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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 Mar 19. 2022

단 하나의 사건만이 진실이다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정가영, 2017



 취향에 기대 이야기를 해도 좋다면 나는 정가영 감독을 좋아한다. 정 감독의 건강한 자기애를 동경하는 편이라고 해두자. 여기서 건강함이라는 수식은 그 자기애가 모두에게 무해하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정가영 감독과 정가영 배우 모두에게 건강하다는 말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명확한 제한, 그리고 그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으리라는 자신 있는 태도는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매력적이라는 데에 반박할 수 없게 만든다. 내 주위의 젊은 창작자들과 정가영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들은 “아, 어떻게 이런 걸 만들지” 하며 부러워하는 일이 적잖다. 무엇이 정가영 영화를 그녀만의 것으로 만드는가? 우선은 ‘정가영’이라는 확실한 아이덴티티일 것이다. 단편 영화는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명백한 장점을 가지는 동시에 시간에 대한 제약이라는 크나큰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화들은 종종 스크린 너머의 시간이 관객의 시간과 같은 속도로 흐르도록 한다. 이러한 선택은 게으르다고 여겨지기 십상이지만, 정가영 감독은 느슨한 듯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대화를 만드는 데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영화는 네 씬과 중간중간 세 개의 인서트로 이루어진다. 실제 인물인 감독 자신을 환기하는 가상의 인물 ‘정가영’은 있을 법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 번째 전화 통화에서 가영의 태도는 사뭇 미적지근하다. 사랑이 아닌 정 밖에 남지 않은 연애와 바람에 관한 시시껄렁한 연애담이 한차례 지나가고 최근 작업으로 대화 주제가 옮겨 간다. 이번 달부터 영화 촬영에 들어간다는 가영. 그럼 그거에 집중하라는 친구의 말에 다음에 찍을 영화에는 조인성이 나오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어느 소속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현정과는 같은 곳에 있다는 그. 더 킹에서의 연기가 어쨌고 저쨌고. 가영은 마치 ‘입덕 부정기’를 겪고 있는 것만 같다.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려는 듯 구는 사람처럼, 가영은 이런저런 가십을 들먹이지만 어쩐지 조인성을 캐스팅 해야겠다는 가영의 마음은 90퍼센트쯤 진심처럼 보인다. 그러다 또 흐려지는 마지막 대사는 침대에 누워 잠에 취한 듯한 인서트 샷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전화 통화를 하는 가영은 대담해진다. 조인성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듯 보이는 이 감독을 슬쩍 떠 보지만 들리지 않는 전화 너머의 이 감독은 그녀에게 시나리오를 요구한다. 다만 가영이 찍으려는 영화에서 확실한 것은 조인성이 배우 조인성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과 멜로라는 것뿐이다. 아마 그 영화의 여주인공은 정가영일 것을 감히 확신하고 싶어지는 순간 미심쩍어진다. 이게 진짜 현실이 맞는지, 아니면 잠든 가영의 꿈인지.


 촘촘히 쌓아올려진 관객의 의심을 터뜨리는 것은 세 번째 전화 통화다. 가영은 아는 오빠에게 대뜸 다음 작품을 조인성과 함께 하면 어떨 것 같냐고 묻는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애매한 태도로 템포를 쉬어가며 질문을 고른다. 다 차치하고서 시나리오가 없는 상황이다. 가영은 조인성에게 시나리오를 전해주는 시나리오를 이야기한다. ‘한 번 만나거나, 통화로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그냥 뭐 밥, 밥 먹을 수도 있는 거고…’ ‘풉…누구랑, 조인성이랑?’ 그의 본심이 드러날 때 반신반의 하던 관객은 마음 편히 웃는다. 뜨끔한 가영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는다. ‘나 너무 딴 나라 얘기하고 있어? 아 왜, 이상해? 나 너무 깝치는 거야?’ 가영의 아는 오빠와 스크린 밖의 나는 완전히 동기화되어 말을 뭉개면서도 그녀가 조인성을 꼬시는 상상을 해본다. 이어지는 가영의 대사처럼 너무 웃기다. 너무 재미있는 상상이다.


 낄낄하는 웃음이 그치기도 전에 정말 조인성이 가영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시시껄렁한 대화는 뚝 그치고 기쁘다기보다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대화가 시작된다. 조인성과의 전화 통화를 배경으로 삽입되는 가영이 누워있는 숏은 관객에게 혼란을 더한다. 이 모든 게 그녀가 꾸는 꿈인지 혹은 통화가 끝난 후 그녀의 모습을 앞당겨 삽입한 것인지. 시간을 추측할 수 없는 걸 넘어 어디서부터가 현실의 일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런 와중에 조인성과의 통화는 계속 된다. 아는 오빠에게 늘어놓았던 소리들을 조인성이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다. 그와 만난다, 만나서 술을 마신다…가영의 상상은 조인성과 사귀는 데에까지 닿았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이제는 어디서부터가 상상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 속 정가영이 조인성과 통화를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어도, 영화 밖의 연출가이자 출연자인 정가영은 조인성과 통화를 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더 영화처럼 느끼게 한다는 지점이다.


 정가영 감독의 영화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거나 하나의 보기를 선택해야 하는 퀴즈가 자주 등장한다. <혀의 미래>(2014)에서 연인 관계의 두 사람이 공유하는 비밀이, <내가 어때섷ㅎㅎ>(2016)에서 친구의 연인을 꼬시는 가영이 닿는 결말이, <밤치기>(2017)에서 가영이 선택하는 남자가 무엇인지 좇게 된다.어디로 튈 지 모르는 가영으로 인해 상상력에 제동이 걸린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길게 늘어졌다 금새 수축되는 대화들이 영화를 차지게 만들고 관객으로 하여금 자문자답을 이어가게 만든다.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의 영어 제목은 <Love Jo, Right Now>이다. 의문문이 아니라 명령문의 제목에서 정 감독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조인성은 무슨 이유가 있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거라고. 좋아하세요. 좋아하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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