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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tabook Nov 16. 2022

피부는 딸에게 양보한대요_코랄핑크 샌드듄과 자이언캐니언

광활한 대지의 풍경을 즐기려면 이곳으로 가자

캠핑카에서 밤새 숙면을 취하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고여사는 65세 어르신답게 새벽부터 일어나 있었다고 했다. 우린 일어난 김에 아침을 먹으러 식당 컨테이너로 향했다.


"다들 어제 맥주 마셔서 늦게까지 잘 거 같은데. 우리가 1등으로 일어났겠지?"


"어이 안녕하세요!"


컨테이너 앞에서 가이드님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와 강철체력 멀티맨. 피곤할 텐데 제일 일찍 일어나셨네. 고여사와 나는 손을 마주 흔들어 보이고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식빵과 치즈, 믹스커피가 놓여 있었다. 토스트기에 구워낸 식빵에 치즈를 껴서 한 입 먹었다. 믹스 커피 향기가 구수했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오늘은 1박 2일 대장정의 마지막, 코랄핑크 샌드듄과 자이언캐니언에 가는 일정이었다. 어젯밤에는 다 모르겠고 당장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는데, 자고 나니 금세 체력이 회복돼 또 돌아다닐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여사도 컨디션이 매우 좋아 보였다. 파티원이 모두 짐을 들고 스타렉스 앞으로 모였다. 우리는 또다시 뒷좌석에 넣어져서 코랄핑크 샌드듄으로 실려갔다.


둘째 줄 좌석에 앉은 고여사는 창밖 풍경 대신 앞에 앉은 대학생을 계속 쳐다보았다. 고여사의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엄마 왜 그래?’


'택.'


뭔 말이야? 고여사의 시선을 따라갔다. 어제 나한테 프리랜서 하고 싶다고 말한 학생의 모자에 가격 택이 붙어 있었다. 친구였으면 당장 떼주거나 '너 모자에 택 붙어 있어' 하고 얘기해줬을 거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배려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요새 패션인가?’


10살 어린 학생이 이러고 있으니, 내가 모르는 패션 트렌드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괜히 참견했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 취급받기 싫었다.


'엄마, 요새 젊은애들 사이에 유행일 수도 있어. 못 본 척 하자.'


고여사는 영 불편한 표정이었다. 결벽증 있는 울 엄마, 저걸 얼마나 떼주고 싶을까.


어제 갔던 관광지들과 달리, 오늘 가는 곳들은 별로 정보가 없었다. 그저 '가이드님이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지' 하고 스타렉스에 실려갈 뿐. 차는 한 시간 반쯤 달려 코랄핑크 샌드듄에 도착했다.


"여러분, 여기 둘러보시다가 1시간 후에 출발할게요."


차에서 내려 얼마간 걸으니 사막이 나왔다. 모래가 코랄 핑크색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내 눈엔 약간 붉은빛을 띤 황토색으로 보였다. 하여간 미국 사람들 네이밍이랑 마케팅은 참 잘해.


모래 색깔이 정확히 코랄 핑크는 아닐지라도, 풍경은 정말이지 예뻤다. 예전에 뉴멕시코에 있는 알라모고도 화이트샌드에 간 적이 있다. 세상에 그렇게 하얗고 멋진 사막이 있을 줄은, 두 눈으로 보지 않고선 평생 몰랐을 것이다. 그곳만큼은 아니지만 이곳도 나름 매력이 있었다. 역시 미 서부의 아름다움은 이런 황량함에 있는 것 같다. 마침 뭉게구름도 멋지게 떠 더더욱 예뻤다.      



"엄마, 우리 맨발로 걷자. 운동화에 모래 다 들어가겠어."


고여사와 나는 신발을 벗고 모래 바닥을 성큼성큼 밟으며 돌아다녔다. 오전이라 그런지 발에 느껴지는 모래 감촉이 시원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이 아니라 사막의 모래를 맨발로 밟다니,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런 척박한 사막에도 키 작은 나무들과 듬성듬성 자라난 식물들이 보였다.


아까 들어오면서 표지판에서도 봤는데, 이곳은 식생이 분포하기 거의 불가능한 지역인데도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했다. 가장 척박한 사막에도 강한 생명력이 숨어 있구나.


사막을 맨발로 걸으며 풍경에 감탄하던 고여사는 어딘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모자에 택을 붙이고 있는 학생이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저거 택을 왜 안 떼는 걸까?"


"아 엄마, 경치를 구경해야지. 내버려 둬. 젊은애들 사이에서 유행일 수도 있다니깐."


"저런 게 유행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내가 이따 한번 물어볼래."


멋진 경치 앞에서도 모자에 달린 택이 가장 큰 관심사인 고여사였다.


사막을 원 없이 구경하고 모두 차에 모였다. 이제는 마지막 목적지, 자이언캐니언만 남겨두고 있었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파티원 전원 스타렉스 착석 완료.


"저기요, 학생."


기어이 고여사가 학생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모자 뒤에 택 붙어 있는 거 알고 있어요? 내가 떼줄까요?"


"아 어머니! 이거 일부러 안 떼는 거예요. 오늘 쓰고 다니다가 라스베이거스 돌아가서 환불하려고요."


학생은 싱긋 웃어 보였다. 고여사는 입을 벌린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심하게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고여사의 스타일을 잘 아는 나는 고여사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고선 재빨리 말했다.


"아 그렇구나, 어쩐지! 미국은 환불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도 많죠. 역시 젊은 사람이라 실속 있어."


고여사는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도덕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는 꼭 시시비비를 가리려 한다. 나는 미리 차단해야 했다. 학생이 다시 앞을 보자 귓속말로 말했다.


'엄마 아무 말도 하지 마. 미국은 원래 별거 다 환불받아줘.'


'아니 그래도 그렇지, 색깔도 하얀색이고 모래 묻어서 지저분해졌는데 저걸 환불한다고? 저건 양심이 없는 짓이야.'


'아 가만있어. 알아서 하겠지. 엄마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환불 안 받을 것도 아니고. 내버려 둬.'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고여사 옆에서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했다.


'꾸미는 거 좋아해서 프리랜서 못할 것 같았는데, 저러는 거 보니 할 수 있을 것도 같네.'


학생이 모자를 환불받건 안 받건, 내 문제는 아니었다. 진정한 내 문제는 바로 모자를 호텔에 두고 왔다는 거였다. 자이언캐니언에 도착하니 해가 중천에 떠서 땅을 이글이글 태우고 있었다. 너무 뜨거워 보이는데. 그래도 뭐, 한국에서도 한여름에 모자 안 쓰고 다니는데 이까짓 거야 뭐.


"너 모자 안 써도 돼? 엄마 모자 두 개 있는데 하나 빌려줄까?"


"아냐 됐어. 나 거추장스러워서 모자 잘 안 써."


"그래도 저기 올라가려면 많이 뜨거울 것 같은데. 괜찮겠어?"


"아 됐다니까! 됐어 됐어."


걸리적대는 건 딱 질색이고 피부가 타는 게 대수인가 싶은 내게, 모자는 필요 없었다. 게다가 엄마가 가져온 모자는 아줌마스러운 걸 넘어 할머니스러웠다.


자이언캐니언 입구까지는 차에서 내려 15분쯤 걸어가야 했다. 한 5분쯤 걸으니 약간 후회가 됐다. 정수리가 뜨겁다 못해 따가웠다.


'모자 달라고 할걸 그랬나? 에이 아냐, 괜찮을 거야.'


자이언캐니언 입구에 다다랐다. 가벼운 트레킹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높았다. 햇볕은 그새 더 강해졌다.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어쩌지? 다시 차에 갔다 오면 시간이 지체돼서 안 될 거 같은데. 그렇다고 그냥 올라가면 내가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너 이 모자 써. 엄마는 수건 두르고 갈게."


"아냐 엄마, 됐어. 나 그냥 갈 수 있어."


"피부는 젊어서부터 잘 관리해야 돼. 자 이거 써."


고여사는 내 머리에 모자를 씌어주었다. 내가 엄마였으면 “너 내가 차에서 모자 쓸 거냐고 물어봤을 때 안 쓴다고 했잖아! 그래 놓고선 이제 와서 뜨겁다고 하면 어떡해? 으휴 진짜! 내가 너 땜에 못살아!"라고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고여사는 비난 한 마디 없이 모자를 씌워주고 본인은 수건을 머리와 얼굴에 둘렀다.


"엄마는 이렇게 가면 돼. 우리 딸 피부 지켜줘야지. 그리고 엄마는 땀 많이 나서 이 편이 오히려 좋아. 얼른 가자!"


먼저 힘차게 걸어가는 고여사의 뒷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엄마 근데 수건 촌스러운데 어디 꺼야? 송월타올이야?


자이언캐니언은 규모가 굉장히 컸다. 물론 그랜드캐니언-이름도 그랜드이다-이 훨씬 더 크겠지만, 직접 땅을 밟아보니 자이언캐니언의 크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캐니언 오버룩 트레일(Canyon Overlook Trail)은 전체 1.6킬로미터의 여정이고, 다 올라가면 높이가 350미터 정도 된다. 이곳도 사막 기후라 식생하는 식물은 한정되어 있고, 도마뱀과 큰뿔야생양(bighorn sheep) 정도가 살고 있다.


햇볕이 강해서 힘든 거지, 대한민국의 여느 산과 비교해도 등산 난이도는 쉬웠다. 설악산, 한라산, 덕유산, 소백산, 오대산, 북한산, 관악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산을 올랐던가. 평소 등산을 즐기는 사람도 아닌데 살면서 이 산들을 최소 2번 이상 오른 걸 보면, 역시 대한민국은 위대한 산맥의 나라(?)인 것 같다.


중간에 충분히 쉬면서 걸었지만, 이내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정말이지 압도적이었다.



"엄마, 한국에서도 산 꼭대기에 오르면 멋지긴 한데 여기는 미국이라 그런지 규모가 어마어마하네."


"그러게. 스케일이 다르다 야. 그래도 한국 산들이 얼마나 예쁜데. 한국의 산들은 좀 아기자기한 멋이 있지."


멀리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직접 땅을 밟는 데서 오는 감동이 있었다. 내가 한발 한발 걸어 올라간 곳에서 풍경의 일부가 되어 경치를 보니, 사진이나 인터넷에서 보는 거랑 차원이 달랐다. 이래서 힘들어도 사람들이 두 발로 산에 오르는구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보는 경치는 뭔가 빠진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 학생들을 마주쳤다. 젊어서 그런지 지친 기색이 하나도 안 보였다. 잰걸음으로 앞으로 치고 나가는 학생들을 보니 흐뭇했다. 나도 10년 전엔 저렇게 팔팔했는데, 왜 진작 여기 와볼 생각을 안 했을까.


고여사는 여전히 택 달린 모자를 쓴 학생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여기 봐 도마뱀 너무 귀엽지! 선인장도 꼭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생겼네."


고여사가 다른 생각 없이 이 순간을 즐겼으면 했다. 그럴 땐 기분 좋아지는 것들로 시선을 옮겨야지. 고여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이구 우리 귀여운 고여사. 고여사가 1박 2일 여행의 마무리를 즐겁게 하는 중이라 생각하니 나도 행복했다.



아직은 해가 떠 있는 늦은 오후, 우리는 드디어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왔다. 이곳이 집도 아닌데 왜 집으로 돌아온 것마냥 이렇게 반갑지? 눈호강 실컷 하고 즐거운 추억을 한껏 만든 1박 2일이었다. 아쉽지만 오늘로써 미국 여행은 끝. 내일은 단풍놀이하러 캐나다로 떠나야지.

   

가을 단풍 보러 간 캐나다에 눈이 50cm 쌓여 있을 줄 이땐 꿈에도 몰랐지. 라스베이거스의 마지막 밤, 고여사와 나는 라면에 햇반을 배불리 먹고 단잠에 빠졌다.  


사막을 누비는 맨발의 꼬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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