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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두부 Apr 30. 2024

초록집

지원과 함께 좀 고차원적인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어서 영화가 끝나길 바란다. 지원에게 설명을 들어야만 전반적인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원은 그 장면을 어떻게 그렇게 이해할 수 있냐며 장난섞인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나는 왓챠피디아를 열고 이런저런 후기들을 본다. 한참을 읽고난 후에야 영화의 내용을 깨닫고 여운을 느낀다. 그래서 영화를 두 번 보는 걸 좋아한다. 한 번 보고, 설명을 듣고 이해한 뒤, 한 번 더 보면 안보이던 장면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이, 그러면서 영화를 좋아한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나다.



영화 뿐이 아니다. 나는 문해력도 좋지 않다. 글이 좀 어렵게 써져 있으면 몇 번이고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으면서 천천히 이해해나간다. 그런 내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영화나 책은 많지 않다. 그래선지 같은 내용을 전달하더라도 쉽게 읽히도록 쓰는 것이 더 훌륭한 글이라는 말을 나는 온 힘을 다해 믿고 있다.



언젠가 혼자 남해로 놀러간 적이 있다. 더운 여름이었는데 막상 가니 할 게 없었다. 출발 전에는 바다를 보고 앉아있는 일은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할 일을 필사적으로 찾다가 가까운 곳에 서점이 있는 걸 발견했다. 서점에 가서 대충 눈에 띄는 책을 골랐다. 온 표지가 초록색인 책이었다. 당시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 때였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날 용기가 필요하다 느낄 때였는데 책에는 “하고 싶은 일 해서 행복하냐 묻는다면?“이라고 적혀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책을 폈는데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완독을 했다는 것은 이 책이 두 가지를 충족했다는 의미였다. 첫째는 문해력이 부족한 사람마저 이해하기 쉽도록 쓰여진 글이라는 거였다. 둘째는 내용이 당시 고민이 많던 나를 감화시킬 만큼 풍부하고 깊다는 거였다. 나는 남해에 딱 2박 3일을 있었다. 남해는 해안선이 꼬불꼬불해 어디에서도 바다가 시야에 걸리는 듯했다. 남해라는 도시는 내게 그 어디서든 바다가 보이는 광경,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책으로 마음 속에 남았다.



브로드컬리라는 곳에서 낸 책이었다. 나는 브로드컬리의 계정을 팔로우했고 포스팅에서 풍겨지는 느낌에 매번 남해를 떠올렸다. 어딘가 따뜻함과 위로를 느꼈다. 기회가 닿아 이번 주는 브로드컬리가 운영하는 오피스 초록집에서 근무를 했다. 읽는 사람, 머무는 사람만을 정면으로 바라본 - 그래서 내내 배려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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