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책한권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시험을 떨어졌다. 처음에 세상의 정의를 구현하고 약자가 좀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라며 시작했던 사법시험은 몇번의 탈락 끝에 왜 멀쩡한 내가 백수인채로 겨울이고 여름이고 밤낮으로 공부해야 하는지 자괴감 속에서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는 심정으로 시험장에 들어간 4번째 2차시험을 보고서야 끝이 났다. 공부하는 과정에서의 더 찌질한 이야기가 많이 있으나 앞으로 그것들에 대해서 할 기회는 많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끼리 "너는 왜 공부해?" 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중의 한 친구가 "응, 혹시 나중에 남편한테 이혼당해도 당당하게 벌어먹고 살려고" 라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여자로서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커리어를 쌓아 나이가 든 이후에도 직업을 가지고 당당히 살아간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알았기에 변호사라는 전문 자격증을 따서 일종의 보험이라도 들어놔야 한다는 그 친구의 이야기는 일리가 있는 슬픈 얘기 였다. 그리고 그 보험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얘기 속에 대화를 끝냈던것 같다.
오래전에 읽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을 다시 꺼낸것은 버지니아 울프가 태어난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도 공감가는 바가 많다. -"여자가 작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애인이 갑작스럽게 자살을 한다. 홀로 남겨진 여자친구는 영문도 모른채 그가 생전에 짊어졌던 고민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애인의 죽음을 마주한다.
죽기 직전까지, 그 남자친구는 여자인 그의 애인이 그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고민을 하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삶의 무게를 덜어낼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가 죽은지 100년이 지난 후인 현대에도 다르지 않다.
권력의 정점에, 스타쉐프의 부엌에. 드라마속 신들의 전쟁속에, 대소사를 정하고 움직이는 것은 누구인가. 내가 변호사임에도 불구, 나에게는 여성변호사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계층을 나누는 것은 누구인가.
남자인 변호사들보다 2배의 노력을 더하고도, "형님-아우"사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변호사사회에서, 권력에서 더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그걸로도 2배의 만족을 해야하는 것인가.
단시 여자인 변호사가 "고정적인 수입과 자신만의 방"을 만들어도 내가 남자들이 만들어낸 견고한 건축물 속에 있는 한,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정적이라는 이유로, 인간관계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형님-아우"를 이길 수가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견고한 건축물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이 사회의 제도와 체계는 거의 남성들이 만든것이며, 나의 방을 견고하게 해봤자 그것 역시 처음 구조를 만든 이들을 더욱 견고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방하나 마저 갖지 못한 여성들과 스스로 비교하며 우월감에 빠져야 하는 것일까.
아직도 길거리에서 헤메는 여성들을, 지속적인 소득을 갖지 못한 여성들을, 혹은 남자와 같은 소득을 올리기 위해 몇배의 노력을 해야하는 여성들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방을 견고하게 만드는 법을 알았다면 다른 여성들에게 그것을 알려주길 바란다.
스스로 견고한 방을 만든 여성들이 많아질수록,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할 것이며, 우리들의 건축물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현대에 여자가 독립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버지니아 울프가 주장했던 "고정적인 소득과 자기만의 방" 이외에도 "여성들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날짜와 계절을 정확히 꼬집어서 1868년 4월 5일과 1875년 11월 2일에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그녀에게 묻는다면 그녀는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언제나 저녁식사를 준비했고 접시와 컵들을 닦았지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사회에 나갔습니다. 그 모든 일에서 남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사라져 버렸지요. 어떠한 전기나 역사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그럴 의도는 없더라도 불가피하게 거짓말을 하지요.
누군가가 날짜와 계절을 정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