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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Sep 28. 2024

<무작위로 걸어가기>

초단편 소설 - 6



낡은 건물에 있는 호스텔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나는 여행용 가방을 손에 움켜쥐고 나선형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어눌한 영어를 하는 직원의 안내를 따라서 호스텔의 현관문과 내게 배정된 방의 문을 여는 방법을 익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한 일은 방 한편에 캐리어를 두고 짐 정리를 하는 일이었다. 가방 안에서 찌그러진 옷과 외투를 꺼내 옷걸이에 걸었고 스마트폰과 태블릿 피시의 충전기를 침대 머리맡 옆 콘센트에 꽂았다. 한국과 콘센트 모양이 똑같아서 가방 한편에 혹시나 하고 가져온 돼지코는 쓸 일이 없었다. 여행의 피로 때문에 나는 정리가 끝나고 바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천장을 몇 분간 바라보다가 작은 책상을 보니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정육면체 모양의, 정확히는 큐브 형태를 한 디지털시계가 보였다. 면마다 각자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시간은 18이라는 숫자에 도달했다. 한국은 이제 막 새벽 두 시가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C는 정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분간 시간을 갖자고 했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주어나 목적어가 빠진 문장은 듣는 사람이 스스로 빠진 문장성분을 상상력으로 채워야 한다. C는 무엇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나와의 관계를 말하는 건지, 입에 달고 살았던 퇴사를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 자신의 삶? 복잡한 일은 C와 교집합을 이루지 않는 내 삶에도 산재해 있었다. 당장 두 달 후에 끝날 전세 계약이 있었고, 내가 맡고 있는 고객과의 계약체결은 지지부진했고, 귀찮아서 버리지 못한 음식물쓰레기가 냉동실을 계속 채워 나가고 있었다.


헝가리를 고른 이유는 별것 없었다. 동유럽이니까 물가가 싸겠지, 음식이 얼큰하다고 들었으니, 한식과 그리 다르지 않겠지, 그리고 야경이 예쁘니까 보러 갈 만하다는 것 정도? 그리고 며칠째 연락이 없는 C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를 생각했다. 유럽이라면 시차가 있으니까, 내가 잠에 들었을 때 무언가가 날라오고, 그 무언가를 시간차로 받는 게 심적으로도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연히 몇 년 전 알게 된 외국인 친구 R이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다는 것.


이튿날 아침에 나는 한국인 가이드가 진행하는 투어에 참가했다. 관광명소를 들리게 짜인 일정에 따라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고 이따금 버스와 트램을 타고 돌아다녔다. 시내 중심에 있는 성당에 다다랐을 때, 선글라스와 마이크를 낀 가이드는 갑자기 헝가리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발명품이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 돼지코가 필요하지도 않다는 걸 모르는 내가 어떻게 저걸 알겠어,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윽고 가이드의 입에서 나온 정답에는 뜻밖의 것들이 많아 놀랐다. 엔진이 달린 최초의 비행기, 볼펜, 그리고 루빅큐브가 있었다.


C는 종종 우리 집에 올 때 큐브를 가져와 맞추곤 했다. 나는 그런 퍼즐 맞추기엔 영 재능도 관심도 없어서 이따금 그녀가 맞추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알록달록 섞인 정육면체가 점점 하나의 색깔로 맞추어져 가는 것이 신기했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맞추는 거야? 이거, 다 공식이 있어. 그녀는 몇 가지 기본적인 공식을 나에게 알려주었지만, 나는 그것을 잘 이용하지 못했다. 순서도 헷갈렸고, 그것을 맞추기 위해 가는 중간 과정이 머릿속으로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부다페스트의 둘째 날의 저녁으로 이곳 전통음식이라는 굴라쉬를 맛볼 수 있었다. 확실히 파프리카라고 부르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서 그런지 육개장 내지는 고추장찌개 같은 맛이 났다. 한국에 있었다면 육개장과 맥주를 같이 마시진 않았을 텐데. 그날은 맥주가 끊임없이 들어갔고, 그래서 저녁을 같이 먹은 사람들이 야경을 보러 가는 버스를 탈 때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 이미 나는 취한 상태였고 그래서 호스텔의 방문도 제대로 열지 못해 다른 사람이 정문을 열어주고 나서야 들어갔고, 복도에 있는 세면대에서 한동안 물을 튼 채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물소리를 들은 뒤에 정신을 차린 뒤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두통에 시달리면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의 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나는 내 몸을 조이고 있던 옷가지를 하나씩 벗어 침대 아래로 던져버렸다. 널브러질 것이 분명했지만, 그것을 정돈할 여유는 없었다. 핸드폰에는 아직 별다른 신호가 오진 않았다. R과의 약속은 오후 두 시였는데, 시간은 벌써 오전 열한 시였다. R은 몇 년 전 서울의 한 길거리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였다. 안국과 경복궁 사이의 어딘가에서 지도를 든 채 계속 서성이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나와 C를 붙잡으면서 길을 물어봤다. 내가 길을 알려주자 고맙다며 인사했고, 자신이 한 달 동안 한국으로 여행을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길 때 연락하고 싶다며 연락처를 받아 갔다. 하지만 그 후 한 달 동안 R은 나에게 갈 만한 장소나 음식점 따위를 물었다.


중심지 전철역 근처에서 R을 만났다.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몇 년 전의 모습이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인사를 나누고 곧 대화를 이었다.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 나는 재밌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질문을 하는 쪽은 내 쪽이었다. R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다페스트에만 살았다고 했다. 거리를 지나가면서 만나는 유명한 건물들을 보면서 R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위키에서 본 것 같은 딱딱 떨어지는 가이드의 설명보다, 확실하진 않아도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여행객인 나에게 생각이 나는대로 이것저것 설명해 주는 R의 가이드가 난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문득 그에게 루빅스 큐브가 헝가리에서 만든 발명품이란걸 아냐고 물었다. R은 그 사실을 알지만, 큐브를 한 번도 맞춰본 적은 없다고 했다. 당신은? 나도 그렇다, 라고 답했다.


R과 이른 저녁을 먹고 헤어진 뒤 나는 시내를 정처 없이 걸었다. 그는 다시 한 시간쯤 걸린다는 부다페스트 외곽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남은 인생 중에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오늘의 경험은 오랜만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C가 정리가 필요하다고 말한 날. 나는 수십 가지 생각을 하면서 결국 집 밖으로 나왔고, 집 근처 아파트 단지와 상가 등을 돌아다니면서 뒤틀린 상태로 있는 내 뇌를 맞추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건들면 건들수록 꼬이고 풀 수 없는 매듭이 되어버리는, 내가 맞추려하면 맞출수록 어긋나는 큐브와 비슷했다. 오늘의 코스를 지도에 찍어본다면 마치 그날과 비슷했지만, 나를 괴롭히던 전날의 숙취로 인한 편두통은 이리저리 골목길을 돌아다니고 R과의 대화를 통해 말끔히 없어졌다.


불이 켜진 건물들이 강에 수놓은 점들을 보면서 유람선 몇 대를 보내고, 강가를 걸어가는 이들을 바라봤다. 강변과 건물 사이에는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뒤섞여 흘러갔고, 가끔씩 자전거도 지나갔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열고, 며칠째 아무것도 오가지 않은 C와의 대화창을 켰고 손가락으로 몇 개의 단어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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