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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명호 Mar 20. 2017

그 흔들리는 일상 어느 복판에서 그를 만났다.

목욕탕 옆 인간극장 180 - 노태승(캄보디아 씨엠립)

목욕탕 옆 인간극장 180 - 노태승(캄보디아 씨엠립)
2016년 9월 27일(화) 프놈펜에서 씨엠립으로 향하는 버스

어쩌면 긴 시간 이어가는 이 기록이 흔들리는 일상 속 몇 안 남아있는 끈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흔들리는 일상 어느 복판에서 그를 만났다. 그 시기 나는 아팠다. 이상하게 기운이 없고 면역력이 가파르게 떨어졌다. 염증이 오르거나 가렵거나 했다. 멀리 계속 멀리 도망쳤고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며칠 계속 앉아만 있었다. 세상 그리고 사람들이 무섭고 낯설었다. 

그는 내가 가만히 앉아 있는 앙코르 게스트하우스를 며칠 뒤면 인수한다 말했다. 새롭게 무엇을 만들고 어떤 시도를 해볼 생각이라면서 그는 웃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을 사소한 기억 사이에서 또렷하게 기억한다. 설렌 이야기였다. 

거의 매일 그는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잿빛 고양이 한 마리, 어린 금빛 고양이 한 마리가 엉겼고 그 사이에서 그는 노트북을 만졌다. 그러다가 문득 프놈펜에 간다는 그를 따라나섰다. 빠르게 움직였고 롱 찬다라, 빈 방, 보쌈, 국수, 빔 프로젝터, 벽지, 소나기를 만났다. 프놈펜 일정은 만 하루를 채우지 못 했다. 캄보디아 뽕짝 사이로 나란히 버스 의자에 앉아 씨엠립으로 돌아오는 어느 오후, 일상을 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 게스트하우스 오픈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게스트하우스를 여시는 거예요?”
“네. 기존에 있던 게스트하우스를 인수하게 돼서 그걸 준비하고 있어요.”


“어디에 있는 거예요?”
“캄보디아 씨엠립에 있어요.”


“게스트하우스는 왜 여시는 거예요?”
“2009년부터 그 게스트하우스 오픈 첫 손님이 저였는데요. 그 사이에 이 게스트하우스만 매년 3-4번 오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요. 매년 오다가 캄보디아도 좋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하는 게 좋았기 때문에 인수해서 직접 운영을 해보려고 해요.”


“언제 여시는 거예요?”
“10월 1일부터 운영을 시작합니다.”
(9일로 조정됐다.)


“어떤 게스트하우스가 되는 건가요?”
“패키지 여행이나 투어 상품 이용하는 쪽으로 씨엠립 여행을 많이 오는데요. 진짜 게스트하우스의 의미는 배낭 여행객들이 혼자 또는 둘이 와서 다른 사람들과 정보도 교류하고 같이 툭툭 같은 교통 수단도 쉐어하면서 어울리는 게 진짜 게트스하우스 의미라고 생각해요. 그런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싶고요. 단순한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배낭 여행객들이 같이 술도 마시고 편하게 쉬는 그런 여행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여행도 좋아하고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고 술 마시면서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새로운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인맥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요.”


“더 있으세요?”
“건담 같은 것도 좋아해요. (웃음) 걷는 것도 좋아해요. 트레킹을 참 좋아해서요. 트레킹 코스가 괜찮다는 곳은 되도록 가보려고 해요. 캄보디아에도 트레킹 코스를 만들어 보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어요. 캄보디아는 산이 없어서 걷기도 편하고 여기는 평야라서 다니기 좋을 것 같아요. 논밭이나 현지인 집 사이를 걷는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그런 코스를 만들고 싶어요.”


“혹시 처음 캄보디아에 오신 건 언제예요?”
“2009년 5월에 처음 왔어요.”


“옛날 이야기 조금 해볼게요. 초등학생 노태승은 어땠어요?”
“기억이 잘 안 나요. (웃음)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반장 계속 하고 학생회장도 하고 학교에서는 똘똘한 아이였어요. 그런데 어릴 때부터 산수를 정말 싫어했던 기억이 나요. (웃음) 애들이랑 어울려서 산에서 뛰어 다니면서 노는 것도 좋아했고요. 맨발 축구하러 다니고 그리고 어릴 땐 여자를 싫어했어요. (웃음)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넘어갈 때는 남녀 공학이 싫어서 일부러 주소를 옮겨서 남자 학교로 갔어요. 지금은 엄청 후회하고 있지만요. (웃음) 여자친구들 하고 어울려서 놀거나 얘기하고 그런 걸 싫어했어요.”


“중학생이 됐어요.”
“남자 학교를 갔는데 그 일대에서 유명한 좀 문제가 있는 학교였어요. 남자들끼리 있다 보니까 성격도 조금 바뀌었고 그리고 머리를 스포츠머리로 깎는 학교였는데요. 그거 깎는 게 싫었어요. 3년 내내 반장을 했으면서도 머리를 검사하는 날이면 조퇴를 하거나 학교에 안 나가고 그랬어요. 반장이라서 정보를 빨리 입수하는 편이라 아프다고 조퇴하고 그랬어요. (웃음) 그러다가 한 번 걸려서 삭발을 하기도 했어요. 중학교 때는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농구에 미쳐서 살았어요. 슬램덩크가 한창 유행할 때라서요. 또 그때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을 때라서 그런 거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서태지와 아이들 랩을 누가 먼저 외워서 안 틀리고 하느냐 그게 굉장히 큰 관심사였어요 .특히 환상속의 그대를 누가 안 틀리고 빨리 하느냐 이런 것들이 관심사였어요.”


“이제 고등학생이 됐어요.”
“고등학생 때는 다시 남녀공학으로 갔는데요. (남녀) 합반은 아니고 다른 반이었는데요. 화학반이라는 서클 활동을 하면서 여자 아이들과 얘기도 많이 하게 되고 같이 실험도 많이 하게 되면서 성격도 많이 밝아졌고요. 여자 친구들을 대하는 것도 많이 편해지고요. 그런 기억들이 참 좋았어요. 원래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말수도 적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걸 좀 꺼려했었는데요. 과묵하고 잘 웃지도 않았는데요. 고등학교 때 그렇게 지내면서 성격이 조금 바뀌어서 더 활발해 졌어요. 많이 웃고 사람들 하고도 많이 어울렸어요. 성격 개조를 좀 한 거죠. 그리고 공부는 좋은 대학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열심히 했어야 했지만 그때는 노는 게 좋아서 독서실에서 술 먹고 술집 가고 학교도 안 가고 그랬어요. 술을 굉장히 많이 먹었던 3년이었어요. (웃음) 중학교 1학년 입학식 때부터 아버지가 술을 알려 주셨어요. 아버지가 36년차이고 제가 큰 아들인데요. 평소 아버지가 아들과 술을 먹고 싶었는데 제가 어리다 보니까 기다리다가 중학교 들어가자마자 알려주시면서 같이 마신 거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들과 술집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많이 갔죠. 좋았죠. (웃음)

그리고 우리 고등학교 때는 법적으로 술집이 12시면 닫거든요. 술집들이 다 문을 닫는데 서울대 앞으로 가면 대학교 앞이다 보니까 큰 무선전화기를 들고 있는 일명 삐끼들이 있었어요. 그럼 술 마시러 왔냐고 하면 손님은 들어가고 셔터를 내리고 그런 문화가 있었어요. 단속이 뜨면 밤새 못 나가고 술을 마셔야 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쯤 그게 풀렸을 거예요. 거기 갇혀서 술 마시고 싸움질도 많이 하고 다니고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 거예요.”


“고등학교 때 가장 큰 고민은 뭐였어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되게 컸는데요. 원래 초등학교 때부터 꿈이 항상 탐험가, 모험가 같은 거였거든요. 인디애나 존스를 보고 인디애나 존스가 되고 싶다는 게 되게 컸었거든요. 고등학교 때까지도 장래희망란에 탐험가, 모험가 그런 걸 적었어요. 대학 진학도 사학과에 하고 싶었는데요. 현실의 벽에 부딪혔어요. 우리나라에서 사학과 있는 대학교 나와서 진로를 생각했을 때 꿈꾸는 인디애나 존스가 될 수는 없겠더라고요. 대학 졸업하고 해외 유학으로 박사 학위 따고 돌아와서 잘하면 대학교 교수를 하는 거고 그래도 제가 생각했던 유물을 발굴하고 정글을 탐험하고 그런 걸 하기는 어려운 현실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현실하고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중학교 때도 공고를 가겠다고 얘기를 했거든요. (웃음) 중학교 때는 음악에 빠져서 데스메탈을 좋아해서요. 헤비메탈도 아니고 데스메탈에 빠졌죠. 데스메탈의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전교 학생회장이 공고를 가겠다고 하니까 바로 부모님 소환되고 그랬어요. 그때도 꿈을 접게 되고 고등학교 때는 사학과 꿈을 접게 되고 다른 전공에 들어가야 했죠. 이런 게 제일 고민이 많았던 부분이에요. 하고 싶은 걸 못 하는 거.”


“진학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대학은 들어가긴 들어갔는데 그때 수능이 97년이었는데 역대 가장 어렵게 나왔거든요. 제가 97학번이거든요. 어렵게 나와서 부모님은 재수를 해라 그랬고 나도 재수를 하겠다고 했는데 일단 합격은 해서 진학은 했어요. 동생이 한 살 어리다 보니까 같이 수능을 준비하기는 어려웠고요. 일단 편입을 하기로 하고 다니다 보니까 편입은 없었던 일이 되더라고요.

대학교 때는 학교 수업 자체를 되게 싫어했어요. 전공 과목 점수는 다 A, A+ 그랬는데 교양 과목은 다 F였어요. 왜냐면 들어가서 수업을 들었는데 대학생이 돈을 내고 들을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아깝고 돈이 아깝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을 중퇴하고 싶다고까지 이야기 했었죠. 대학을 중퇴하고 사회 생활을 하겠다. 부모님에게까지 이야기 했었는데 장남이다 보니까 그게 힘들어서 대학 졸업하는데 10년 걸렸어요. 한 학기 다니고 휴학하고 한 학기 다니고 또 휴학하고. 학고를 3번 맞아보고. 1학년 때 1학기, 2학기는 전부 학고를 맞았어요. 그리고 휴학을 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 첫 학기에 또 학고를 맞았어요. (웃음) 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복학하면 장학금을 받는데. 그래서 교수님과 면담을 했어요. 복학하고 동기들은 장학금을 받는데 너는 왜 그러냐고. 전공은 잘 나오는데 교양은 왜 그러냐. 아예 성적이 안 나왔거든요. 그래서 학교에서는 한 학기만 더 해봐라 하고. 

어쩔 수 없이 계속 학교는 다녔고 그 다음 학기에는 장학금을 받고 방학에 호주로 단기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그랬어요. 그때 나는 사회생활이 좋았어요. 그 사이에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어요. 노가다부터 술집 서빙부터 많이 해봤거든요. 결국 졸업하기 전에 회사에 들어갔고 회사 다니면서 졸업을 한 케이스예요. 교수들이 취업을 했으니까 좀 봐주더라고요. 다행히 졸업은 시켜주더라고요. 돈을 많이 냈더니. (웃음) 10년을 다녔으니까. 조교들이 후배고.”


“졸업한 이후에는 어땠어요?”
“어차피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졸업에 대한 감흥도 없었고 그걸 원하지도 않았고요. 원했던 거면 열심히 했겠지만. 행정학 하고 경영학 복수전공을 했는데요. 사회 생활이 더 좋았어요. 우리나라의 대학교는 술 먹고 노는 곳인가 싶었어요. 이게 과연 대학생들이, 지성인이 배워야 하는 수준인가 싶어서 너무 싫었어요. 정말 돈만 내면 졸업을 시켜주는구나.”


“회사 생활은 어떠셨어요.”
“회사는 태어나서 딱 두 군데를 다녀봤는데요. 처음엔 대기업 유통회사를 2년 다니다가 진로를 바꿔서 이름도 모르는 중소기업을 갔죠. IT 회사. 거기 관리실에서 있으면서 평생 남들이 못 해볼 만한 업무들을 정말 많이 해봤어요. 상장, 합병, 설립, 분할, 주식 담당자, 인사 담당자, 법무, 총무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다 해보고 마지막은 영업까지 했기 때문에 회사 생활은 정신 없었지만 일이 힘든 건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사람이 힘들면 힘든데 사람들이 다행히 다 좋았어요. 늘 능력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고 재밌었죠. 정말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어요.”


“몇 년 다니신 거예요?”
“총 햇수로 11년 정도. 만으로는 9년 7, 8개월 했던 것 같아요.”
“그럼 마지막 다니던 그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 캄보디아에 와있는 거네요?”
“2015년 5월에 그만두고 캄보디아에 와서 3개월 여기서 지내고 한국 한 달 들어갔다가 또 캄보디아 3개월 지내고 또 1개월 한국 있다가. 지금은 나와서 거의 4개월째 캄보디아에 있는 거예요.

원래는 회사 생활 그만두면서 캄보디아에서 뭘 할 게 아니라 한국에서 여행 카페나 사진 콘텐츠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으로 준비를 했는데 한국 상황이 너무 많이 급변해서 캄보디아로 눈을 돌렸죠. 마침 친한 형이 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매물로) 나오는 바람에 이때다 싶어서 하게 됐죠. 원래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친한 형이 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 내가 또 열면 도의 상 아닌 것 같아서 안 하고 있던 것도 있었죠.”


“캄보디아 생활은 잘 맞으세요?”
“일단은 마음이 편하고요. 자주 왔던 곳이라서 많이 아니까요. 사람들도 친구들도 많이 알고. 말도 조금 할 줄 알고요. 외국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원래 있었던 곳 같은 느낌이에요.”


“앞으로 어떨까요?”
“나는 평생 여기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고요. 지금은 5년 정도 플랜으로 보고 있어요. 5년 후에는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돈을 모아서 한국에 들어가서 원래 계획했던 걸 할 수도 있고요. 아니면 미얀마나 그런 곳에 가서 또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지금 구상하는 호텔 체인이 더 커져서 그걸 할 수도 있고요. 명확한 건 지금 없어요. 일단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하고 올인하면서 다음 것들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려고 해요.”


“개인적으로 버킷리스트 같은 게 있으세요?”
“가장 하고 싶은 건 내 여권에 전세계 있는 모든 국가의 도장을 찍고 싶은데요. 그걸 가장 하고 싶은데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겠지만요. 그 외에 건 특별히 가지고 있지 않아요. 나이가 들어서라도 내가 죽기 전까지 최대한 내가 갈 수 있는 곳을 가보고 싶어요.”


“문득 떠오르는 고마운 사람이 있으세요?”
“아, 엄마.”


“왜요?”
“지금 회사를 그만둔 지도 꽤 됐고 부모님도 연세도 많고 몸도 안 좋으시기 때문에. 제가 집을 부양하는 쪽이었는데 회사 그만둔 지 1년 반이 지났고. 해외 나와있으니까 신경도 많이 못 쓰고 걱정도 많이 쓰게 해드리거든요. 전화 할 때마다 나한테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니까 너무 미안해요. 그리고 믿어주시면서 잘 될 거라고 하니까 요즘 계속 엄마랑 아버지 생각만 하니까. 부모님을 내년에 꼭 모시고 와서 내가 돈이 없더라도 모든 걸 최고로 여행 시켜드리고 싶은 것 같아요. 그게 지금 여기서 살면서 무엇을 하던지, 큰 돈을 벌겠다는 게 아니라 자리를 잡겠다는 마음이 드는 드는 건 부모님 때문인 것 같아요. 이 나이에 결혼도 안 하고 손자 손녀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데. 그런 걸 재촉도 안 하고 잘될 거라고 믿어주시니까 고맙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상형은 어떠세요?”
“얘기하면 남들이 다 비웃는데. (웃음) 일단 착하게 생기고 온순하게 생긴 걸 외모적으로는 싫어해요. 뭔가 세보이고 도도해 보이고 차가워 보이는 스타일을 좋아해요. 외모로는. 자기를 꾸밀 줄 알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자기에게 투자하는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요. 강아지 스타일 말고 고양이 스타일을 좋아해요. 내가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스타일. 변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난 여자들이 하이힐을 신는 것도 좋아하고 손을 가꾸는 것도 되게 좋아해요. 성격적으로는 뭐 크게 관계없어요. 너무 서로에게 메달리지만 않으면. 그런 스타일이면 좋아요. 또 하나 있다면 그래도 말은 통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많이 없으니까요.”


“결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특별히 독신주의자는 아닌데 지금 나이가 좀 있다 보니까 쉽게 누군가를 만나기는 어려워요. 솔직히. 다 내가 나이가 있다 보니까 결혼을 전제로 생각하는 게 많으니까요. 나이나 다른 조건 때문에 결혼하는 건 싫고요. 오십이나 환갑이 돼도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그때 가서 하려고요. 나이 먹었다고 하고 싶진 않아요. 결혼 해도 아이를 가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요. 필요하면 입양을 하더라도요.”


“죽는 건 어떤 의미인 것 같으세요?”
“가끔씩 생각을 하는데 지금 내가 죽으면 어떨까 생각하는데요. 크게 와닿는 건 없어요. 내가 죽으면 슬프거나 그런 건 모르겠지만요. 지금은 내가 죽는다고 해서 슬프거나 후회스럽거나 그런 건 없어요. 그건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인 거지. 그리고 어제 씨엠립에서 프놈펜 가면서도 버스에서 생각했는데요. 내년이면 내가 마흔이고 이제 절반 정도 살았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죽을 때는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크게 와닿는 건 없어요. 때 되면 죽겠지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죽는 것보다 내 주변 사람들이 죽으면 더 슬프고 더 잘할 걸 하는 후회가 남아요. 내가 살아온 것에 대해선 별로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바람처럼 가고 싶어요. 오래 살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어요. 뭔가를 꼭 남기고 죽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고요.”


“어떨 때 제일 우울하세요?”
“크게 우울하거나 그런 성격은 아닌데요. 부모님 생각할 때. 남들은 손자 손녀 보고 하는데요. 삼형제가 아무도 결혼을 안 했고 셋 다 결혼할 마음도 크게 없고. 그런 걸 생각하면 부모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그런 생각할 때.”


“지칠 때가 있잖아요. 지치면 어떻게 회복하세요?”
“어릴 때야 지치면 술을 마시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그랬었는데요. 요즘에는 나이를 먹으면서 지치면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기도 하거든요. 어릴 때는 그런 걸 신경을 별로 안 쓰기 위해서 다른 걸 더 노력했는데요. 요즘엔 오히려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는 것 같아요. 그거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도 하고요. 캄보디아에 와서 그런 걸 많이 배웠어요. 멍 때린다고 하죠. 가만히 아무 것도 안 하기도 하고요.”


“우리는 어떤 일상을 살아야 할까요?”
“한국에 살 때는 정말 정신없이 살았는데요. 회사에서도 주말도 없고 빨간날도 없고 철야하면서 정말 정신없이 살았는데요. 여행을 하면서 그런 자신에 대한 보상을 줬던 것 같고요. 캄보디아에 와서는 마음의 여유를 많이 찾았어요. 물론 그게 딱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여유를 찾은 것 같고요. 앞으로도 캄보디아에 살면서 빡빡하게 큰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나에 대한 성공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 같아요. 여기서 마음 편하게 여행도 하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그게 나에 대한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꽤 오랜 시간 방황도 많이 했어요. 사람들이 생각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말을 하잖아요. 그렇지만 나는 실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이제 시작이 됐으니까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할 거고 그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었으면 그 일 자체를 즐기면서 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여행자들을 많이 만나는 편인데요. 너무 시간에 쫓겨서. 물론 한국이 시간에 쫓겨서 그러겠지만. 좀 여유로운 마음으로 여행을 다니고 자기만의 여행 스타일을 하나씩 가졌으면 좋겠어요. 여행이 이것저것 많이 보고 시간에 쫓기는 것도 좋을 수 있지만 한 가지를 보더라도 제대로 보면서 좀 더 여유롭게. 나라별로 아닌 도시별로 다녔으면. 정말 자유로운 자유여행을 했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뭐하셨어요?”
“오늘은 게스트하우스 오픈을 준비하기 위해서 프놈펜에서 이것저것 사야 할 물건들 확인하고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다녔던 바쁜 하루였죠.”


“어제는 뭐하셨어요?”
“어제도 마찬가지였어요. (웃음) 이번 프놈펜은 출장 개념이었어요. 일을 위한. 한동안은 이렇게 지내겠죠.”


“내일은 어떨 것 같으세요?”
“내일은 이제 프놈펜에서 알아온 것들 정리하고 예산 잡고 어떻게 인테리어를 할지 구체적으로 정해서 실행을 해야겠죠.”


“올해는 어떨 것 같으세요?”
“올해는 인수를 10월에 해서 진행하면 공사를 하고 그러면서 한두 달 정도는 힘들 거라 생각해요. 올해는 투자하는 해고요. 내년에는 (게스트하우스가) 내가 원했던 모습을 갖춰가면서 정말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여기 가면 노는 곳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확실히 잡는 한 해가 될 거 같아요. 즐거운 한 해가 될 것 같아요.”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세요?”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모두들 잘.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잘 살아 봅시다.

아, 캄보디아 T&S(Trust and Smile) 아동센터에서 만난 딸이 있는데요. 딸 결혼까지 보고 싶어요. 한 10년. 지금이 14살이거든요. 그게 또 바람이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결혼할 때까지 후원하고 싶고 결혼식 가서 결혼식 사진을 내가 꼭 찍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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