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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 BOM Nov 16. 2024

[백수 16일 차]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상급종합병원 간호사 11년 차의 퇴사 후 기록 (4)

  30년이 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규칙적인 적이 없어서일까. 이제껏 카페인이 들어가지 않아도 말끔한 정신, 해가 떠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거의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루틴을 지키려 노력하는 일상을 실천한 지 2주 차가 지나가는 시점에서 '피곤해서' '졸려서' '버텨야 하니깐'이라는 마음으로 카페인을 찾게 되는 일이 거의 없었고, 햇볕을 한껏 쬐며 거실 한가운데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스트레칭을 할 때, 새가 짹짹이는 소리를 들으며 같은 차가운 바람이라도 해가 없는 저녁 시간보다는 조금은 더 따스한 오전 공기를 느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행복함을 느끼곤 한다. 러닝을 하더라도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뛰게 되면 러닝 코스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 자연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러닝머신과는 다른 트레일런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달까)


  오늘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한껏 느끼면서 백수 생활 세 번째 책이자 올해 28번째 책인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를 정리해 보련다. 참고로 책은 일전에 읽은 기억이 남아있는 고전 또는 이미 기억 속에서 잊힌 고전들을 다시 한번 철학적 관점에서 돌아볼 있게 해 주었다. 생각의 깊이가 더해지고 고전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달까. 이 책으로 하여금 다시 읽고 싶어진 고전이 생기기도 했다는 점만으로도 참 좋은 독서였다고 본다.


괴테의 파우스트 : 자기 체념에 대하여 / '신은 누구를 구원하는가?'

키르케고르는 오늘날 우리가 '실존의 3단 계설'이라고 부르는 사유를 전개했다. 인간의 성숙 단계를 심미적, 도덕적, 종교적 단계로 나누고 각각을 설명하기를, 먼저 심미적 단계란 인간이 감각적 쾌락과 욕망에 종속되는 원초적 단계를 말한다. 파우스트에서 자기를 유혹하는 남자와 즐기기 위해 어머니에게 약을 먹이는 그레트헨이 그러하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무절제한 욕망의 삶에 절망하며 내면으로부터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소리를 듣게 되며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는 도덕적 단계에 이른다.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에게 종교, 세례, 신에 대해 물으며 메피스토펠레스를 멀리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이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 단계에서 도덕이라 하는 엄숙한 요구에 따르지 못한 인간들은 다시 뉘우침을 통해 절망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의 절망은 실존적 나약함에서 나오는 절망으로 죄의식까지 이어진다. 죄의식이 나타나자마자 도덕은 뉘우침에서 좌절하게 된다. 뉘우침이라는 최고의 자기부정, 무한한 자기 체념은 인간을 종교적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은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할 수 있으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고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된다. 

"무한한 자기 체념은 신앙 앞에 전제되는 최후의 단계이다" - 키르케고르


괴테의 파우스트 : 자기실현에 대하여 / '악마마저 이겨낸 남자'

자기실현이라는 개념은 독일의 낭만주의자들로 구체화되었다. 구원으로 이어지는 자기실현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모범적인 예는 실러의 '인간 성장의 3단계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처음에는 정욕, 쾌락에 필연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필연의 국가'를 거친다. 이 단계를 미개한 상태라고 말하며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심미적 단계에 해당된다. 그다음으로 거치는 단계가 도덕과 법 같은 명령들이 지배하는 '이성의 국가'다. 미개하진 않지만 자신들이 만든 원리를 일종의 신으로 섬긴다는 점에서 야만적 상태라고 말하며 키르케고르는 '도덕적 단계'라고 칭했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의 인간 성숙 단계가 평행을 이룬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무한한 자기 체념'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반면 실러는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시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방법은 놀이를 하는 아이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최고의 자기 긍정, 무한한 자기 시현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실존적 인간'인 것이다. 

오로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현해 나가는 것, 바로 이것이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인간에 이르는 길이자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그대는 무엇을 하였는가" - F. 니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 성장에 관하여 / '질풍노도를 잠재우는 법'

헤세가 창조한 인류의 이상인 에바 부인은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주장하는 인간상에 해당된다. 그녀는 모성적이며 동시에 부정적인 존재로 융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내면에 있는 여성 원형인 아니마와 남성 원형인 아니무스가 통합을 이룬 존재이다. 융의 원형과 무의식에 의하면 정신의 성숙은 원형들의 통합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렇게 통합된 정신을 '자기'라고 불렀다. 분석심리학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의 실현으로 이루어지는 개성화에 있다. 독일 출신 정신의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내면에서 부성적 양심은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모성적 양심은 ~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자신에 말한다고 한다. 인간은 이러한 가지의 양심을 내면에 간직하으로서 복종, 성실, 절제, 인내, 책임과 동시에 자위, 자존심, 자유 등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균형을 이룰 성장의 진정한 의미를 이루게 되고 에바 부인은 이런 인간의 상징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알아내고 그 껍질을 벗겨서 진정한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자기실현을 이뤄낼 수 있다. 몇 번이고 주어진 자기를 부수고 죽을 것 같은 절망과 고통을 견뎌내야 자기 내면에서 대립하는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밖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 만남의 의미 / '관계의 미학'

사물의 세계에서는 내가 있어 우리가 있게 되는 것도 있지만 의미와 가치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게 된다. 부버는 <나와 너>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표현하였다. 어린 왕자에서 '길들이는 것', 부버가 말하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것만이 도시라는 사막에서 샘을 터뜨리고 외로움이라는 악령을 사라지게 한다. 오직 그것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한다. 인간과 세계의 참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나게 한다.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 - 마르틴 부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 질투에 관하여 / '사랑과 질투의 함수 관계'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현대인의 소유욕에 의한 신경증적 증상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통증, 사랑, 소망, 증오처럼 소유할 수 없는 정신적 대상까지 소유의 대상인 것처럼 하나의 물건으로 환원시키는 언어 습관에서 소유에 대한 현대인의 정신병리적 집착을 발견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을 소유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 대상을 구속, 감금, 지배하는 의미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압박하고 약화시키며 질식시켜 죽이는 행위가 되게 된다. 그는 이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말이라고까지 단정한다. 대신, 프롬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 함께 향유하는 사랑을 권한다. 갖는 사랑이 아닌 하는 사랑,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 이기적 사랑이 아닌 이타적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문제는 에로스, 소유 양식으로서의 사랑이 본능적이고 육체적이기 때문에 너무나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나머지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그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진동하며 갈 곳 몰라 헤맨다.

"사랑은 먼저 가혹한 괴로움이다" - M. 피치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 가정의 의미 / '가족에 관한 냉혹한 진실'

마르셀은 모든 인간다움은 가정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가정이란 이 세상에서 최초로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공동체다. 존재란 오직 공동존재, 나의 존재를 인정해 줄 너, 너의 존재를 인정해 줄 나, 즉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상호적 관계의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에 시원적 의미, 사랑의 공동체 안에 해당되는 가정에서 비로소 각각 나라고 부르는 가족 구성원들의 존재가 드러나며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가족이란 나의 존재적 확장으로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나의 고통과 불행이 가족의 고통과 불행이 되며 나의 기쁨과 행운이 내 가족의 기쁨과 행운이 된다. 가족을 통해 나는 세계 안에 함께 있는 공간적 확장을 깨달으며 가족과 내가 관여되어 있음을 느낌으로 시간적 확장을 경험한다.

이러한 관계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하여 우리가 사는 사회를 가족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대를 그의 어떠함으로 판단하지 않고 오직 그의 있음 자체를 존중하며 상대의 고통과 불행을 나의 고통과 불행으로 인식하는 것이 모든 윤리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가족적이어야 한다." - 가브리엘 마르셀


사르트르의 구토 : 일상에 대하여 / '참을 수 없는 일상과의 결별'

구토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고발, 그러나 실존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애매모호한 작품이다. 낯익은 사물과 세계가 갑자기 낯설고 흉축하게 보이는 특이한 현상으로 작품을 시작,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말하고 따라서 사는 대중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여분의 존재라고 규정하고 묘사한다. 이러한 일상에 대한 거부를 '구토'라고 표현, 구토를 반복함으로써 삶에는 아무런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이 저주받은 자유가 어떻게 보면 '위대한 의식의 순간'인 것이다.

후에 사르트르는 구속, 게약을 뜻하는 앙가주망이라는 말에 실존주의적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어떤 것으로 벗어남'과 동시에 '어떤 것에다 자기 자신을 잡아매야'한다고 했다. 키르케고르는 신에게 잡아매라고 한 대신 사라트르는 역사적 현실이 요구하는 사회문제에 잡아매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실천해 보였다.

"자신의 힘을 다하여 생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의미 있는 삶을 제외하면 삶에는 의미가 없다"
                                                                                                                   - 에리히프롬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 권태의 의미 / '텅 빈 무대의 대본 없는 배우, 인간'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베케트가 보여준 인간 상황은 하이데거가 규정한 그대로 '내던져짐'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에서 권태를 표면적 권태와 깊은 권태로 나누었다. 자기 자신이나 상대 때문에 생기는 이런저런 특수한 상황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지루해지는 것이 표면적 권태 또는 비본래적 권태로, 이런 권태는 그것에 대항하는 시간 죽이기가 가능하다. 비본래적인 일상에 몰입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권태를 잊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아무런 이유 없이 표현되는 무조건적 권태가 있는데 이것은 깊은 권태 또는 본래적 권태이다. 이 권태에 대해서는 시간 죽이기가 불가능하여 일상생활에 분주하게 몰입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 권태는 언제 올지도 모르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죽음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상황이 가진 근원적이면서도 숙명적인 권태이다.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실존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기획하고 그것에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자기, 본래적 자기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매 순간 본래적 삶, 비본래적 삶 사이에 서 있지만 우리는 그마저도 망각한 채 매일 시간 죽이기에 몰입한다.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 - 마르틴 하이데거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 반항의 의미 /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카뮈는 사막에서 벗어나려 하지도 말고 쓰러지지도 말고 그저 시지프스처럼 버티고 끊임없이 반항하라 한다. 병균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며 건강이 의지의 소산이듯, 부조리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부조리를 극복하는 것은 의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반항하여 버티다 보면 오랑에서 페스트가 물러가듯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거다. 다만 그저 버틴다고 해서 사막이 페스트처럼 물러갈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가끔은 사막 한가운데 있다고 느껴질 만큼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며 살아간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스스로에게 뭔가를 정하여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야콥의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보자. 빅토르 프랭클 박사 증언에 따르면 광폭한 사신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은 설사 해방군이 오지 않더라도 마치 오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거짓말했던 바록 그런 사람들이었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라도 삶에는 의미가 주어져야 한다" - 헨리 밀러


최인훈의 광장 : 유토피아에 대하여 / '그 섬은 어디에 있을까'

제3의 길은 모어의 유토피아와 베이컨의 신아틸란티스 그 가운데 난 길이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와 자유주의적 유토피아 그 사이에 놓여있는 자유가 보장된 평등, 평등이 전제된 자유, 경쟁이 보장된 협동, 협동이 전제된 경쟁, 사생활이 보장된 유대, 유대가 전제된 사생활을 추구하는 길이다. 이는 최인훈의 광장에서 밀실과 광장의 관계처럼 서로 상충되어 양 극단을 휘어 서로 만나게 한 칼날 같은 위를 걸어야 하는 것과 동일하다. 주인공 명준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 절망하여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로 뛰어들기 직전 희미하게나마 목격한 제3의 길이란 민주주의의 민주화, 손상된 연대성의 복구, 삶의 정치 개혁, 발생적 정치의 추구, 대화민주주의의 강화, 복지제도에 대한 제고, 폭력의 부정 등을 통해 전제 권력에 대한 대립, 절대적 상대적 빈곤가의 전쟁, 폭력과 고통의 감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 행복과 자기실현, 파괴된 환경의 구제, 생명 존중 등을 지향하는 머나먼 여정이다.

"자기 자신의 사적인 장소를 갖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한나 아렌트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 디스토피아에 대하여 / '당신들의 유토피아, 우리들의 디스토피아'

계몽주의적 유토피아란 그것이 사회주의적인지 자유주의적인지 상관없이 계몽된 어떤 이로부터 설계되고 추진된 것이며 획일화라는 폭력성을 갖고 있는 데다가 지배자 자신의 동상을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서 품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디스토피아를 만들 수밖에 없다. 유토피아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닫힌 사회가 가진 가장 나쁜 점은 폭력과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유토피아, 이상적인 사회 형태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은 합리적 방법으로는 타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목적에 동조하지 않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말살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수가 아닌 인간으로 남길 원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 열린 사회로의 길이 있는데 비판을 허용하는 자유 사회이자 전체주의에 대립하는 개인주의 사회이며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에 의한 급진적 개혁보다 점진적 발전이 보장되는 점진적 사회공학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로 가는 길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우리들의 천국을 향해 걸음씩 다가가는 거야말로 인간의 길이다.

"그런 때가 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섬이 끝끝내 실패하지 않으려면 그때는 결국 와야겠지요. 그게 아무리 시간이 올래 걸리는 일이라도" - 당신들의 천국 중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 인간공학에 관하여 /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에게는 행복과 안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유이다. 설사 불행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하 자유를 가질 권리를 인간은 원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행복과 안정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의 이러한 자유를 박탈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유토피아란 설사 그 이상이 아무리 훌륭하고 완벽하게 달성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할 자유를 빼앗는다면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이상사회가 아니다. 유전공학에 의한 선별과 사육, 인간 복제는 생명체의 본질인 자유, 인간의 무지에 대한 권리를 빼앗는다.

"인간에게서 미래를 박탈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행위로써 단 한 번이라도 저질러져서는 안 된다" - 한스 요나스


조지오웰의 1984년 : 사회공학에 관하여 / '빅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

전체주의란 이상사회 건설을 빌미로 국가가 감시와 처벌을 극단적으로 행사하는 사회 공학이다.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완전히 약탈하고 전체만이 있을 뿐 개인은 쓸모없다는 것을 증명하여 개인들이 스스로 소모되어도 좋다는 감정을 갖게 함으로써 희생을 이끌어내려 한다.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어떤 유토피아를 정하고 그것을 교육시키며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 때문이 이는 오직 폭력, 고통을 통한 인간성 말살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테러가 지배하는 정치형태로 규정한다. 때문에 그 이상에서 뿐 아니라 실현 방법도 이상적이어야 한다는 유토피아가 당면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아렌트의 경고와 더불어 전체주의에 대한 프롬의 충고를 덧붙이자면, 삶과 진리에 대한 신념, 개인적 자아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모든 사람에게서 고취시킬 있을 전체주의로 향하는 허무주의의 힘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유토피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적으로 있는 사회이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이상적이어도 인간성 자체를 변형시키거나 파괴함으로써는 만들어질 없다. 이상사회를 향한 어떠한 사회공학도 설계도를 미리 확정하고 그것에 인간을 맞추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획득하고 지켜온 인간성, 자유, 평등, 사랑, 고통과 폭력의 감소, 존엄성과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들을 향한 갈망에 합당한 설계도를 만들고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류는 과학과 예수를 창조할 지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은 정의의 세계, 형제애의 세계, 평화의 세계는 이룩하지 못하는가" - 레옹 볼룸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회상의 의미 /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

  인간의 삶은 회상에 의해서 언젠가 그 진실한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미완성의 어떤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어느 시점에서 드러날 진실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고 현재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완성될 진실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거다. 회상을 통해 미완성으로 남아 기다리고 있는 시간들의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되찾아 삶을 풍요롭게 하며 허무로 빠지지 않고 절망에 무릎 꿇지 않는 해방된 자아, 용기 있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하다.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 - 조르주 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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