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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정원 Jun 21. 2021

길, 굽이굽이 그러나 멈추지 않는

느닷없이 주어졌던 semi 은퇴의 시간을 돌아보며

#공심재 #신나는글쓰기


미션: 길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오늘 미션은 인생이라는 길에서 여러분이 만난 중요한 순간, 갈림길, 선택을 생각해 봅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과 그 결정적인 순간에서 어떤 결정을 하고 지금까지 살아오게 됐는지, 여러분만의 소중한 결정, 인연, 방향을 생각해 보고 글을 씁니다.


길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이라는 프레임에서 갇혀 있지 말고, 길의 의미를 여러 방향으로 확장해보시기 바랍니다. 생각이 자유롭게 춤추도록 해주세요. 마치 길을 걸으며 나를 잊어버리듯이. 조르바가 춤추듯이.






  길을 잃었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잘 살아왔다 생각했었는데, 나이 서른 여섯에 몇 개월의 임금이 체불된 채로, 유니콘을 꿈꾸던 스타트업에서 결국 퇴사를 했다. 나오고 보니 중소기업도 아닌 그야말로 '소기업'이었던 곳에서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열정을 다해왔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곱씹다 보면, 대학교 전공 선택부터 시작해서 왜 겁도 없이 이 작은 회사에까지 왔는지 등 지금까지 해온 거의 모든 선택들에 대해 자책하는 내 자신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월급은 못 받는데도 '재택근무'라는 이름으로 1분 대기조처럼 대표로부터의 연락에 신경을 곤두세워야했던 게 가장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갖고 있던 서비스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이대로 끝내면 내 경력이 너무 애매해질 거라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끊지 못했던 고용관계였다. 그러다 퇴사를 하고 보니 마치 그동안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고무줄이 '탁'하고 끊어진 것 같았다.


  항상 무언가 '과제'가 주어졌던 삶에서 벗어나니 '오늘은 뭘 하지?'라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던 퇴직 이후의 삶인데, 끝이 정해지지 않은 자유에서부터 비롯된 시간의 무가치함과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 오는 무기력함을 진하게 맛보았다. 바쁠 때 더 많은 일을 한다고 하지 않던가. 바쁜 일이 사라지니 오늘 할 일은 내일 해도 되고 모레 해도 상관이 없었다. 적절한 긴장감과 마감기한이 사라진 시간은 축복이 아니라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벌과도 같이 느껴졌다. '아, 이래서 퇴직한 후에 우울해지는 건가?' 가족들이 일상적으로 묻는 '오늘은 뭐 해?'라는 질문에 '오늘 하루' 뭘 하며 보낼지를 생각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다행히 그동안 일했던 시간이 있어서 실업급여 보장기간은 7개월이나 되었다. 이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있었기에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자유의 시간을 조금은 누릴 수 있었다(아니, 어쩌면 그동안 과녁으로 생각했던 목표가 사라진 공허한 마음을 달랠길 없어 그저 멍하게 있었던 시간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어떤 날은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하며 풀, 나비, 꽃들을 한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벤치에 앉아 책도 읽었다. 그러다 어느 만큼 시간이 지났나 싶으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넷플릭스로 그동안 미뤄뒀던 드라마를 보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동안은 그저 미래로부터 오는 불안을 거부하고 나에게 자유를 선물하기로 했다. 이유야 어찌됐건 아무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 내게 주어졌다는 게 한편으로는 참 좋았다.


  '일단 당분간은 좀 쉬자'


  종종 엄마가 쉬는 날에는 미리 일정을 맞춰 근교 수목원에 가서 쉬엄쉬엄 산책도 하고, 근처 맛집에서 여유롭게 식사도 했다. 늘 가족과 모이는 때는 주말뿐이었는데 평일이라 사람도 적고 서늘한 봄날씨 덕분에 소소하게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점점 그 잉여로운 생활에 대한 지겨움과 함께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금 내 나이에 다시 취업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연봉과 직무로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대로 캥거루족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이따금씩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일부러라도 외면하려 노력했다. '지금까지 잘해왔고, 잘할 수 있고, 잘 할 거야'라는, 조금은 고집스러운 다짐을 하며 마음을 컨트롤했다.

 

  그러던 중에도 주위에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잠이 잘 오지 않는다는 나의 말에 언니는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에센셜 오일을 사다 줬다. 물론 '네가 너무 잠못잔다고 시끄럽게 굴어서 빨리 재우려고 사왔다'며 츤데레스러움을 발휘하긴 했지만ㅋ. 불안감이 들기도 하고 이래도 되나 하는 의심이 들 때면 남자친구는 '인생에서 언제 또 이런 시간이 오겠냐'며 충분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내가 생각했던 구직의 마지노선은 6/15이었다(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지만 실업급여 수급기간 1/2 이내에 취업을 하면 1년 뒤에 조기취업장려금을 준다고 해서…;;). 그래서 5월 말 즈음 창업이라도 해볼까 하며 약간의 조바심을 냈었지만 '에잇, 그것 조금 욕심내다가 조바심 때문에 앞으로의 커리어를 망칠 순 없지'하며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후련했다. 9월까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 더 있으니 충분히 고민하고 제대로 준비해서 정말 원하는 직무, 원하는 조건에 맞는 곳에 가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웹개발 과정을 화상 강의로 수료했고, 원어민과 zoom으로 영어회화 수업도 꾸준히 해 왔고, 군산과 제주도를 여행했다. 최근에는 24회나 되는 화훼장식기능사 실기 과정도 마무리가 됐다. 특히 이 과정은 주3회 오프라인 강의라 몸이 매이는 느낌이 많았다(그동안 주5일 출근은 어떻게 했나 싶을 정도로ㅋ). 그러면서 틈틈이 지원서도 내고 면접도 봤었는데,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있으니 놀 수 있을 때 놀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와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정말 특별한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시작된 우리의 여행이었지만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한라산 영실코스에 올랐고, 지금이 제철인 수국도 보았고, 에메랄드빛 맑은 바다도 마음껏 눈에 담고 왔다.



영실탐방로를 지나 윗세오름 대피소로 가는 길. 이때까지는 면접 날짜도 잡히기 전이라 한껏 해맑ㅋ



  원서 냈던 곳의 면접전형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제주도에서 돌아온 다음 날 면접, 그리고 그날 바로 합격통보를 받았다. 조금은 떨떠름 했다. 가고 싶은 곳이기도 했고, 하고 싶은 직무이기도 하고, 원하는 연봉까지도 맞춰준다고 하는데, 왜일까? 몇 군데 더 지원한 곳이 있는데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일까? 아니면 화장실 갈 때 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좀더 나은 곳을 두리번거리는 마음일까? 스타트업에서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해놓고 또 스타트업으로 가도 될지에 대한 염려일까? 


  다행히 미리 접수해 놓은 자격증 필기 시험 날짜를 배려해줘서 7월부터 출근을 하기로 했는데, 위의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여전히 마음 한 켠이 시원치 않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어디든 나를 인정해주는 곳이 있으면 감사히 여기며 가려고 했는데, 공이 내 쪽으로 넘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드니 이것저것을 재려고 한다. 어쨌든 나쁘지 않은 조건으로 제안을 해준 이곳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고 또 당분간은 열심히 일을 해보려 한다.





  방황이라면 방황이고 휴식이라면 휴식이었던 4개월 남짓의 기간 동안 'semi 은퇴'를 경험하며 느낀 점이라면, 좀 더 다양한 것들에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야겠다는 것이다. 완전한 은퇴 후의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 관심 있는 것들을 더 확장해야겠다. 그렇지 않고서 맞이하는 은퇴란 매일이 고역일 수 있다. 또한 큰 목돈이 아닌 '정기적인 수입'이 정말 큰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경험했다. 노후에 내가 하고 싶은 취미활동을 하며 가족들과 소소한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일정 금액 이상의 연금을 꾸준히 받을 수 있도록 은퇴계획을 잘 세워야겠다. 생각보다 '큰 돈'이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오랜 기간'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므로.

   

  이 기간에 '신나는 글쓰기 모임'을 통해 영화 <노매드랜드>를 본 것도 삶의 여러 모습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단순히 노매드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동경만 있었지 실제 그 삶이 어떤지 상상해보지 못했었는데, 참으로 리얼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나고 보니 너무나 이불킥스러워 비공개로 바꾸어놓았지만 블로그에 글을 쓰며 내 감정과 마주하고 쏟아내며 방황의 시간을 지나온 것이 나름의 수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미숙하지만 글쓰기라는 행위를 계속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내게 주어진 삶의 선택지들이 항상 '행운의 열쇠' 카드일 수는 없어도, 내 손으로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정도의 건강과 작은 땅(일터)이 주어진다면 그것으로 자족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던가. 지난 4개월이 내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사람들과 내게 중요한 것들을 조금은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새로운 발걸음을 떼기 전, 조금은 느닷없이 주어졌던 휴식의 시간을 잘 정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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