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엔 늘 큰 일, 아니 크다고 생각한 일들이 가득했다. 국가와 민족, 이웃에 헌신, 시대적 사명과 정의를 위해 쓸 시간도 부족한 판에 먹는 데에 공을 들인다? 그건 이기적 욕심이라 생각했다.그러니 밥은 최소한의 양으로 재빨리 먹어치울 소품일 뿐이었다. 1분이라도 아껴서 일에 복무하고 이웃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밥을 배척하며 자기만족에 빠져 사는 동안 애먼 피해자가 생겨났다. 바로 나의 남편. 그는 결혼 후 10년간 순전히 밥 때문에 속을 끓였다.
'삼시다섯끼를 먹자는 것도 아니고 남들 다 하는 삼시세끼만 먹겠다는 건데? 그저 부부가 마주 앉아 따뜻한 밥 한 술 뜨길 바랐을 뿐인데, 아내한테 밥타령하는 사람 취급을 받다니?'
무척이나 억울했을 것이다.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지금은?
"배 안 아플까? 당신 속 괜찮겠어요? 너무... 먹는 것 같은데?" 남편의 염려를 한 몸에 받고 산다.
'알약 한 알? 무슨 그런 쓸데없는 소릴? 밥 먹는 시간이 이리 즐거운데?'
노래를 부를 정도다. 중년여성에겐 최악이라는 '뚱보균'과는 사이좋게 동거 중이다.
나아가, 한 끼의 밥상을 차려내고 먹고 나누는 행위가 인간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깨우쳤다. 중년이 돼서야 그걸 알아차렸으니 '밥 늦둥이'가 맞다.
이제라도 食 의 가치를 알아차려 다행스럽고, 과거(?)를 속죄하는 차원에서, '食 관련 좋은영화' 리스트를 냉큼 올리려 한다.
순전히 내 입맛대로 열 편을 추려냈다. '무엇을 먹는가' 보다는 '누가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었는가?', '그래서 먹는 자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나?'라는 색안경을 끼고서.
* 사족(이라 하기엔 조금 길쭉함. 바쁜 독자는 통과 바람.)
: 이번 리스트 정리 작업을 하면서 알아차렸는데, 食 관련한 우리 영화가 너무 적었다. 내 시야를 피해 숨어 있는 작품들이 있다면 할 말 없지만. 동영상 콘텐츠 시장에 대형 먹방 유튜버들이 범람하는 현상에 비하면... 의외의 결과였다.
그에 비해, 일본산 음식 영화는 덜어내야 할 만큼 많아 보인다. 이유를 잠시 헤아려 봤다. 일본 사람들이 자기네 문화소산물을 되게 있어 보이게 포장하는 기술이나 자부심이 큰 것은 아닐까?
일식을 실제로 먹어보면 눈으로 봤을 때에 비해 만족도가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저들은 상품화에 눈이 밝은 모양이다.
배가 아프다. 우리 정부가 일본에 호구 되길 자처하는 요즘, 내 배는 심히 꼬인다.
각성하고, 우리도, 아니 우리야말로 우리네 먹거리를 멋지게 포장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과하게 겸손을 떠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것'을 낮게 여긴다랄까? 한국영화 제작환경에 보탬이 되어주진 못하지만, 향후로는 食 관련 우리 영화가 간헐적으로라도 제작되길 꿈꿔본다.
1. [바베트의 만찬]
감독 / 가브리엘 액셀
주연 / 스테판 오드랑
제작연도 / 1987
제작국가 / 덴마크
러닝타임 / 102분
원작 / 이자크 디네센의 동명 소설
*이 영화를 꼭 봐야 할 사람*
1. '요리는 예술이다!', '정성으로 빚어낸 맛있는 음식은 치유하는 힘을 갖는다'라고 믿는 이.
2. 덴마크 시골 바닷가 마을의 풍광이 궁금한 이.
3. 프랑스식 풀코스 요리를 보고 싶은 이.
4.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좋게 본 사람.(그 영화의 원작가 역시 이자크 디네센)
19세기말, 덴마크의 시골마을. 종교적 규범과 금욕주의가 지배하는 오래된 동네. 변화나 새로움을 싫어하는 어른들. 이 정도를 기본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라면? 딱 무채색 분위기다. 실제로 영화 전반부는 생기를 잃어 보인다, 바베트를 만나기 전까진.
바베트는 정치적 이유로 망명하듯 이 동네에 발을 들인다. 마을의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고인이 된 목사의 두 딸 집에서 시종으로 지내게 된다. 청교도적 소박함과 근엄에 젖어 살아온 마을 사람들은 바베트의 정성스러운 음식과 따뜻한 언행에 조금씩 물들어간다. 그렇게 수년을 지낸 어느 날, 바베트는 1만 프랑이나 되는 복권에 당첨된다. 돈을 들고 파리로 떠날 수 있었지만, 바베트는 그 돈을 몽땅 식재료 사는 데 써버린다. 그리고는 마을 사람들을 프랑스식 만찬에 초대하는데...
그냥 먹거리가 아니다. 최고의 경험으로 다져진 아름다운 손맛에 정성이 더해졌다. 난생처음 맛보는 낯선 요리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린다. 프랑스식 요리는 사악하다는 편견도 녹아내린다. 우울함도 짜증도 두려움도 미움도. 겉으로만 이웃인체 살아온 이들이 서로 손을 잡는다. 둥그렇게 돌면서 춤을 춘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고백한다. 그 순간. 그들 사이엔 천국이 이루어진다.
이 영화에서 바베트의 '만찬'이 빛나지만, '바베트' 자체도 빛난다. 복권에 당첨되기 전에도 그는 나이 든 자매(목사의 딸들)를 무보수로 정성껏 섬겼고 주변 이웃들에게도 한결같이 대했다. 삶과 인간을 향한 태도가 일단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그런 태도에서 최고의 만찬 작품이 나올 수 있었으리라.
영화의 끝부분에서, 당첨금을 다 써서 이제 어떡하냐는 질문에 바베트는 이렇게 답한다.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아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요. 비록 복권은 5천 원짜리도 당첨되질 않지만, 예술가의 정신은 결코 가난하지 않죠."
2. 어나더 라운드
감독 / 토마스 빈터베르그
주연 / 매즈 미켈슨
제작연도 / 2020
제작국가 / 덴마크
러닝타임 / 116분
원제목 / DRUK (drunk)
* 이 영화를 꼭 봐야 할 사람 *
1. 무기력과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픈 중년
2. 술에 취한 사람을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이
3. 덴마크 배우 매즈 미켈슨한테 호감을 갖는 이
4. 술의 다양한 장르가 궁금한 이
주인공 마틴의 첫 표정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세상 어디에 내놔도 1등 먹을, 찌질하고 심드렁한데 무표정까지 장착한 얼굴이다. 굳이 덴마크로 가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서 빈번히 마주치는 얼굴이기에 전혀 낯설지 않은.
그런 표정을 한 아저씨 넷이 둘러앉는다. 고등학교 교사들이자 친한 벗들이다. 심리학 교사인 니콜라이의 마흔 살 생일맞이 식사 중에 그들은 '인간은 혈중 알콜을 0.05% 로 유지하면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스코루데루 가설의 진위 여부를 실험해 보기로 한다. 그 정도의 알콜 섭취로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다? 안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실험 초반엔 기적처럼 일상이 되살아난다. 목소리 톤이 달라지고 제자들을 향한 열정도 뜨거워진다. 역사 교사로서 엉터리 수업을 진행해서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항의를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마틴은 어느새 학생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는 인기 교사로 변모한다. 신실한 아내 아니카와도 젊은 시절의 뜨거운 사랑을 되찾은 듯하다. 하지만 관객이 예상하듯, 술은 계속해서 '한 잔 더(another round)'를 부른다. 실험의 수위가 올라가고 독한 술을 마시고 또 마시면서 만취한(drunk) 이들 이들의 일상도 마구 흔들리는데...
이런 감상 포인트, 어떨까?
- 혈중농도 0.05가 부족하다는 가설에서 보니, 그들 네 사람은 모두 뭔가 확실히 부족해 보인다. 아니, 부족한 게 아니라 잃어버린 것들이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네 사람이 각기 무엇을 갈구하고 원하는지를 살펴본다.
- 덴마크와 우리나라의 술문화가 각기 다름을 감안하고, 영화의 시작은 고등학교 학생들이 팀 대항으로 맥주 마시며 달리는 게임으로 정신없다 혹은 활기차다. 영화의 끝은 술을 극복하고 '적당히' 술을 마신 마틴이 재즈댄스를 춘다. 단단하고 생기 넘친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채워주는 그 두 가지 지점을 비교하면서 본다.
- 주인공 마틴 역의 매즈 미켈슨에 입덕할 수 있을까? 엔딩씬의 춤 장면은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한다. 아저씨가 비상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참, 당신의 '한 잔 더'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자신의 부족한 0.05%를 메꾸기 위해 몰입하거나 중독되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 특히, 가슴속 어딘가 뻥 뚫린 것 같은 중년들이라면 더욱.
3. [461개의 도시락]
감독 / 카네시게 아츠시
출연 / 이노하라 요시히코, 미치에다 슌스케,
제작연도 / 2020년
제작국가 / 일본
러닝타임 / 119분
원작 / 와타나베 토시미의 동명 에세이
* 이 영화를 꼭 봐야 할 사람 '
1. 나름 최신의 일본 음식 영화를 보고 싶은 이
2. SNS에 먹거리 인증샷 올리는 이
3. 계란말이를 좋아하는 이
4. 저자극&착한 맛의 가족애에 관심 있는 이
우리 사회에서 갱년기와 맞짱 뜰 수 있는 유일한 나잇대인 15세. '중2병'에 걸릴만한 주인공 고우키. 부모의 이혼, 갑자기 시작된 뮤지션 아버지와의 동거 그리고 유급. 이 정도면 얼마든지 '질풍노도의 사춘기' 증세를 만방에 떨칠만한데, 고우키는 기특하게도 1년을 잘 버티고 졸업한다. 한 해 꿇고 들어간 고등학교 생활은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기특하게도 3년을 잘 견뎌낸다. 아니 즐기는 수준이 된다.
'어떻게 가능하지? 뭐 이런 순둥순둥한 아들이 다 있지?' 의구심이 들지만, 아빠 카즈키가 3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들을 위한 도시락을 쌌다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그것도 그냥 도시락이 아니라, SNS상에 올리면 '좋아요'를 막 누르게 만드는 예쁜 비주얼과 스토리의 도시락이라면? 뮤지션 아빠가 공연과 음악활동만으로도 바쁘지만, 아들한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고단함과 바쁨이 달려들더라도 나는 아들을 위한 도시락을 싸고 쓰러지겠노라' 하는 투지를 발휘한다면?
아빠 카즈키는 본래 요리를 하던 아빠가 아니다. 평소에 아들과 소통을 잘하는 아빠도 아니었다. 음악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혼 후 자신에게 닥친 양육의 현실 앞에서, 아들을 위해 보여줄 수 있는 사랑 전부를 도시락에 담아내는 과정이 놀랍도록 교훈적이다.그렇다고 뭔가 뜨거운 대화가 오가고 극적 화해가 일어나는 식은 아니다. 잔잔하고 일상적이라서 오히려 낯설 지경이니까. 그저 하루하루 아빠의 도시락 개수가 늘어나면서, 물에 스르르 젖어들듯이, 카즈키와 고우키는 동반 성장한다. 물론 두 사람이 애를 많이 써서 즐탁동시를 맛보았지만, 영화 구석구석에 포진한 조력자들 덕분에 가능한 여정이었다,이웃이 함께, 아빠와 아들을 키워낸다. 그 지점들을 목격하는 재미가 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