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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tabook Oct 27. 2022

명품 쇼핑만 즐거운 건 아냐_샌프란시스코(4)

퍼시픽하이츠와 평창동, 그리고 몽클레어

"와 뷰 좋다!"


금문교 근처 퍼시픽하이츠에 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 걸어 올라가니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저 아래로 보이는 넓고 푸른 바다가 절경이었다. 역시 풍경은 높은 곳에서 봐야 제맛이지. 여기까지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이런 곳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퍼시픽하이츠는 샌프란시스코 시내와는 비교할 수 없이 깨끗했다. 집집마다 마당의 잔디가 고르게 깎여 있었다. 이런 부촌은 집과 집 사이, 골목과 골목 사이가 넓다. 동네가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교통이 불편해서 어디 사람이 살겠냐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 거주민이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1인 1차로 여유롭게 다니겠지. 높아서 뷰도 좋고,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가득한-정말 가득하게 느껴졌다-노숙자들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으니, 부잣집들 입장에선 좋을 것 같았다.


"역시 부촌은 달라, 그치? 여유가 넘치네."


"그러게."


"나 예전에 평창동에 있는 회사 다녔잖아. 마치 거기 같아."


한동안 평창동에 있는 회사에 다녔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으리으리한 단독주택들을 지나갔다. 운이 좋은 날엔(!) 차고가 열려 있어 부자들은 무슨 차가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차는 보통 3대 이상이었으며 세단, suv 등 종류도 다양했다. 평창동이라는 동네는 무엇보다 골목이 엄청 넓었다. 다닥다닥 붙어 사는 서민 동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런데 평창동은 좋은 동네긴 하지만 회사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편의점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고,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사무실까지 버스를 타고 30분을 가야 했다. 근처에는 식당이 딱 3곳밖에 없어서 일주일에 같은 메뉴를 두세 번씩 먹었다. 일반 주택을 개조한 사무실은 인원 대비 공간이 좁아 회의실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회사가 그런 곳에 있었을까? 이유는 사장(이하 그분)이 회사에서 개를 키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순종 진돗개였다. 그것도 2마리. 한 번은 사무실에 들어가고 있는데 나무에 묶여 있던 개가 달려들어 겉옷을 물어뜯었다. 깜짝 놀라서 식은땀이 흘렀다. 목줄이 한 5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좁은 마당에서 그렇게 긴 줄로 묶어두면 묶는 의미가 있나? 이를 목격한 그분이 황급히 나와 개를 끌고 갔다. 괜찮냐고 묻지도, 찢어진 옷에 대한 변상도 없었다.


어떤 날은 업무시간에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뭔가 했더니, 그분이 집에서 닥스훈트 2마리를 데려와 풀어놓은 거였다. 진돗개 2마리와 닥스훈트 2마리가 싸움을 벌였다. 개판이었다. 개들이 얼마나 심하게 싸웠는지, 개싸움을 말린 직원 말에 의하면 하얀 진돗개 털에 피가 묻어 있었다고 했다. 그분은 외출하고 한참 후에 돌아와 이 사태를 종료시켰다.


그 회사에 다니며 알았다. (어떤) 개들은 (어떤) 인간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걸. 억울하면 돈 벌어서 떵떵거리며 살아야지. 떼돈 벌어서 평창동에 집 사고 퍼시픽하이츠에 별장 만들어서 살아야지.

안 억울하면 그냥 평범하게 살면 된다.

(난 안 억울하므로 평범하게 살기로 했다)


퍼시픽하이츠에서 내려와 백화점에 갔다. 고여사가 로션 하나를 사야 한다고 했다.


"엄마, 백화점 온 김에 가방도 볼래?"


"됐어. 별로 관심 없어."


고여사와 나는 패션에 관심이 없다. 명품 백, 구두, 옷이 일절 없다. 멋 내는 데 취미가 없다. 얼굴에 흔한 시술도 한 번 안 받았다. 누가 뭘 입건, 손에 뭘 들건 별로 관심이 없다. 고여사는 주얼리 류는 좋아해서 아빠가 결혼기념일마다 패물을 사줬는데, 나 대학생 때 집에 도둑이 들어 몽땅 훔쳐갔다. 그 후 고여사는 더더욱 멋 내는 데 관심을 끊었다.


"엄마, 나도 정말 옷에 관심이 없어. 그 돈 있으면 모아서 여행을 한 번 더 가지. 안 그래?"


"그렇지!"


그때였다. 우리 앞에 한국인 모녀가 걸어왔다. 아무 동양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다. 해외에서 한국인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 한국인 특유의 포스가 있다. 모녀는 팔짱을 꼭 끼고 재잘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둘은 우리보다 조금 젊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엄마도, 딸도 멋쟁이었다. 둘 다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엄마는 웨이브 진 짧은 머리, 딸은 긴 생머리에 귀여운 비니를 쓰고 있었다. 너무 멋스러웠다.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마치 자매처럼 똑같이 맞춰 입은 검은 롱패딩이었다. 팔에 박힌 오뚜기 모양 로고가 보였다.


"MONCLER"

몬클러?


까만 모녀는 깔깔대는 웃음을 남기고 지나갔다.


"엄마, 지나간 사람들 봤지.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


"응 그렇네. 저 패딩 몽클레어 꺼 같은데."


"몽클레어? 처음 들어봐."


"저거 많이 입고 다녀. 따뜻하대."


그래? 검색해보니 이 백화점에도 매장이 있었다.  


"엄마, 우리도 몽클레어 매장 가보자."


매장으로 들어서자 손님이 꽤 많았다. 동양인이 반 이상이었다. 고여사랑 검은 패딩 위주로 들춰가며 찬찬히 구경했다. 가격이 일십백천...


"엄마! 패딩이 삼백만 원이 넘어!!"


"원래 비싸, 여기 꺼."


엄마는 이 패딩의 존재를 알고 있었구나. 근데 패딩을 황금 거위털로 채웠나 왜 이렇게 비싸? 따뜻하면 뭐 얼마나 더 따뜻하겠어? 일단 한번 걸쳐봤다. 거울을 보니 시커멓고 번쩍번쩍한 우주복을 입은 것 같았다.


"엄마, 근데 디자인이 별로 같애. 원래 이렇게 울룩불룩하고 깔때기 같애?"


"그래? 엄만 괜찮은 거 같은데. 너 근데 돈 있어?"


"아니... 근데 솔직히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안 예쁘지 않아?"


"글쎄. 난 괜찮아 보이는데."


이걸 사려면 엄마한테 돈을 꿔야 했다. 하지만 아까 그 멋진 언니들을 따라 하겠다고 옷을 삼백만 원 주고 살 필요가 있을까?


"...엄마, 난 안 되겠어. 그냥 엄마만 하나 사. 마음에 들면."


"아냐 됐어."


솔직히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맘에 들면 엄마한테 돈을 꾸면 된다. <-여전히 철없음) 안 예뻐서 안 사는 거라고 거듭 말하며 매장을 나왔다. 퍼시픽하이츠나 평창동에 사는 건 못해도 비싼 패딩은 살 수 있다, 이 말이야. 안 사는 것뿐이지.


그건 그렇고, 왜 우리는 저렇게 맞춰 입을 생각을 안 해봤지? 엄마와 나는 공항에서부터 확연히 다른, 각자의 스타일로 입고 다녔다. 모녀의 여행이 이래서야 될까? 사실 문제 될 건 없지. 그 모녀를 안 봤다면 끝까지 별생각 없었을 것이다.


그때 고여사가 말을 꺼냈다.


"저기 한 번 가볼래?"


고여사가 가리킨 매장에는 J.Crew라고 적혀 있었다. 역시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매장에 들어서니 몽클레어 매장과는 달리 점원이 웃으며 반겨줬다.


"안녕하세요!"


둘러보면서 가격 택을 보니 합리적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말이 되지. 쭉 둘러보다가 푹신하고 따뜻해 보이는 스웨터를 발견했다.


"엄마, 이거 귀엽지 않아?"


"그러게. 가볍고 따뜻해 보이는데? 여기 회색도 있네."


우리가 스웨터를 들고 있는 걸 보고 점원이 다가왔다.


"그 스웨터 정말 사랑스럽죠! 두 분 모녀인가요?"


"네 맞아요. 여행 중에 쇼핑하러 온 건데, 이 옷이 눈에 띄네요."


"오, 완벽한 스웨터예요. 아주 탁월한 취향을 가졌군요. 엄마랑 딸이 하나씩 사서 입으면 어때요? 아주 멋질 것 같은데요."


"그러고 싶네요. 색깔도 예쁘고 따뜻할 것 같아요. 엄마랑 함께 입으면 행복할 것 같아요."


엄마와 나는 고민 없이 회색과 옅은 핑크색 스웨터를 샀다. 점원은 한 번에 두 개를 파는 전략이 통해서 신났겠지만, 엄마와 난 애초에 커플룩을 사러 들어간 거였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알 수 있었다.

우린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가게를 나왔다. 기분이 좋았다. 우리 여행에 빠진, 그때까진 뭔지는 몰랐지만 그 뭔가가 채워진 느낌이었다.


이런 재미면 쇼핑할 만하지. 쇼핑은 물건이 아니라 기분의 문제란 걸 처음 알았다.

여행 내내 닳도록 입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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