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늘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두부 Aug 08. 2022

최상의 에어컨

첫 밤을 보낸 숙소는 만족스러웠다. 구석구석 잘 관리돼 있다는 게 갈수록 체감됐다. 숙소 이용 지침을 보면 에어컨을 끌 때는 송풍으로 모드를 바꾸고 바람 세기를 중간으로 맞춘 뒤 1시간 뒤 꺼짐 예약을 하라고 돼 있다. 에어컨에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처음에는 웬 유난인가 싶었지만 한 밤 자고 나니 그런 노력 덕에 에어컨의 성능이 최상으로 유지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딱 에어컨을 조작한 만큼 방은 시원하고 쾌적해졌다. 과하게 추워진다거나 뭐가 낀 듯 답답한 바람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주방이든 화장실이든 옥탑방 마당이든 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주인이 구석구석 하나하나 살피고 관리해 왔구나 싶었다. 자연히 숙소와 주인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됐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안 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부분까지 신경 쓰는 정성을 나도 가질 수 있을까? 누군가를 위해 혹은 나 자신을 위해 그런 태도를 갖고 있을까?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나는 보기보다 예민한 사람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상대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배려를 하는 걸 기쁨으로 여겨 왔기 때문에 숙소 주인처럼 세심한 안쪽까지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딱히 배려심 깊은 인간이 아니다.


내 코가 석 자기 때문이다.


서둘러 리프레시를 떠나온 이유도 어느 날 가까운 사람에게 신경질을 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다. 추구하는 인간상과 거리가 먼, 예전의 나와 거리가 먼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일을 떠나 쉰다고 회복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친절한 나를 유지하는 것. 그렇게 소중한 관계를 잃지 않는 게 내 인생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거다.




일어나자마자 바다로 향했다. 제주도 이 정도 날씨는 여행 기간 동안 만나기 힘들 것 같았고 너무 사람이 몰리기 전에 바다에 들어가고 싶었다.



협재 해수욕장. 지원이가 이 사진만 보고 협재라는 걸 알더라. 어떻게 알았어? 비양도가 보이잖아. 아 저게 비양도야? 그렇구나





책을 읽다 물을 쏟아 다 젖었다. 예전에 비진도 놀러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지원이는 책에 흔적이 생기면 읽을 당시의 기억이나 분위기가 떠올라 오히려 좋다고 했다. 나는 그때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여자친구인 것이 행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다 보면서 치즈케이크 먹음. 그리고 물 안에도 들어갔다 왔는데 사람들이 파도를 맞을 때 정말 순수한 웃음을 짓더라. 강남에서는 만나기 힘든 표정.



먹어도 속이 편한 음식은 참 신기하다. 먹으면서도 속이 편하고 먹고 난 직후에도 속이 편하고 하루 종일 속이 편해서 기분이 좋다. 이런 식사만 하며 살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하지만 이 또한 식사에 이 정도 정성을 쏟을 여유와 마음이 있어야만 하는 거다.



이석원의 책을 거의 다 읽어 주변 서점에 와서 새 책을 샀다. 어디선가 10장 정도 읽은 적 있는 김소영의 어린이라는세계. 요즘 유튜브 콘텐츠를 구상 중(ㅋㅋ)인데 이 책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버스 타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게 너무 즐겁다고 느꼈다. 이건 어릴 적부터 있었던 나만의 즐거움인데 어딘가로 이동할 때 차로 편하고 빠르게 가는 것보다 조금 불편하고 느리게 버스로 이동하는 게 좋았다. 오늘 귀갓길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버스를 탔을 때 멍을 때릴 수 있어서, 그리고 생각보다 내 하루에는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새로운 순간에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숙소 사진 몇 장 투척.

매거진의 이전글 긴 휴가가 시작됐고 나는 제주에 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