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석은 핑크뱃지를 위해 비워주세요 :)
배가 어느덧 불러와 앞에서 보면 누가 보아도 배 속에 아기가 있다고 느껴질 만한 27주 차 임산부가 되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둘째 때에는 뱃속에 아가가 들어있다는 느낌이 더욱 실감 난다.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볼 때, 심장 소리를 들을 때에도 느껴지는 바가 확연히 다르다. 심장이 쿵쾅 거릴 때에는 그 소리가 손 끝으로 전해질까 싶어 배 아래쪽에 손을 대어보기도 하고, 한 번씩 배가 꿀렁거릴 때마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아가가 기특하다.
임산부에게는 임산부가 더 잘 보인다고 하던가. 길에서든, 지하철 안에서든, 시장에서든, 가방에 대롱대롱 핫 핑크색 임산부 배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속으로 내심 반갑다. 왠지 모를 응원도 하게 되고, 배 크기를 보며 몇 주차쯤 되었을지 가늠해보기도 한다.
지하철을 타면 감사하게도 임산부석 자리가 비워져 있을 때가 많다. 많이 걷거나, 아이와 함께 동행하는 날에는 이 임산부 자리가 못내 반가워 넙죽 앉는다. 이제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어 내 가방에 달린 임산부 배지를 보면, 화들짝 놀라며 핑크색 자리에 잠시 앉아있다가도 비켜주기도 한다.
하지만 임산부 커뮤니티를 보면 임산부 자리에 대해 많은 임산부들이 고충을 토로한다. 자리가 비워있던 적이 드물고 대부분 누군가 앉아있다고들 한다. 가끔씩 아저씨가 앉아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화를 잠시 누르며 이 구절을 떠올려본다.
김소연 시인 <한 글자 사전>에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을 ’씨‘라고 말한다.
길을 걷다 보면 모종을 파는 트럭이나 작은 가게들의 입구 앞 작은 화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4월이다. 작은 텃밭에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고 물을 주며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은 아름답다.
동그랗게 나온 뱃속에 아가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우리는 겨우 가늠할 뿐이지만 내 안에 작은 씨앗이 자라고 있는 뿌듯한 마음으로 오늘도 핫핑크 임산부는 길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