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퇴사 후 기록(1) 말미에서 다음 편 글에서는 내 인생에서 중요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본다 해놓고는 그만 건너뛰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이를 주제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보자 한다. 먼저 많이들 그럴 테지만, 내 선택 영역 밖의 존재들인 부모님이 인생에서 중요했던 것 같다. 특히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태도로 공직 생활을 마치신 아빠의 경우, 성향이 달라 완전하게 쫓는 것은 무리였지만 가능한 한 아빠의 장점들을 많이 본받고자 했던 것 같다. 아직도 잊을 수 없던 일화를 꼽자면, 중학교 때 체육 수행평가로 구기종목이 있었는데 순발력, 운동 신경 모두 떨어지던 내가 축구/농구 골 넣기를 몇 분에 몇 개 이상 해내야만 했고 이를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했던 상황이다. 아빠는 충분한 설명에도 생각만큼 잘 따라오지 못하는 딸을 다그치듯 엄하게 훈련시키셨고, 이에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해내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소리 내어 울면서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질 때까지 축구 골대로 축구공을 여러 차례 발로 뻥뻥 차고 농구 골대로 수도 없이 많은 슛을 던지던 그때 그 시절 기억이 생생하다. 작은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 체육 수행평가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기에 무섭지만 확실하게 나를 훈련시켜 줄 수 있는 상대인 아빠께 도움을 요청했고 예상했던 대로 그 과정은 순탄치는 않았지만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다음으로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을 꼽자면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연락을 도통드리지 못하고 있는 고3 담임선생님이시다. 사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암흑기였다. 한결같이 성실한 태도로 다소 미련하게 학업을 이어오던 내가, 우연한 계기로 외국어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앞날을 내다보는 진지한 고민을 하지 못한 게 신의 한수이다. 외국에서 살다오거나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외국어 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다른 친구들과 우열을 가려야 하는 상황의 연속에서 그저 한없이 땅굴을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땅굴 속에서도 여느 다른 대한민국의 학생들처럼 고3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고 첫 고3 면담을 할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진로에 대해 마치 점을 찍어주듯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나에게 처음 언급해 주셨다. 뼛속까지 문과 성향인지라 당시로서는 감히 생각해보지 못한 직업이었고, 어렸을 적 뭐든 가능할 줄 알았던 시절에도 '의사'라는 직업만큼은 너무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 무게에 배제를 시킬 만큼 '의학'이란 나에게 마음에 없던 분야였다. 당시 면담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고 넘겼지만 막상 수능 성적이 나오고, 점수에 맞춰 가야 할 학교, 학과를 정할 때 학년 초 면담 때 선생님께서 권한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결과 간호학과로 진학, 바로 얼마 전까지 간호사라는 직업을 11년 동안 할 수 있었다. 간호사란 의사처럼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할 일은 많이 없지만, 내 성향처럼 엄청난 끈기와 성실함,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정말 힘든 일이기에 당시 선생님께서는 어떤 이유로 나에게 간호사라는 직업을 권하셨는지 나중에라도 묻고 싶어졌다. 어찌 되었든 간호사가 되는 과정, 간호사로 일하는 과정 모두가 쉽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인생을 살고 싶었던 나에게는 직업 생활을 하며 그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최상의 직업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로 나에게 이런 길을 열어주신 선생님이 인생에서 참 중요했다는 생각이다. 마침 일을 관둔 상태라서 지금이라도 연락을 드려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기에는 시기가 적절하진 않다고 생각되지만, 인생 제2막 시작의 길을 걷게 될 때만큼은 선생님께 꼭 먼저 연락을 드리고 싶다.
또 한 사람이 떠오른다. 퇴사 직전에도 몸담고 있는 부서 사람들을 제외하고 감사함을 전할 만한 사람이 없을지 떠올렸을 때 딱 떠올랐던 분. 바로 직전 내과 부서에 있을 때 부서장님이다. 처음 신규로 입사했을 때는 함께 부서에서 평간호사로 일하던 선생님으로 알게 된 인연도 11년에 달한다. 이 선생님이 다른 부서 부서장으로 승진하시면서 떠나실 때 주신 편지를 얼마 전에 다시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나를 닮아 눈물이 참 많은, 그렇지만 그거 참 좋지 않은 버릇이라며. 눈을 부릅뜨고 참으면 또 참을 수 있게 된다며. 일은 많이 느리지만 차차 하나씩 배우고 익혀가다 보면 앞으로 더 많이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진심 어린 당부가 적혀 있던 편지였다. 이 편지가 서로 인연의 끝인가 싶었는데 다시 원래의 부서로 돌아오셔서 부서장을 맡으셨다. 그때 내가 많이 힘들어서 퇴사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간 꽤 오래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정신과 안정병동'은 경험하지 않아도 후회가 되지 않겠느냐며 나를 붙잡으셨다. (그때 붙잡히지 않았다면 나는 조금 더 일찍 보건 교사를 하고 있으려나? 그땐 너무 일이 고되고 힘들어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던지라 또 어떻게 내 인생이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시기적절하게 TO가 있어서 부서장님의 도움으로 정신과 안정병동으로 부서 이동을 거의 곧바로 할 수 있었고, 그로 하여금 임상에서 일하며 행복했던 기억들을 많이 만든 채 6년 뒤인 지금은 후회 없이 임상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신과 환자들을 대하며 사람에 대해 알고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환자, 직원, 다른 일반인 대상의 교육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남을 가르치고 이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때 진정으로 뿌듯하며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였다. 이는 앞으로의 행보를 정하는데도 큰 영향을 주었으니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붙잡아주시고, 이동에 도움을 주신 전 부서장님께 정말로 감사했다. 다행히 퇴사 전 이런 마음을 편지로나마 전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지금 나의 배우자이다. 우리의 첫 인연은 다들 말하면 놀랄 정도로 좀 신기하다. 요새야 흔하다고는 하는데 각자 소개팅 어플을 깔고 처음으로 성사된 채팅방에서 만남을 기약, 그렇게 만남을 이어가다가 사귀는 사이로 진전이 있었고 결혼까지 이어진 것이다. 채팅방이 열리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표현하면 되는데 아마도 그때 어플에 올려둔 남편의 사진 속 모습이 말끔하면서도 편하게 다가와서 호감을 눌렀던 것 같다. 지금도 자주 듣는 말이 '오누이 같다, 남매 아니냐'일 정도로 우리는 서로 많이 닮았고, 그만큼 첫 만남의 어색함도 덜했으며 설렘과 동시에 느껴지는 편안함이 인상적이었다. 벌써 결혼한 지는 3년 반이 넘어가는, 서로 알게 된 지는 6년이 다 된, 어찌 보면 오래된 인연이면서도 크게 싸우는 일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데는 함께할 때의 편안함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나 싶다. 서로의 취향은 달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줄 수 있고, 서로의 가치관만큼은 크게 어긋나지 않으며, 상대에 대한 이해, 배려를 서로가 서로에게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 것 같다. 이런 평생의 인연을 만나게 된 것이야말로 행운 아닐까. 너무 익숙해져서 당연하게 여기기보다 존재 자체가 행운이라며 소소한 감사함을 표현하는데 인색해지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