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게> 박근영, 2019
상상한 적조차 없는 슬픔이 나를 덮칠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나를 위해 멈춰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조심스레 건네는 위로가 진심임을 알지만 내 깊은 수렁에까지 닿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위로가 무척 도움이 된다고, 고맙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지혈에 실패하고 내일도 오늘과 같은 이유로 힘들 내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도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상처의 순간은 짧고 성장과 행복의 러닝타임은 길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못한 것을 보니 내가 주인공감이 아닌가 보다 하는 자조적 결론에 닿을 때도 많다.
시인인 진아의 연인 길우는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진다. 커다란 비극을 마주하고서도 진아의 일상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학생들에게 시를 쓸 때에는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진아의 시 쓰기는 지연되고, 이전의 시들은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어색한 위로를 건네며 괜찮냐고 묻는 이들에게 진아는 애써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죄책감과 슬픔에 매인 채 진아의 하루하루가 흐르고 어떤 비극은 지나가지 않는다는 선배의 말처럼 진아가 가진 아픔은 그녀를 떠나지 않는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 지 모른다. 어쩌면 평생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가 슬픔과 함께하기로 했을 때 비로소 한강을, 길우와의 기억을 마주한다.
<한강에게>에는 실재와 영화가 뒤섞여 있다. 작품 속에서 배우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고 몇몇 대화 장면에는 대본이 없다. 길우의 연극과 광화문에서 진아가 시를 낭독하는 장면은 실제 상황들이다. 나조차 그들이 연기 중임을 때때로 잊어 버린다. 진아가 잠과 아주 맞닿아 있는 시간들은 어느 장면보다도 그녀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길우와 함께 한 시간과 일상이 뒤엉킨 때에 진아의 표정은 공허하고, 모호하며, 슬프다. 카메라는 오랫동안 그녀의 잠을 담는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표정을 따라한다. 그녀는 실재하고 내가 그녀를 연기한다. 그렇게 위로를 받는다. 슬픔을 복사하며.
그러쥘 수 조차 없는 슬픔에 빠져있을 때 진아를 생각하면 우리가 한강에 앉아 먹먹하게 강물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와 나는 같은 물결에서 다른 슬픔을 바라본다. 우리는 분명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녹슬어 훗날 더 큰 아픔을 느끼게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 슬픔을 기억하자. 강물이 흘러가도 한강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시간이 흐르면 이 상처와 슬픔을 곧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애써 덮어 놓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