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기와 전자렌지를 동시에 돌리다가 세탁기쪽 콘센트가 나갔다. 빨랫감이 넘쳐 흐를 지경이 돼서야 주변 빨래방을 검색했는데 걸어서 갈 수 있는 곳만 세 군데가 넘었다. 금요일 밤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 일찍 빨래방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멀쩡한 세탁기를 쓸 수 없게 됐고 금쪽같은 주말 반나절을 빨래에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치만 난 어딘가 즐거웠다. 누군가 나타나서 콘센트를 고쳐준다고 해도 빨래를 다 해서 갖다주겠다고 해도 그날만은 거절하고 싶었다. 나는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 빨래방에 가고 싶었다. ㅋㅋ
왜? 놀러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빨래방은 유럽에서 한 번 가봤다.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것 같지만 긴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다. 그 순간만은 여행자가 아니라 그 도시의 주민으로서 일상을 보낸 기분이 들었다. 세제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 아주머니나 다 된 빨래를 개는 할아버지나 세탁방을 뛰어다니며 도는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낯섦과 낯익음이 섞인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숙소나 관광지나 식당에서 마주할 수 있는 분위기와는 다른 거였다. 그 기분이 내 여행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집 앞 빨래방에서도 일상과는 다른 기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러가는 기분이 든 건 그래서였던 것 같다. 아침 일찍 도착한 빨래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은은했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세탁기는 낮고 리듬이 있는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약해 빗소리는 들을 수 없었으나 창문 틈새로 흙내음이 났다.
유럽에서처럼 동네 사람들의 일상같은 건 볼 수 없었다. 한 쪽 창문에 포스트잇이 50장은 넘게 붙어있었다. 손님들은 그 창문을 방명록처럼 쓰고 있었다.
- 지금은 새벽 두 시... 졸리다. 남편이 오늘도 늦는다...
- 멋진 아들 OO, 얼른 사춘기가 방황 끝내고 착한 아들로 돌아오길.
- 미국에서 왔는데 이런 곳 처음 와봤어요 분위기가 아늑해서 좋아요
- 기쁨아, 내일 모레면 너가 이 세상에 나오는데 엄마가 많이 사랑해줄게
- 빨래를 돌리고 있는데. . . 틱! 틱.. 소리가.. 건조하러 꺼내보니.. 리모콘이.. ㅅㅂ
- 오늘 야구 이길 수 있겠죠?
여기다 옮겨 써놓고 보니 시답잖고 소소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 하지만 그 뻔한 이야기들을 빨래방 창가 앞에 앉아서 쓰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니 미소가 나왔다. 집에서 빨래감을 한가득 들고 빨래방에 도착해서 세탁기에 넣은 뒤, 마무리되기를 기다리는 한 시간... 그 시간이 이 메모들을 쓴 사람들에겐 어떤 의미였을지. 굳이굳이 그 순간 든 별 거 아닌 생각을 써서 붙여놓은 건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껏 청승을 떨다가 나왔다. 건조를 마치고 나온 빨래가 적당히 뜨거워 기분이 좋았다. 집에서 빨래를 했을 때보다 몇 배는 공들여 빨래를 갰다. 흡족스러운 주말 오전이었다.
202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