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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May 14. 2022

‘성평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양성평등정책포럼 토론문 (2021. 8. 26)

‘청년’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이 세대 내부가 균질하지 않으며 오히려 ‘격차 세대’에 가까운 특성을 지닌다는 점은 이제 하나의 상식이 되고 있습니다. 꿈-자본은 국가간 비교에서도 작동하지만, 한국 청년들 내부에서도 꿈-자본이나 취업 선호도, 미래 계층 상승에 대한 전망 등에서 계층에 따른 편차가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납니다. 모험에도 그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사실 ‘공시’야말로 많은 청년들에게는 최고의 모험이고 최고의 도전일 수 있겠습니다.


세대 내의 차이에 대해서 굳이 다시 언급하면서 토론문을 시작하는 이유는 발표자료를 살펴보면서 ‘청년’의 가치관 내지는 객관적 상황을 파악하는 통계자료가 활용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청년’을 ‘20대’로 보는지, ‘19~34세’로 보는지 아니면 ‘MZ세대’처럼 20년을 하나의 코호트 안에 뭉개넣는지에 따라서 청년의 모습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2) ‘청년’, ‘20대’, ‘20대 남성/여성’과 같은 커다란 연령 코호트를 기준으로 한 해석은 세대 내의 다양한 균열을 다소 뭉툭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청년’의 문제를 해석하기 위해 어떤 범주를 사용할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청년과 관련해 매우 다른 결과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 어떻게 자료를 수집했는지, 설문지의 문항은 무엇인지, 어떤 범주를 활용하여 보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포함한 좀 더 구체적인 통계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자료 대 자료’, ‘해석 대 해석’의 겨루기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각 통계 수치가 수집된 배경이 다소 생략된 채로 통계자료의 종류만 늘어나고 학자들이 개별 발표에서 필요한 통계 자료를 조각 맞추어 활용하다보면 청년의 모습은 다소 단순해질뿐더러, 한편으로는 자료에 따라 매우 분열적으로 보이게 되기도 하는 듯합니다.


발표에서 활용된 통계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문제 제기를 몇 가지만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청년 고용률 하락이라는 사실에 관한 문제입니다. 발표자 선생님은 청년 고용률의 하락을 이야기하기 위해 20~29세 전체를 기준으로 한 통계 자료를 활용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파악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15~29세의 실업률이 2008년 7.1%에서 2017년 9.8%로 증가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30~34세 코호트에서는 2008년 3.6%에서 2017년 4.1%로 큰 변화가 없습니다. (0.5% 증가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10년 사이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30~34세 코호트의 고용률은 2008년 70.8%에서 2017년 77.9%로 오히려 늘어나는데, 이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증가하게 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청년(15~29세) 고용률 하락과 실업률 상승을 기준으로만 보게 되면 우리는 전반적인 일자리의 부족을 보게 되지만, 30~34세 고용률 상승과 함께 보게 되면 ‘첫 취업 이행’의 지연이라는 프레임으로 이 문제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자료로 뒷받침된 내용은 아니지만,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늘어나는 취업준비 기간에 부모가 자녀를 부양하는 가족 재생산 전략이 작동하고 있다는 가설을 어렵지 않게 세워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여기에 20대 내의 불평등과 생애과정 차이에 관해서도 논의를 더해볼 수 있습니다. 청년세대의 노동시장 이행은 세대 내부에서 계층화되어 있는데, 변금선(2017)은 이를 6개의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여기에서 저임금 유지 유형, 저임금 진입 이탈 유형, 조기진입 저임금 가교 유형 등은 20대 초반에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며 저임금의 노동시장에서 20대의 ‘취업률’을 지탱합니다. 반면 진입지체 저임금 상승 유형, 중간진입 임금상승 형은 진입이 지체되어 있으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노동시장으로 이행하는 비율과 속도가 현저히 높습니다. 이 통계는 패널자료로 수집한 20대에 한정된 자료이기 때문에, 아마도 30대가 될 때까지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한 계층의 청년은 아예 이 그래프에서 빠져 있을 것입니다.         


(그림 출처: 변금선, 2017)



여정원에서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는 매우 흥미롭게 읽힙니다. 특히 여성·성평등 정책에 대한 의견에서 20대 남성의 50.2%가 “여성에 대한 차별 해소, 남녀 지위 격차 완화를 위한 정책을 정부의 주요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는 데 긍정응답을 했고, 성별 격차가 33.5%p 밖에 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20대 남성의 1/4이 매우 극단적인 반페미니스트라는 <시사IN> 설문조사의 관찰, 그 외에도 최근 다른 설문조사에서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 응답 수치와 비교해서 매우 고무적이기 때문인데요. 사실 이전에도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조사한 결과에서는 20대 여성의 과반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응답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고, 해당 조사에서 20대 남성이 페미니즘에 상대적으로 수용적인 응답 결과들이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차이가 여성정책연구원이라는 조사기관에 따른 응답자 성향 차이에 따라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려가 필요해 보입니다. 반페미니즘 운동(?)의 부상과 함께 실제 여성정책연구원은 그 자체가 반페미니즘 반달리즘의 대상이 되기도 있기도 한데요. 또 반대로, 같은 자료에서 인용하고 있는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의 경우 재보궐 선거 국면에서 성별화된 정치적 당파성이 가장 극대화되었던 시기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해석에 주의를 요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앞서 살펴본 33.5%p라는 격차가 “여성·성평등 이슈에 대한 정책 대응이 소극적이다”에 대한 답변에서는 남성 59.2%, 여성 69.9%로 10.7%p까지 좁혀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20대 남성’ 집단 내부의 상당수가 다른 사회 성원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여성·성평등’을 해석하는 레퍼토리를 형성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이를테면 이들은 성별을 고려한 채용 할당을 폐지하고 ‘무고죄’의 적용을 강화하고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는 것을 ‘여성·성평등 이슈에 대한 적극적 정책 대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저 또한 성별화된 방식으로 ‘성평등’에 대한 이해를 단순 구조화해 적었습니다만, 실제 ‘20대 남성’이나 ‘20대 여성’ 내부는 물론이고 모든 사회 성원들 사이에서 ‘성평등’에 대한 이해는 매우 다층적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불화하는 형태로 분포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젠더갈등’을 논하는 여러 입장들이 성평등 정책의 개입을 배제하거나 축소시키는 담론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는 발표자 선생님의 지적에 십분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도대체 ‘우리’가 간주관적으로 생각하는 ‘성평등’과 ‘성평등 정책’의 의미와 실제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해보게 됩니다. 특히 청년 일반을 대상으로 한 정책을 성평등 관점에서 만들어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구상이 되지 않아서, 이 부분에 대해 함께 상상해주시기를 요청드리고자 합니다. 보통 여전히 청년정책에서 젠더를 고려하고 성평등을 고려한다고 했을 때, 홍보 모델이나 대표직 자리에 ‘남성 한 명과 여성 한 명을 함께 세우기’ 혹은 주거, 복지 정책에 있어서 ‘여성 대상의 정책을 별도로 만들기’ 등 외에 생각나는 방식이 마땅히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청년 여성 정책’이 왜 도입되는지의 이유에 대해서 제 개인이 공감하는 것과 별개로, 결국 ‘20대 여성’이나 ‘청년 여성’과 같은 본질주의적인 범주를 재도입하는 이같은 정책들이 20대 여성 자살률 증가 담론 및 20대 여성만을 타겟으로 한 마음건강 정책에 대한 온라인상의 비난에서 보듯 성별 이분법과 관련한 사회문화적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들이 잦으며, ‘여성 안심’, ‘여성 안전’, ‘여성 보호’와 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다시 여성성의 틀과 연관시키면서 재여성화하는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잦은 것 같습니다. ‘세대인지예산제’를 검토하는 회의에서 누군가 ‘성인지예산’을 완전히 실패한 시도라고 치부하는 발언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성인지’라는 것이 결국 여성 몇 %, 남성 몇 %라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환원되어 대다수에게 이해된다는 것에 대한 상당한 좌절감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보수 정부에서 ‘양성평등’이 되어버린 담론을 ‘성평등’으로 단순히 되돌리는 일과는 다를 것입니다. ‘성평등’이라는 단어에서 직관적으로 ‘양성평등’을 덜 떠올릴 수 있도록 하는 일, ‘성평등’이 매우 단순화된 ‘공정성’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며, 물론 이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항상 추상적이어서 조금 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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