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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Feb 19. 2024

반투명 캡슐 속의 삶

영화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2023> 감상문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다는 것은 루틴 같은 일일 수도 있고, 때로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 저번주, 나는 이곳 바이로이트의 영화관에서 두 번째 영화를 보았고, 이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독일에서 독일인과 함께 독일인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는 삼 박자가 어우러지는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본 영화는, 빔 밴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였고, 이는 <베를린 천사의 시> 다음으로 (역시나) 두 번째로 본 그의 영화이기도 했다. 한편, 나는 이 영화를 같은 과의 베를린 출신인 아나톨과 보았는데, 나 역시 작년 한 해를 베를린에서 보냈으므로, 베를린이라는 공간에 대해서도 삼 박자가 맞는 순간이기도 했다. 


 영화를 본 날은 하루 종일 비가 왔고, 나는 우산을 쓰는 대신 방수가 되는 외투와, 작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산 비니를 쓴 채 고독하게 비를 맞으며 영화관에 도착했다. 아나톨 역시 몇 분 후 극장에 도착했다. 나는 그에게 극장에서 영화를 본 지 얼마 만 이냐는 질문을 했고, 그는 아마도 6개월쯤 전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당시의 상황과 지금이 아주 비슷하다고, 왜냐면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고, 독일인이 아닌 사람과-정확히는 헤어진 연인-과 <오펜하이머>를 보러 갔었는데, 영화가 독일어 더빙인 바람에 곤혹스러운 경험을 했다는 것. 마지막의 상황은 나와 아나톨의 기대와는 달리 첫 대사가 더빙임을 알아챈 순간 재연되었고, 우리는 탄성을 뱉었다. 


 영화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조금만 더 아나톨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나는 그가 스테레오 타입으로서의 베를리너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예술적 감각이 느껴지는 베를리너라고 생각한다. 적당히 낡고 새끈한 느낌의 자전거를 타고, 벼룩시장에서 산 멋진 외투를 비 오는 날-사실 겨울학기엔 비가 많이 와서, 비가 오지 않은 날을 세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에 입고, 그리고 가끔씩 자신이 직접 만든 테크노 음악을 들려주는 아나톨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성을 맘껏 분출해 내는 것 같아 이상한 일치감을 느끼기도 했다. 오늘 감상평에서도, 영화를 본 뒤 아나톨과 나눈 대화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뽑아 정리할 예정이므로, 이번 글만큼은 그의 지분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첫인상


 <퍼펙트 데이>는 <큐어>와 <쉘 위 댄스>로 유명한 야쿠쇼 코지가 주연을 맡았다. 그의 연기력은 익히 다른 영화에서 확인했던 터라,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할 준비를 마쳤다. 영화는 주인공 ‘히라야마’의 일상생활로 시작된다. 도쿄에서 화장실청소부로 일하는 주인공의 하루를 따라가면서 영화는 거의 대사 없이 진행됐다. 아침에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고, 루틴처럼 면도를 하고, 자신이 기르는 식물에게 물을 주고, 그런 뒤에 집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하나 뽑아 차에 몸을 싣는다. 그는 운전을 할 때마다 올드 팝송을 듣는다. 화장실에 도착해서는 능숙하게 일을 시작한다. 더러운 부분을 손거울까지 써가며 철저히 닦아내고, 호텔 화장실처럼 깨끗이 정돈한다. 영화는 그렇게 그의 며칠 간을 따라간다. 카메라 각도의 변경이 없었다면, 아마도 관객들은 동일한 영상을 반복해서 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생활은 변하지 않는 루틴 그 자체다. 


일을 마치고 온 그는 영업개시 시간에 맞추어 동네 목욕탕에 가서 더러워진 자신의 몸을 게워내고,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지하철 역 안의 자신의 단골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선 자전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낡은 서적을 읽으면서 잠에 든다. 그래서 어쩌면 그가 하는 일은, 더러워진 것을 깨끗이 만든다는 의미보단, 다시 화장실을 깨끗한 상태로 ‘초기화’함으로써 자신의 루틴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현재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루틴이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가 반복될 것이란 뜻이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의 과거를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행동으로 보건대, 올드팝송, 흑백사진과 낡은 서적 같은 아날로그 감성을 그가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나는 그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독일인 감독이 일본의 현대사 흐름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단순히 과거의 그 시점에 태어났다는 사실 외에도, 과거 버블 이전(1980년도)의 분위기를, 혹은 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웃돈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카세트테이프를 팔지 않았고, 오래된 책들을 중고서적에서 구입했을는지도 모른다. 


 
 나무와의 교감들


 영화에서 그는 ‘나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집에서 키우는 작은 화분들도 일을 하며 돌아다니다 발견한 작은 묘목들은 옮긴 것처럼 보이고, 나무의 사진을 찍고, 나무로 만들어진 책들을 매일 밤마다 읽는다. 나무라는 객체가 가진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자연 그 자체로서 인간에게 쉴 그늘을 만들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늘’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서는 뒤에 다루도록 하자. 그는 그늘 아래의 공간을 가장 편하게 여긴다. 그가 점심을 매일 그곳에서 먹는다는 설정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나무를 품고 있는 공간들이 도시에 사는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안정을 느끼는 공간인 것이다. 한편, 그의 주변에는 노숙자가 있다. 그의 행동을 보면 그 역시 나무 자체인 느낌이다. 나무에 달라붙어 물아일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햇볕을 쬐며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은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를 가진 나무의 이미지다. 


 그의 직업이 화장칠 청소부란 것도 나무와의 연결지점이다. 식물이 거름과 물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화장실에서 거름과 물을 다루는 행위 역시 흥미롭게 다가온다. 한편, 그의 주변엔 전망대인 ‘스카이 트리(Tree)’가 있다. 그는 그것을 보려면 차 안에서 고개를 기울인 채 눈을 찌그려 뜨려야 한다. 이 높은 탑은 그에게 있어서 인공물이라는 점에서 나무의 대척점이고, 새 시대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아날로그의 반대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지속적으로 그것을 보는 행동을 함으로써 한쪽으론 그것을 동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면에 붙어 높은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그지만, 마음 한 구석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싶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도시를 제대로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투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Perfect


 언뜻 보면 그는 자신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며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완벽’해 보이는 나날동안 내가 주목했던 것은 ‘그가 웃는 순간’이었다. <퍼펙트 데이>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일상생활에 작은 사건들이 끼어드는 것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화장실에서 의기소침하게 앉아있는 아이를 다시 엄마에게 데려다준다던가, 자신과 교대근무로 일하는 젊은 남자와 그가 관심을 가지는 여자와의 일화 그리고 점심을 먹을 때마다 마주치는, 은행원처럼 보이는 여성과의 어색한 눈 마주침 같은 순간들. 


나는 그런 순간에서 그가 밝게 웃거나 평소보다 다른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그가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되는 순간은 나무 밑에서 햇빛을 볼 때나, 단골집으로 가는 식당에서 다른 사람들을 볼 때, 그리고 따뜻한 탕에 들어가 몸을 풀 때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 각도가 가장 커지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루틴’에서 벗어나는 예상치 못한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외로움’이라는 주제와 이어진다. 예컨대, 우연히 청소를 하다가 발견한 종이에서, 누군가가 마방진 게임을 시작한 것을 보고 조심스레 자신의 다음 수를 놓고, 그다음에 방문했을 때 게임이 지속된 것을 알았을 때의 그의 표정은 일상 속에서 무언가 보물 같은 것을 찾아낸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은 그의 조카가 찾아오면서 좀 더 심도 있게 다뤄진다. 


 
 캡슐 속의 삶


 집 나온 조카를 며칠 동안 보살피면서 그는 오랜만에 사람과 대화하고 교감한다. 마침 그때는 교대근무를 하는 남자가 일을 그만둔 뒤였다. 아침 출근을 하면서 커피를 두 캔을 사고, 점심을 먹을 때도 조카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카메라와 사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노을이 지는 다리에서 바다에 가고 싶다는 조카에게 ‘다음에’라고 말하고, 조카가 그다음이 언제냐고 묻자, ‘다음은 다음이고, 오늘은 오늘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즉, 다른 사람은 침범할 수 없는 확고한 ‘자신 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다. 


 자신의 동생이 조카를 데리러 왔을 때 그들이 나누는 말을 들어보면, 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서 완전히 자신을 떼어놓고 스스로를 유리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그가 말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세계는 타인과 일정이상 관계를 맺지 않고 마치 자신을 캡슐로 싼(아나톨의 표현)것처럼 보인다. 혼자 사는 것, 혼자 일을 하는 것, 홀로 목욕탕을 방문하고 일인용의 음식과 음료를 시켜 먹는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하는 일은, 일본에서 가장 큰 도시인 도쿄에서, 그 도시를 돌아다니며 수십, 수백 명이 왔다 간 장소를 청소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주말마다 가던 선술집에, 여주인의 전남편이 찾아오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7년 전에 이별을 하고, 전남편은 새로운 결혼을 했지만 이제 암이 걷잡을 수 없이 펴져 곧 죽을 운명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그녀를 찾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술집 오픈시간에 만났을 때, 주인공은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우연히도 그날 저녁 다리 밑에서 두 남자는 만나게 되고, 남자는 주인공에게 자기 아내를 부탁한다고, 그래도 된다고 말하지만, 주인공은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런 관계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흑백의 이미지


 영화에서는 ‘그림자’와 ‘흑백’의 이미지가 자주 사용된다. 그가 하루를 마치고 잠에 들었을 때 화면에는 흑백의 영상이 펼쳐진다. 그것은 마치 그가 하루동안 보고 겪은 것을 편집하거나, 그가 자신의 카메라로 찍은 것들의 모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앞서 말한 그가 가지고 있는 아날로그 적 감성을 생각해 본다면, 흑백은 ‘과거’라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이제는 더 이상 총천연색 꿈을 꿀 수 없어진 그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그가 일주일 동안 찍은 필름을 현상관에 맡기고, 저번주의 사진을 찾아오고, 그것들은 선별하는 작업을 보고, 그가 이러한 행동을 몇 년 동안 해왔다는 것을 보는 순간, 그의 삶이 그가 찍은 사진처럼-그러니까 환하고 빛나는 것들이 모두 흑백으로 치환되는-모노톤 그 자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림자’라는 소재는 아나톨이 나에게 알려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연관되어서도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 좀 더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동굴의 비유란, 컴컴한 동굴에서 촛불에 비친 물건의 그림자만 봐왔던 죄수가 운이 좋게 동굴을 나가게 되면 실제의 햇빛을 느끼게 되고 그 제야 물체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동굴 안의 그림자(현실의 삶)에서 동굴 밖의 공간(이데아, 절대적인 진리의 세상)으로의 나아감을 얘기하는 학습과정에서 사용되는 철학적 개념이다. 추가적으로 덧붙이자면, 이데아를 깨달은 죄수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겪은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모르는 다른 죄수들에겐 그가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된다는 점도 있다. 어쨌든, 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주인공을 바라보면, 그는 과거에 동굴 밖을 경험했다가, 그것을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여 동굴 안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이해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데아는 짐작컨대 ‘타인과의 깊은 관계형성’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떠한 일련의 경험들로 인해 그는 동굴 속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이 최소한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만 누려가며 ‘그림자’에 자신의 삶을 위탁하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끝나고 난 뒤에 마지막 시퀀스는 그의 아침 출근길을 다시 비춰준다. 그리고 영화는 꽤 긴 시간 동안 주인공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의 눈에서 끝끝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잡아낸다. 그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을 무엇이었을 까. 나는 조심스럽게 두 가지를 생각해 봤다. 첫째, 자신의 상황과 그로부터 나오는 외로움이란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나온 눈물.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미래에도 바뀌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것. 혹은 둘째, 자신이 현재의 세계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는 안정감을 갖지만, 그것이 영원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에서 나오는 슬픔의 눈물. 그래서 나는 영화의 제목인 <퍼펙트 데이즈>가 한 편으론 그가 자신이 구상한 완벽한 일상을 보내고 있음과 동시에, 일종의 반어법으로 그가 닿을 수 없는 나날들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작년 베를린에서의 내 모습이 계속 겹쳤다. 똑같이 한 나라의 수도에 있으면서, 집과 어학원을 매일 오가고, 도서관에 가고, 점심을 먹고 산책을 했던 작년의 나날들. 그때의 나는 한편으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최소화하며 살아가면서 인생에서 처음 큰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나의 삶은 훨씬 안정적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소속감도 느끼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도 형성했다. 새로운 자극들로 인하여 정신없는 오 개월을 보낸 지금으로선, 주인공의 삶을 내가 감당하기엔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스스로를 캡슐에, 혹은 비눗방울에 유리할 만큼 세상에 덜 데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아가는 길엔 나의 세계가 무엇인지 생각했지만 그만큼 확실한 답을 얻진 못했다. 다만, 나는 루틴보다는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인 것만은 안다. 그것 역시 내 남은 일생에서 상수일진 알 수 없지만. 우선은 다음 주에 있는 베를린영화제를 위해 짐을 싸야겠다. 


사진출처(Quelle) :
 https://www.yorck.de/specials/premiere-perfect-days

https://www.filmposter-archiv.de/filmplakat.php?id=37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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