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tabook Nov 07. 2022

잭팟은 사심 없는 사람에게 터진다_라스베이거스(2)

고여사는 정말 사심이 없었을까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체크인하며 배정받은 방은 1층이었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은 침대 2개에 작은 소파, 책상 이렇게 단출한 구성이었다. 가구가 좀 낡아 보였다.


"대낮인데 왜 이렇게 어둡지?"


커튼을 열어보니 바로 앞이 주차장이었다. 방금 차를 대고 나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방바닥과 지면이 같은 높이라 커튼을 열어두면 밖에서 방이 그대로 들여다 보였다. 커튼을 닫았다. 이곳은 말이 호텔이지 리조트에 가까운 3층 건물이었다. 2층 방을 좀 주지. 이래서야 커튼을 내내 닫고 지내야겠네. 어두컴컴하게.  


"엄마, 잠깐 나가서 호텔 구경할래?"


"너 보고 와. 난 샤워할래."


"알았어."


방에서 나와 호텔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구글에서 숙소 찾을 때 리뷰, 평점, 로드뷰까지 꼼꼼히 보면서 괜찮다고 생각해서 골랐는데, 내부가 좀 오래돼 보였다. 이 호텔이 저렴한 편이기는 해도, 훨씬 좋은 호텔과 숙박비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래 봐야 1박에 30~50불 정도? 라스베이거스는 호텔이 그렇게 비싸지 않다. 호텔 수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호텔마다 자기네 카지노로 끌어오려고 숙박비를 저렴하게 받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돈을 조금 더 쓸걸 그랬다. 친구랑 오는 것도 아니고 엄마랑 오는데, 좀 더 고급스러운 곳으로 예약할걸. 방에 돌아가니 고여사는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엄마, 여기 좀 낡았지. 찾아봤을 땐 괜찮았는데."


"아니 난 여기 좋은데? 물이 엄청 뜨끈하고 수압도 세. 샤워하기 좋은데 뭐. 침대도 푹신하고 좋아."


고여사가 침대에 걸터앉아 엉덩이로 매트리스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에이... 돈 쪼금만 더 쓰면 훨씬 좋은 데 갈 수 있었는데. 미안해 엄마, 이럴 줄 몰랐어."


"엄만 괜찮다니깐? 그래 봐야 이틀인데. 그리고 불편한 거 없어 전혀. 예약 잘했어."


고여사는 괜찮다고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엄마, 우리 카지노 가보자."


호텔에 붙어 있는 카지노에 입장했다. 규모가 작은 호텔에 있어서 그런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네 오락실 같았다. 더더욱 속이 상했다.


"엄마, 우리 저쪽에 있는 다른 카지노 가자."


호텔을 나와 고급 호텔이 몰려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바로 스트립이라 불리는 메인 지역으로. 멀리서 봐도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저곳이 금광이로구나. 우리 돈벼락 맞을 수 있을까?


스트립까지는 지도상으로는 9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막상 걸으니 좀 멀게 느껴졌다. 왜 여기까지 여행 와서 시골 사람들처럼 저길 걸어서 가야 하느냐고... 호텔 선정에 다시 격한 아쉬움이 들었다.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침내 스트립에 도달했다. 우리가 있던 호텔과는 차원이 달랐다. 화려한 불빛이 고여사와 나를 감쌌다. 그렇지, 이게 라스베이거스지! 지금까지의 피로가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가장 화려해 보이는 호텔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앞으로 쭉 명품숍이 줄지어 있었다. 돈 따면 여기서 명품 사라는 거겠지? 물론 돈을 따지도 못하고 명품을 살 것도 아니지만 왠지 들떴다.


명품숍들을 지나자 카지노가 나왔다. 슬롯머신들이 있는 공간이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엄마, 우린 그냥 재미로 하는 거지, 돈 따려고 하는 거 아냐 알지?"


"그래, 엄마도 이런 데 취미 없어. 딱 200불만 쓰고 가자."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슬롯머신 앞에 앉았다. 나는 자기 최면을 걸었다. 나는 돈 따는 데 관심 없다, 대충 할 거다, 어차피 될 리가 없다. 카지노에서 돈을 따려면 사심이 없어야 한다. 카지노에서 돈 딴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 아닌가. 나도 여기서 큰돈 따서 가게 되면 꼭 사심 없이 했다고 말해야지.


"딸,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아까 하는 법을 알려줬는데 고여사는 계속 버벅거렸다. 에휴 엄마, 이래서야 돈 따겠어? 고여사는 내가 가르쳐준 대로 기계처럼 버튼을 반복해서 눌렀다. 그런데 고여사가 자꾸 돈을 땄다. 5달러에서 30달러까지, 푼돈이긴 했지만 야금야금 돈을 벌었다.


"오 엄마 웬일이야? 왕년에 좀 땡겨보셨어?"


"나 이거 처음 해봐. 예전에 아빠랑 강원랜드 딱 한 번 가봤는데, 신분증 안 가져가서 안에 못 들어갔잖아. 나 이거 계속해?"


"응응. 계속해봐."


고여사는 조금씩 잃다가 조금씩 따다가를 반복하다가 거의 500달러 가까이 땄다.


"이야 대단하다 엄마. 우리 여기서 떼돈 버는 거 아냐? 엄마, 우리 다른 기계에서도 해보자."


"뭘 그렇게까지 해. 그냥 여기서 하자. 귀찮아."


"무슨 소리야 엄마. 오늘 심상치 않으니까 푼돈 말고 돈 더 주는 기계로 가야지."


벌써 돈을 거의 다 써버린 나는 고여사 손을 잡고 더 좋아 보이는 슬롯머신을 찾아 돌아다녔다. 우리 엄마 도박에 재능이 있나 봐. 운이라고는 하지만 운도 실력 아니겠어?


좀 더 화려해 보이는 슬롯머신에 고여사를 앉히고 게임을 시켰다. 한판, 두 판...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고여사는 힘을 못 썼다. 3불, 5불, 10불... 계속해서 돈을 잃었다.


"엄마, 이러다가 다 잃겠어. 좀 잘해봐."


"가만있어봐."


고여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신중히 버튼을 눌렀지만, 계속 돈을 잃었다. 욕심 없이 시작하자고 말했지만, 막상 돈이 들어왔다 나가니 손해 본 기분이었다. 그냥 아까 현금화해서 나갈 걸 그랬나?


"엄마 옆으로 옮겨서 한번 해봐."


고여사는 바로 옆 슬롯머신에서 몇 번 더 해봤지만 또 잃기만 했다.


"엄마 아까 그 슬롯머신이 잘 터지는 거였나 봐. 거기서 계속할걸.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우리 아까 거기 다시 가볼까?"


고여사가 귀찮다고 그만하자고 할 줄 알았다.


"그럴까?"


고여사는 재빨리 일어났다. 오 웬일이래.


아까 그 자리를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 슬롯머신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돌아다니는데 같은 길만 뱅뱅 도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우리 분명히 이렇게 이렇게 이쪽으로 저쪽으로 해서 왔는데..."


원래 방향치라 식당 안에서도 길을 잃기 일쑤였던 나는 여기서도 헤맸다. 고여사는 길을 잘 찾는 편이긴 했지만, 워낙 비슷하게 생긴 게임기들이 많고 공간이 넓어서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돌기를 30분, 기진맥진했다. 계속 돌아다니니 현기증이 났다. 속이 안 좋았다.


"엄마, 안 되겠다. 그냥 아무 데나 앉아서 돈 마저 쓰고 가자."


"가만있어봐. 엄마 찾을 수 있어.”


"엄마... 이제 그만 가면 안돼? 나 너무 힘들어. 속도 안 좋아."


"엄마 이제 알 것 같애. 한 번만 더 가보자."


고여사는 금문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도박 좋아하지도 않고 욕심도 없는 양반이 왜 이럴까? 고여사, 혹시 도박에 맛 들인 거야?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었다.


"찾았다! 이거네 이거."


끝내 고여사는 아까 그 슬롯머신을 찾았다. 이 정도면 도박 좋아하는 사람 맞는 거 같은데... 고여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슬롯머신 앞에 앉았다.


그러나 슬롯머신님은 그 새 변절해 있었다. 고여사가 몇 번을 시도해도 계속 잃기만 했다. 억울했다. 그냥 자리 옮기지 말고 여기서 계속할 걸, 뭘 더 좋은 기계를 찾는다고. 라스베이거스에선 계속 후회만 하고 있네.


"에이, 그만 하자. 돈 다 떨어졌어. 이제 돌아가자."


고여사는 툭툭 털고 일어섰다. 기진맥진해서 출구로 걸어가는데 오른쪽에 돌림판 게임이 있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하면서 동그란 판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 있지 않은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고 싶었다.


"엄마, 마지막으로 이것만 해보자."


내가 먼저 버튼을 눌렸다. 꽝.

엄마가 버튼을 눌렀다. 휙휙휙... 판이 돌아가더니 점점 느려지더니 더더 느려지더니... JACKPOT이라고 쓰인 곳에 바늘이 도달했다.


"엄마!! 잭팟이야!!! 오 대박!!!"


...인 줄 알았더니 아주아주 살짝 더 돌아서 꽝에서 멈췄다. 거의 경계선에 멈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악 뭐야 저거!!! 아깝다!!! 잭팟 될 수 있었는데!!! 아 오늘 왜 이렇게 안 풀려!!"


아까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내가 날뛰는 걸 보더니 고여사가 차분하게 말했다.


"저거 안 된 게 나아. 엄마 저거 됐으면 졸도했어. 아마 캐나다 여행도 안 갔을 거야. 덕분에 맘 편히 여행하고 좋지 뭐. 안 그래?"


"엄마, 근데 그런 것치곤 아까 슬롯머신 너무 열심히 찾으러 다니시던데요?"


"재밌잖아. 그건 그런 재미가 있는 거고. 이건 다르지. 암튼 안 된 게 잘 된 거야."


여기서 잭팟이 터졌으면-사실 잭팟이어도 얼마를   있었는지는 모른다-보디가드들에 둘러싸여  호텔 최고 좋은 룸에서 하루 묵을  있었을 텐데 (영화에선 그러던데). 그럼 우리의 허름한 호텔로 돌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고여사는 모르겠지만  그게 제일 아쉬웠다.


어두컴컴해진 밤, 우린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 우리의 호텔로 돌아갔다. 


'잭팟 안 터진 걸 보니, 역시 고여사는 사심이 가득했던 것이야..'


호텔이 시끌시끌한 스트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꿀잠 자긴 좋았다.


돈 못딴 걸 보니 사심이 있으셨군요


매거진의 이전글 명품 쇼핑만 즐거운 건 아냐_샌프란시스코(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