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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bedobedo Apr 21. 2018

자코메티에 대한 두 가지 시선

카뮈의 시선과  한병철의 시선

알베르트 자코메티. 


"덜어내고 비워낸 형태에서 ‘본질’을 조각한 자코메티. 세상과 사물에 대한 독특한 관점으로 작품을 완성시키는 자코메티만의 예술세계".


라는 화려한 찬사는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에서 완성되었다.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소문난 잔치에 가봐야 했고, 다행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있었다. 


실존주의의 기표라는.



카뮈적 해석


<Sisyphus - Figure Sculpture>


처음 자코메티의 Walking Man을 마주할 때 '영원히 바위를 밀고 있는 시지푸스' 에 대한 생각이 곧장 떠오를 만큼, Walking Man은 끊임없이 바위를 산 위로 올려야 하는 시지푸스와 같이 우리 삶의 허무함과 목표 없는 방황, 이에 대한 반항을 단숨에 표현했다. 아마 알베르 카뮈가 조각을 할 수 있다면 이런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까.


시지프스 신화에 대한 해석은 하이데거에서 시작되었지만, 알베르 카뮈는 그 유명한 '이방인'을 통해 사람들의 권태롭고 전망 없는 일상이 희망 없는 형별과 같다는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였다. 매일 반복되는 권태로운 삶,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살아지는 비본래적 삶에 대한 해답은 가장 쉽게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희망'과 '죽음'.


하지만 '희망'은 삶을 배반하는 속임수이고 '죽음'은 삶의 부조리에 대한 극복이 아닌 소멸, 즉 회피일 뿐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방법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순 없다.


그래서 카뮈가 제시한 것은 '반항'이다. 메마른 현실을 그저 버티는 것. 희망도, 구원도 없는 이 비루한 삶에 대하여 그저 묵묵히 반항하는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야 말로 카뮈가 제시한 본래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불만 없이 그저 바위를 밀고 있는 시지푸스야 말로 반항하는 인간의 표상이다. 카뮈의 표현을 빌리면 '고통을 직시하는 그는 그가 미는 바위보다 강한 인간이 된다'.


자코메티의 Walking Man 역시 카뮈의 시선을 빌려 바라보면, 목적지 없는 걸음을 계속하며 삶에 반항하는 위대한 거인의 모습인 동시에,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무기력한 난쟁이의 모습이다. 



한병철의 해석


<Edward Hopper - American Gas Station Country Road>

하지만 '반항하는 자유를 가진 인간'이라는 카뮈의 시지프스는 현대 사회에서 난도질을 당한다. 


'피로사회'와 '에로스의 종말' 등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철학자가 된 한병철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현대인은 스스로를 자유롭다 생각하는 자발적 노예일 뿐이다. 1900년대 카뮈와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의 인간은 전쟁, 사회 시스템과 같은 체제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해야 한다(Should)'는 당위성에 대한 반항을 통해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현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체계가 아닌 현대인 자신이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의지를 불태우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되뇌며 젊음을 불사르는 현대인들에게 사회체계는 큰 힘을 갖지 못한다. 자기계발이라는 족쇄를 채우며 끊임없는 발전을 강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라는 것이 한병철의 관점이다.


현대인들은 누구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쾌락과 행복에 따라 행동한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이며 일종의 자기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인 상태이며, 끊임없이 '할 수 있다'를 되뇌는 이 교착화된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한병철이 말하는 '피로사회'의 본질이다.


한병철의 관점에서 자코메티의 Walking Man은 죽을 때까지 피로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기표이다. 그의 등을 떠미는 체계가 없음에도 Walking Man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끊임없이 걸어야만 한다. 그의 머리 속에는 '걸어야 한다' 가 아니라 '걸을 수 있다'는 생각뿐이며, '걸을 수 있기 때문에 계속 걷는다'는 스스로의 다짐이 한순간도 그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질문. Walking Man은 어디로 가는가


카뮈의 시선이나 한병철의 시선이나, 인간은 끊임없이 걷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결론이 도출되며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걷는 자의 반대는 멈춘 자이다. 멈춘다는 것은 미래를 향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멈춤은 죽음을 의미하며, 반대로 걷는다는 행위는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다면 '왜 걷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어디를 향해 걷는 것'인지가 더욱 중요한 질문이다.


키에르케고리는 그 목적지를 신과의 일치로 보았다. 카뮈는 목적지를 일관적인 반항으로 보았다. 사르트르는 사회개혁을 위한 앙가주망(Engagement)으로 보았다. 한병철은 자기부정을 통한 숭고한 사랑으로 보았다.


하지만 목적지를 선택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다.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니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삶에 의미가 생긴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우리는 자유를 선고받았기 때문에 누구도 자유를 거부할 권리는 없다. 어떤 목적지를 선택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몫이며, 이러한 선택의 외로움과 즐거움이 자코메티가 Walking Man에서 보여주는 왜소하지만 홀가분한 인간의 모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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