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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Nov 23. 2020

기승전결이 있는 삶

앞 뒤가 똑같은 삶, 그런 게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지도 이제 8개월이 좀 넘어가는 것 같다.

생소한 도메인, 생소한 업무, 풀 리모트 환경에서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는 것이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친구도 있었고 동료들도 많이 도와줘서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업무를 마무리하고 오늘 하루도 빠진 것이 없었으며, 이슈도 전부 해결했고 오늘 하루의 투두리스트도 다 끝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노트북을 닫았지만. 

마음 한 켠에 계속해서 빈 틈이 남아있고, 이 틈은 메꿔지지 않는다.


나는 기승전결이 있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참 많이도 부러워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가까운 지인에서부터 멀게는 매체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사람들까지, 그들의 삶에는 기승전결이 있어보였다. 

자신이 원했던/혹은 잘했던/아니면 좋아했던 일, 방향성이 있고, 그 방향성대로 나아가면서 일을 해냈고, 결과적으로는 그 일에 완전히 정착해서 안정적인 수익을 내거나 다음 세대를 이끌거나 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게는 그것이 명확한 기승전결이 있는 삶처럼 느껴졌다. 


이 기승전결이라는 게 꼭 10년을 넘게 그 일을 파고들어서 마침내 결과를 이뤄냈다라는 관점 뿐만이 아니다. 그냥 1년동안의 시간이어도 그 안에 본인만의 기승전결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본인이 인지한 출발점이 있고, 대략적으로라도 도착지점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으며, 그 도착지점을 향해서 나아가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삶이었다. 


하지만 나는 출발점도 도착점도 불분명했고 그래서 내가 지금 보내는 하루 하루들도 그냥 뿌옇게 느껴진다. 

아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일지도, 그리고 집중하기보다는 여러가지 것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가고 싶은 사람이라서, 아니면 사실 성향 자체가 기승전결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도. 


그리고 또 나는 앞뒤가 같은 사람들이 부러웠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고 또 집중하고, 더 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 자체가 본인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외부에도 전해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다소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에 갭이 큰 편이기 때문에 더더욱이나 어느 한 쪽을 통일시키려면 아주 게으른 사람이 되거나 지금보다도 더 바쁘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너무 지쳐서, 아니면 이 정도로도 만족하는데 이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사실 내가 정말 되고자 했던 사람은 저런 사람이 아닐지도. 


이틀에 한 번 정도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생각한 기승전결에서 벗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빈 틈을 자꾸만 건드린다. 

예전이라면 어떻게든 이 빈 틈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해결방안을 찾고, 극복하려고 노력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이 커지는 빈 틈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다. 


내가 항상 그래왔듯 주위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고, 나의 약한 점을 찾아서 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스스로가 이렇게 느끼는 게 맞는지, 어쩌면 나는 지금에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제대로 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고 싶었고 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되지 못했다고 해서 나의 삶 자체를 실패라고 낙인찍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어떻게든 평가하고 낙인 찍으려는 나를 다독여본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말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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