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캐니언을 가장 재밌게 관광하는 법은 모르지만, 가장 효율적으로 하는 법은 안다. 바로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는 것. 그랜드캐니언 1박 2일 패키지에는 그랜드캐니언+앤텔롭캐니언+홀슈밴드+자이언캐니언+파웰호 관광이 포함된다. 근사한 별장이나 오토캠핑장에서 숙박도 한다. 포털 사이트에 '그랜드캐니언 여행'을 치면 거의 모든 여행사가 비슷한 패키지를 운영한다.
그렇다면 이 관광지들이 마침 라스베이거스 근처에 몰려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이들은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주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 관광 패키지는 이 명소들을 단 이틀 동안 보는 엄청나게 빡센 여정이다. 굵직한 스팟들 간 거리를 보자.
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니언 450km
그랜드캐니언-앤텔롭캐니언 180km
앤텔롭캐니언-자이언캐니언 200km
자이언캐니언-라스베이거스 250km
이것만 해도 1100km 가까이 되는데, 중간에 낀 관광지 거리까지 합하면 총 1200km가 넘는 여정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00km다. 그러니까 이 패키지는 서울에서 부산 갔다가 다시 서울 왔다가 다시 부산으로 가는 정도라 보면 된다. 중간에 거제, 창원, 전주, 서산, 대전을 들러 관광하면서...
이 엄청난 걸 해내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에 간 김에 ~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에 간 김에 ~도 간다'의 끝판왕이 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니언 1박 2일 패키지 여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관광지에 들러 사진 찍고 차에 올라 죽어라 밟고, 또 관광지 들러서 사진 찍고 죽어라 밟고... 조금이라도 엑셀을 살살 밟았다간 관광지 한 두 개는 못 들르는 사달이 나고야 마는, 스릴 만점인 패키지 여행인 것이다.
이런 대단한 여행인 줄 몰랐던 고여사와 나는 새벽 6시, 호텔 앞에서 우릴 픽업해줄 가이드를 기다렸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스타렉스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1박 2일 동안 우리를 데리고 다닐 운전기사이자 가이드가 인사했다. 나이는 40대 초중반, 왕년에 운동을 하셨는지 몸이 다부졌다. 성격이 시원시원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밤늦게까지 흥청거렸던 스트립에 차 한 대 안 보이는 이른 새벽, 가이드는 호텔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픽업했다.
마지막 호텔 픽업이 끝난 후 모인 최종 파티원은 고여사와 나(모녀), 20대 초반 여성 2명(친구), 20대 후반 남성 1명(혼자), 부부와 7살 아이(가족) 이렇게 8명이었다.
첫 번째 장소는 그랜드캐니언. 새벽에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정오 가까이 되어 있었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쉬긴 했지만 워낙 장거리라 피곤했다. 아까 말했듯 그랜드캐니언까지 편도 450km이다. 찌뿌둥한 팔다리를 쭉 펴고 스트레칭했다.
"엄마 여기가 그랜드캐니언이야! 진짜 멋지지!
"응 그러네."
응 그러네? 반응이 좀.. 미적지근한데? 사실 나도 그랬다. 엄청난 감동은 없었다. 그동안 사진이나 영상으로 자주 접해서일까? 어마어마한 공간감과 웅장함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뭐랄까, 너무 크고 거대해서 현실감이 떨어졌다. '멋지긴 한데, 사진으로 보던 그대로네' 하는 생각이 앞섰다. 만약 아무 정보 없이 이곳에 왔더라면, 거의 기절할 만큼 압도되었겠지?
가이드가 안내해주는 포토 스팟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고여사랑 어깨동무하고 찍기도 하고, 등 돌리고 팔을 하늘로 쭉 뻗어 브이를 그려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걸어 다니며 풍경을 감상하고 사진도 찍길 10분. 이내 지루해졌다. 멋진데 너무 똑같았다. 앉아서 가이드님이 정성껏 싸서 만든 유부초밥 도시락을 먹었다. 새벽같이 우리를 태우러 왔는데, 이런 정성 들인 유부초밥은 또 언제 만드셨대? 모양은 투박했지만 꿀맛이었다.
경치를 감상하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차로 돌아왔다. 이제 홀슈밴드로 출발. 2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홀슈밴드는 정말 멋졌다. 홀슈벤드는 Horseshoe Bend로, 말발굽 모양으로 굽은 협곡이라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절벽 아래 유유히 흐르는 콜로라도강이 아름다웠다.
사막 한가운데 있어서 그럴까? 예전에 좋아했던 만화책 <호텔 아프리카>가 떠올랐다. 황량한 곳에 자리 잡은 그 호텔. 그곳에 오고 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추억처럼 떠올랐다. 오래된 작품이라 흑백이었지만, 실사화한다면 이런 색감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고여사는... 호기심 많은 고여사는 협곡이 아니라 사막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래바람이 심하게 불어 온몸에 모래가 붙는 그 와중에도 아랑곳없었다. 바람은 점점 심해져서 거의 시야가 뿌예질 정도였다.
"엄마! 이제 가자! 얼른 와!"
역시나 대답 없이 앞쪽으로 걸어가는 고여사였다.
"아 엄마!! 가야 돼!!! 모래바람이 너무 심해!!"
또 모른 척하는 고여사.
모래 바람 때문에-사실은 성질이 나서-인상을 팍 쓰고 고여사를 잡으러 갔다. 모래바닥에 발이 푹푹 빠졌다.
겨우 따라잡아서 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엄마! 이제 가자!"
"어머 너 여기까지 왔어?"
"그래 엄마가 안 오니까 내가 잡으러 왔지! 어디까지 가려고 했어? 내가 가자고 그렇게 얘기해도 못 들은 척하고.”
"아냐 진짜 못 들었어. 바람이 너무 세서 안 들렸나 봐."
"에휴. 돌아가자 엄마. 모래바람 더 심해질 거 같아."
고여사의 손을 부여잡고 겨우겨우 차까지 왔다. 모두 차 안에서 고여사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얼른 출발해요."
차에 타서 고여사의 다리를 보니, 군데군데 피가 맺혀 있었다. 모래바람을 맞아 피가 날 정돈데 못 느끼고 계속 걷고 있었다니. 고여사, 대단하신 분.
여기까지만 해도 강행군인데, 다음 일정이 또 있었다. 바로 앤텔롭캐니언. 차가 출발하자마자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눈을 감았다 뜨자 바로 앤텔롭캐니언이었다.
그랜드캐니언이 고전파라면 앤텔롭캐니언은 신진세력이랄까? 그랜드캐니언이 클래식 음악이라면 앤텔롭캐니언은 시티팝 정도? 한 소녀가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찾은 협곡이라는데, 햇볕이 은은히 들어오는 이 신비한 곳에 처음 들어갔을 때 얼마나 매료되었을까? 이걸 관광지로 만들어 떼돈을 벌었다는 걸 보면 비즈니스 감각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신비롭고 멋진 곳은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예술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풍경인 듯하나 조금씩 특색이 달랐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온 느낌이었다. 그랜드캐니언이 생각보다 별로였던 이유는 그냥 멀리서 보는 경치 구경이라 그랬나 보다. 곳도 이렇게 직접 밟으며 돌아다녔다면 훨씬 멋졌겠지?
앤텔롭캐니언을 끝내고 늦은 오후가 되었다. 이제 드디어 끝인가? 얼른 숙소에 가서 쉬고 싶었다.
"자 이제 마지막 장소, 파웰호가 남았습니다. 멀지 않으니 얼른 가시죠."
가이드님.. 또 있어요?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요? 너무 지치고 피곤했다. 가이드님은 우리 파티원들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봤지만, 익숙하다는 듯 무시하고 뒷좌석에 몰아넣었다. 차에 넣어진 우리는 바로 기절했다.
"도착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구경 잘하고 오세요."
눈을 비비고 차에서 나오니, 멋진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해질녘이 되어 더욱 아름다운 파웰호였다. 사막 지역에 이렇게 멋진 호수가 있다니. 우리는 피곤함도 잊은 채 열심히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녔다. 마지막 장소라고 하니 풍경이 더 멋져 보였다.
마지막 파웰호까지 보고서야 하루 일정이 마무리됐다. 호수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는데, 오토캠핑장에 도착하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드디어 가이드님이 우리가 먹고 쉬는 걸 허락했다.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돈을 지불한 이상으로 뽕을 뽑게 해 줘서 고맙긴 했지만, 드디어 배를 채우고 몸을 누일 수 있게 해준 게 더 고마웠다.
고여사와 나는 배정된 캠핑카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삼겹살 파티를 기대하며 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