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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Jun 22. 2024

오지 않는 여름을 기다리며,

 [Letter Series] 그리운 S에게, 






요즘은 연락이 뜸했죠. 그러고 보니, 당신 소식을 들은 지도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온라인 인연은 어느 면에선 느슨해서 좋은데요, 그게 어떨 땐 무겁지 않아서 위로가 되다가도 어떨 땐 영원히 닿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어떤 평어 모임을 시작했는데요, 나는 아무래도 한 10년 전쯤의 한국에 머물러 있는 한국인이라 그런지 그게 그렇게 낯설 수가 없어요. 예전엔 한국말도 영어처럼 꼬치꼬치 존칭이니 극존칭이니 따질 것 없이 어떤 중립적인 표현법 하나로 통일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막상 마주하려니 고정관념과 장벽이 여전히 높은가 해요. 특히 확연하게 나이가 많은 분들에게 평어를 쓰는 건 정말 마음속으로 '감히'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어서, 이런 불편한 마음보다야 그냥 존댓말 써버리고 말지 싶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표현법을 통일한다면 평어보단 무겁지 않은 존댓말이 더 괜찮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살아온 배경과 사회상이라는 건 정말 뼈 안 어딘가에 깊숙이 새겨져 있나 봅니다. 




자주 어딘가에 하소연하고 싶은 나를 발견해요. 그런데 또 가까운 사람들이 그걸 듣다 지쳐 나가떨어져 버리게 만들고 싶지는 않고. 그게 두려우니 말을 줄이고요.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걱정들로 가득 차 있고 그걸 계속 생각하는 것까진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주체적으로 삶을 통제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이게 왜 이렇게 어렵나 싶어요. 원체 가진 에너지가 없다 보니까 기본적인 일상을 유지하는 루틴에도 에너지가 금방 바닥나고요. 겨우겨우 일상을 숨 쉬듯이 유지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버리는 사람이 나라는 걸 최근에 알게 됐어요. 


꽤 오랫동안 나는 왜 살고 있는지를 잘 모르겠는 사람이었거든요. 묘하게 늘 가라앉아있다고 해야 할까. 어느 날, 이 정도면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 거죠. 이걸 번아웃이라고 부르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우울이나 불안의 문제인가 하고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망설인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언어였어요. 일단 의료 시스템 자체가 다르기도 하지만, 모국어가 아닌 말로 미묘하고 깊게 섬세한 마음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아가 다르고 어가 다르다는데, 부족한 언어로 생각이 제대로 전달이 되고 상담사의 의도가 내게 명확하게 전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이미 임계점에 다다랐으니까요. 윗집의 층간소음 때문에 밤마다 박동성 이명에 시달리기도 했고, 일정 수준 이상의 인간관계가 늘 한계에 부딪힌다는 걸 깨달았어요.


네덜란드에서는 먼저 GP라는 가정의학과 의사에게 가서 내가 심리 관련 문제가 있으니 전문가에게 소견서를 써달라고 부탁해야 해요. 한국에서는 업계의 사람을 통해서 제대로 된 전문가가 상주하는 심리상담센터를 찾을 수 있었지만, 여기선 그저 제가 가진 사보험으로 커버가 되는지, 더치가 아닌 영어로도 상담이 가능한지, 여성인지까지 정도를 추리고 나니 선택지가 별로 없더군요. 성을 보니 프랑스인 뿌리를 가진 것 같은 더치 상담사를 컨택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실제로 만나는 데에는 두 달이 넘게 걸렸어요. 올해가 되자마자 컨택을 했는데도, 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를 실제로 볼 수 있었죠. 그냥 만나기만 하는 데까지요.


세 번째 만남이었어요. 불안 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해주더군요. 범 불안과 사회불안이 있고, 우울증까지는 아니지만 그보다는 가벼운 만성적 우울감이 있다고요. 겨우 세 번의 만남동안 내가 한 말들로부터 이루어진 판단을 믿어도 될까요? 여기서는 정신과의사가 아니더라도 심리상담사가 DSM-5 기반 진단을 하거든요.


놀랍지는 않았어요. 오래도록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왔고, 그 모든 문제의 시작은 불안인 것 같다고 스스로 결론 내렸거든요. 그런데도 진단을 듣자마자 울컥하더라고요. 이 오피셜한 이름을 얻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나. 그리고 오랫동안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쓴, 그게 잘 되지 않던 자신을 너무 미워하던 내가 안 됐단 생각이 들어서. 





왜 한국의 심리 상담사들은 정신과 전문의처럼 진단을 해주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정신과 방문의 벽이 당시엔 내게 너무 높게 느껴지기도 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일단 가정의학과 의사에게 우울이나 불안, 번아웃, ADHD 같은 문제를 이야기하면 심리상담사에게 먼저 보내는 것 같아요. 이렇게 진단을 받고 나니 뭔가 좀 허무하더라고요. 이렇게 간단한 거였으면 왜 한국 상담사들은 해주지 않았던 걸까. 나는 무엇을 인정하려면 명확한 근거가 필요한 사람이거든요. 분명하게 요구해도 들어주시거나 설명해주시지 않아서 답답했던 기억이 나요. 


사실 진단은 보험과 연관성이 깊다고 합니다. 그래야 진단을 기반으로 이런 치료를 했다 하고 보험처리가 진행되는 거라고. 그런데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정신과 의사들의 전문성에 비해서 상담분야는 여러 제약이 있어서 법제화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진단을 할 수도 없고요.








진단을 입 밖으로 꺼내는 편이 좋을까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좀 불안한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것과 내가 불안장애가 있어, 라고 말하는 건 타인에게 어떤 인상의 차이를 줄까. 그건 인간관계나 사회적 관계에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사실 불안은 누구나 일정 수준 갖고 있는 상태이고, '장애(disorder)'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려면 '그것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가'가 기준이라고 하거든요. 애매하기 짝이 없죠. 나는 밤에 잠을 잘 수 있어, 두 끼를 잊지 않고 챙겨 먹고, 몸무게의 변화가 없고, 무거운 공기가 나를 둘러쌓고 주저앉게 하지는 않아. 그렇다면 우울증은 아닌가. 그렇다면 개인의 성격적 혹은 의지의 문제인가. 의지를 제대로 발현시키지 못하는 내 탓인가. 그렇다면 나는 쓸모없는 인간인가. 왜 사니. 같은 흐름이었달까.


글을 쓰면 겨우 두세 줄 정도의 문장을 써 내려가도 사람의 마음은 드러나요. 지금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어떻게든 삐져나오죠. 적어도 글쓰기에 있어서는 우아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강박 같은 건 없어서 다행이에요. 하지만 반대로 어떤 사람에겐 내 글이 날 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이겠죠. 언제나 솔직한 마음을 남기고 싶어서 더 그런가 봐요, 스캐너처럼. 왜 사진이 아니라 스캐너냐면, 뭐랄까, 사진마저도 일종의 세팅이나 설정이 들어가니까요. 스캔하듯이 그냥 있는 존재 그대로를 남기고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는 쓰는 목적이 성공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불안과 강박, 안정감을 향한 갈망, 제한된 에너지의 소비로 인한 번아웃, 다 타고 남은 재 같은 모습으로 가만히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얽힌 덩어리가 나라는 것을 감출 수가 없게 되었어요. 이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은 Solstice, 당신의 날입니다. 일 년 중 해가 가장 길다는 시간, 하지(夏至). 그런데도 네덜란드에는 여름이 아직 안 왔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올해는 유독 추운 날들이 이어져 여태 한 번도 기온이 20도를 넘긴 적이 없거든요. 아직도 긴팔을 입고요. 밤 열한 시가 되어서야 해가 겨우 지는데도 여름이 오지 않은 것 같은 이 이상한 날들에 살다 보니, 햇빛이 쨍한 여름 있잖아요, 그 빛과 온도가 그리워요. 이 동네 사람들이 여름만 되면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스로 남쪽의 여름을 찾아 바캉스를 떠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죠.


그래도 다음 주부터는 조금 더 따뜻해진다고 하니 길어진 낮 시간만큼의 햇살과 평온을 빌어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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