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퀴어리즘> 리뷰
최근 나는 몇 번의 특이한 경험을 했다. 재밌겠다고 골라본 영화마다 퀴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당첨되어 보러 가게 된 뮤지컬도 퀴어에 관한 이야기였고, 리뷰를 맡게 된 이 책 역시 <퀴어리즘>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퀴어(Queer): 본래 "이상한", "색다른" 등을 나타내는 단어였지만, 현재는 성소수자 (레즈비언 · 게이 ·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를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위 설명처럼 퀴어란, 성 '소수자'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왜인지 문화나 예술계에서는, 퀴어를 헤테로(;이성애자를 가리키는 말. 헤테로 섹슈얼)만큼이나 자주 접할 수 있는 기분이다. 그런데, 기분만이 아니었다. 바로 이 책, <퀴어리즘>에는 사람들이 쉽게 타자화하고 혐오하곤 하는 '퀴어'들이 사실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녹아들어 있는지, 역대 최고 경매가 화가 22인 중 9인의 퀴어 화가를 예로 들어 보여준다.
책은 1,2부로 나뉘어 퀴어 유명 예술인을 소개하는데, 1부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르셀 뒤샹, 프랜시스 베이컨, 잭슨 폴록과 같은 서양 미술사의 큰 획을 그은 화가들을 위주로 고대 그리스 퀴어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2부는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데이비드 호크니, 키스 해링, 바스키아와 같은 화가들을 들며 현대 미술을 이끈 퀴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2부의 마지막엔 스페셜 유닛으로 프리다 칼로가 자리하고 있는데 역대 최고 경매가 화가 22명 중, 단 한 명의 여성만이 자리 잡은 것을 보며, 열악한 여성 인권에 대해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흑인 화가 역시 바스키아 한 명뿐인데 물론 머릿수로 단정 지을 수만은 없겠지만 22명의 역대 최고 경매가 화가들 중 각각 단 한 명씩만 존재한 것을 보면 흑인들의 인권과 여성 인권이 얼마나 바닥인지 직관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1부에선 고대 그리스 철학자 시절부터 이어져 온 동성애의 역사(?)부터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경멸받았을 줄 알았던 동성애가 오히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사이에선 '진실된 사랑'으로 여겨지며 유행처럼 번졌었다는 사실이 실로 충격이었다. 나는 종종 동성애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맹점 중 하나가 이성애를 멸시하거나 고결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라 생각해왔는데, 고대 철학자들이 바로 그 지점을 완벽히 구현(?)하고 있었다.
"자궁은 생산하고 싶어 하는 짐승이다. 아기를 낳고 싶은가? 아내에게 가라. 여자와 자고 싶은가? 노예나 창녀에게 가라.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미소년'에게 가라" 플라톤의 <향연> 중
정말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혐오발언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나이 든 철학자들 사이에선 '나이 어린' 소년들과의 사랑이 진실된 것이라 생각해왔다니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사실 1,2부를 통틀어, 책에 등장한 몇몇 퀴어 화가들의 가치관 역시 대개 여성 혐오를 동반하거나 마초적인 남자들의 환상의 전유물과 같은 것이 많아 읽기가 힘들 정도였다. 진정한 퀴어라기보다는, 예술가들의 객기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물론, '이렇게나 비주류라고 치부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사실은 당신들이 굉장히 잘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들이오.' 하는 작가의 논지를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여성인 내가 읽기에는 어쩔 수 없이 상당히 불편한 지점이 많았다.
오직 프리다 칼로의 광기 어린 복수와 그 속에서 눈 뜬 성적 지향성만이 설득력 있게 들렸는데(물론 성향이라는 것이 설득해야 하는 영역은 아니지만, 앞서 이야기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비하면 훨씬 읽기가 수월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마저도 또 다른 여성 피해자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럼에도 프리다 칼로야 말로 진정 '비주류'의 대변인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성적 소수자이며, 여자이며, 유색인종, 즉 모든 혐오와 차별의 집합체였으나 결국은 살아남아 마침내 성공하기까지 한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사실 책 전반의 문체나 어투가, 4-50대의 주류 남성 느낌이라(굉장히 재밌으려 노력한 말투인데, 실제로 재밌다(!).) 그런 저자가 비주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비주류가 늘 공격의 대상이었다는 것과, 그들이 공격의 대상이 된 이유란,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소수의 것을 타자화하고 구분 지어 없애버리려 하는 인간들의 이기적인 본성과 미개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지점에서 굉장히 의미 있었다. 또 사실은 그렇게 '소수'이자 '비정상'으로 치부했던 퀴어들이 얼마나 소수가 아니고, 비정상이 아닌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들을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점이 재미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너희가 비주류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사실은 이렇게나 주류에 포진되어 있단다.'는 저자의 논리가 '헤게모니'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비주류로 존재해도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데에 방점이 더 찍혔으면 어땠을까 싶다마는 내가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학창 시절 40대 역사 선생님이 자습시간에 들려주는 야사를 듣는 기분으로 재밌게 읽어 나갔으니, 저자가 결심한 '기존의 틀을 깬,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미술책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은 성공한 것 같다. 저자의 다음 미술사 이야기도 기대되는 신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