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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두부 Aug 07. 2022

긴 휴가가 시작됐고 나는 제주에 왔다

긴 휴가가 시작됐고 나는 제주에 왔다.


최근 내 상황은 별로 좋지 않다. 불안과 두려움에 쌓여 지낸지가 벌써 오래다. 마침내 모든게 다 잘 풀려가는 것 같다가도 조금만 삐끗하면 나는 다시 움추러들고 끔찍한 미래를 상상한다.


가끔은 그런 내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허탈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살펴봐도 불안하거나 우울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몇 번이고 다시 울적한 기분에 휘말리니 미칠 노릇이다.


이게 혹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유산일까 생각해 봤다. 아빠도 엄마도 잔걱정이 많은 편이나 나 정도는 아닌 것 같고. 면면을 따져보면 아빠는 놀라울만큼 낙천적인 구석이 있고 엄마는 걱정될 정도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 둘 중에 하나만 가졌더라도 내가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드니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 아닌 것이다.


어떤 순발력이나 반격기로도 거스를 수 없는 스위치가 내 깊은 속에 자리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또 형을 생각한다. 형이 떠나지 않았다면 이런 어려움 정도는 고등학생 선에서 고쳤을 거라는 상상을 한다. 현실적인 생각도 바람직한 생각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상상은 안 하는 게 좋지만 나는 그런 가정을 펼칠 때마다 단단한 바위 뒤에 숨는 기분이 든다. 피함으로써 찾아오는 안정 같은 걸 느낀다. 그렇게 찾은 안정은 당연히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이게 내가 살아온 - 부정하고 싶은- 방식이다.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작금의 내 사태에 대해 요즘 심해진 말 더듬에 집중해보는게 어떠냐고 했다. 어떤 기분이 들 때마다 그 기분의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단순하게 말 더듬이 왜 다시 심해졌는지만 바라보자는 거다. 말 더듬이라는 나만의 핸디캡을 떠올리다보면 최근의 내 힘듦도 징징거림도 이해해보자는 마음이 든다.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발목잡힘이 내게는 있는 것이니까...




제주를 뚜벅이로 여행하는 건 처음이다.


내렸는데 날씨가 너무 화창했다. 더위도 잊을 만큼. 건강미 넘치는 청년의 모습을 그리며 기분 좋게 제주 시내로 들어갔다.



수원 초등학교. 이 날씨 속의 학교가 너무 이뻐서 굳이 굳이 가서 찍었다.



제주에서의 첫 번째 스케줄은 이발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머리 자를 시기를 놓쳐서 내려오는 날 바로 자르기로 정했다. 머리 예쁘게 잘 잘랐다. 나는 성수의 미용실만이 내 헤어스타일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해왔는데 참 부질없는 고집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곳에 쓰이던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여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사진 속의 이발소에서 자른 건 아니다.


숙소는 제주 서쪽의 한경면에 있는 유명제과 건물, 무명서점 건물의 3층 옥탑방이다.


저번 제주 여행 때 여자친구와 무명서점에 온 적이 있다. 굳이 서점을 찾아서 거리가 꽤 되는 이 곳에 차를 타고 왔었다. 반가웠다.



숙소 진짜 이쁘다. 그리고 특별하다.


숙소에서 도보 15분 거리 엉알해안. 나는 언제고 빠질 준비가 되어있는데 물에 들어가기는 어려운 바다여서 아쉬웠다.



바닷가 잠깐 갔다가 돌아와서 밥 먹고, 옥탑에 나가 집에서부터 가져온 캠핑의자를 펴고 책을 읽었다. 이석원의 책 보통의 존재. 참 이 사람도 인생 피곤하게 사는구나 싶었다. 나처럼.


그래도 그가 내면의 깊은 이야기, 숨기고 을 법한 생각들을 저렇게나 드러내는  정말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석원도 INFJ일거라는 강한 의심이 든다.


노을 보면서 술 한잔 마시다가 오늘은 일찍 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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