성공이란 내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얻는 '보상'이다. 흔히 돈이나 명예를 떠올리지만 보상에는 단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야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어떤 개인적 성향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저마다 조금씩 다른 성공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 연구자라면 인정을 받는 게 보상이 될 수도 있고, 브랜드는 지명도가, 예술가라면 명성이, 음악가라면 앨범이나 공연 티켓 판매가, 사업을 하거나 판매업에 종사한다면 매출이, 금융가라면 수익이, 극작가라면 청중이, 과학자라면 논문 인용 횟수가, 운동선수라면 스포츠 상품 모델 계약이, 변화를 일궈내고 싶다면 영향력이 보상이 될 수 있다.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성공의 공식 포뮬러> p.31
나는 어떤 보상을 받고 싶어 전문가 단계로 올라서고자 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아는 것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래오래 일하고 싶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고 일에 집중하는 삶이 내가 얻고 싶은 보상이다.
어떻게 나를 드러낼 것인가
대외적으로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요소들을 갖춰야 할까? 나는 '콘텐츠, 채널, 인맥'이라고 판단했다.
지금 시대의 네트워크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온라인 네트워크(채널)와 오프라인 네트워크(인맥)다. 얼마 전 [ 내향적인 사람도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글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나를 드러내는 것을 몹시 어색해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조직 안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기를 선택해왔고, 한 때는 주어진 자리에서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내가 네트워크를 활용하고자 마음먹었을 때는 온라인 네트워크 말고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구체적인 방법을 구상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을 떠올리고 스스로 답을 했다.
어떤 플랫폼(온라인 네트워크)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형태의 콘텐츠를 생산할 것인가?
내가 이미 가진 강점과 경험은 무엇인가?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나의 독자가 듣고 싶어하는 말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
어느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것인가?
이를 통해 결국 무엇을 얻고 싶은가?
내가 처한 상황과 주어진 조건 그리고 갖추고 있는 재료들을 감안해 정한 것은 결국 브런치(채널)에 글(콘텐츠)을 쓰는 것이었다. 만일 이것을 내가 잘 해낼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세 번째 요소인 오프라인 네트워크(인맥)도 따라오지 않을까 싶었다.
세 가지 요소 중 콘텐츠는 [ 커리어 브랜딩 글쓰기 ] 매거진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구독자는 콘텐츠와 채널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채워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채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브런치는 2015년에 서비스를 론칭해 4년 가까이 베타 버전을 유지하다 최근에서야 정식 버전으로 전환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서비스가 출시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시대에 오랜 시간 베타 버전을 유지했다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인 일이다.
이에 관해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두 가지 추측을 해봤다. 하나는 브런치를 만든 카카오는 글쓰기 플랫폼에 대한 애정이 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검증된 작가 풀을 형성하는데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것이다. 책 읽는 사람보다 수가 적은 것이 글 쓰는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양질의 글을 지속해서 생산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영상이 대세라며 블로그를 버리고 너도나도 유튜브로 갈아타는 시대에 글쓰기 플랫폼으로 자기 영역을 구축해간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글쓰기 플랫폼에 대한 애정과 나름의 소명의식이 없다면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이 지속하기에 쉽지 않은 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요즘 사람들은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출퇴근 시간에 잠깐씩 짬을 내서 볼 수 있는 토막글이 대세다.'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의 집중력은 점차 저하되고 있다.'
여기저기서 흔히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제대로 된 양질의 콘텐츠를 만나고 싶은 갈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사람도 어느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마주치느냐에 따라 행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 개씩 빠른 속도로 정보 조각들이 떠내려가는 타임라인 위에서 콘텐츠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은 아닐까? 연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SNS 플랫폼에는 개인의 사적인 일상부터 언론사의 뉴스 기사와 어제 방송한 예능프로 하이라이트 영상이 뒤섞여 우선순위 없이 같은 비중으로 떠다닌다. 어쩌면 사람들이 집중을 못하는 게 아니라, 집중할 정도로 신뢰를 구축한 플랫폼이 그동안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다.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며 나 역시 시도하고 포기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할 때 '너무 어렵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일은 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만약 해낼 수만 있다면 그 어려움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진입 장벽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플랫폼의 방향성을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검증된 작가가 되는 것, 느리더라도 자기다움을 지니고 꾸준히 양질의 글을 올리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나의 1차 목표다. 부단히 생산성을 유지하다 보면 플랫폼이 가진 다양한 홍보 네트워크에 몸을 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든 예상치 못한 기회들이 나에게 손 내밀지도 모른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선택한 이유다.
부단함으로 삶을 채운다는 것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성공의 원리를 파헤친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가 마지막에 와서 일러준 말은 부단히 노력하면 성공은 언제든 찾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창의력도 함께 시들해진다는 통념은 틀렸다. 많은 경우, 젊은 시절에만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단지 그 시절에 더 많은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마따나 '노땅'이라 한물갔다고 지레짐작할 필요는 없다. 데이터가 증명한다. 창의력에는 나이가 없다고.
모든 사람이 슈퍼스타가 될 수는 없다. 또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누구에게나 성공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소박하지만 부단히 생산성을 유지하는 사람 역시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까지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글세. 더 이상 유통기한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때로는 네트워크에서 소외되고, 때로는 네트워크에 포용되면서 부단함으로 삶을 채워나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참고 도서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성공의 공식 포뮬러>
산드로 만쿠소 <소프트웨어 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