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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Aug 19. 2018

다중 (3)

문화연구 스터디 7월 11일 코멘트 페이퍼

Text: Hardt, M. & Negri, A. (2004). Multitude. 조정환, 정남형, 서창현 (역) (2008). <다중>. 281-424쪽.     

<프로듀스48>의 96명 연습생들은 다중일까? 소비 안 하려고 했는데, IPTV가 있는 고향 집에 내려갔다가 보고야 말았다. 세 시즌 모두 4회까지가 가장 재밌다. (본격적으로 연습생 방출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난 항상 흥미를 잃었다.) 공통된 목표를 가진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특이성들의 모습이 잘 보인다고나 할까. 매우 이상하게도 경쟁 프로그램인데 울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들이 달려가는 그 공통의 목표 ‘데뷔’ 아니면 ‘스타’ 뭐 이런 거 정말 ‘실질적이고 절대적인 민주주의’처럼 공허한 말이기는 한데, 보게 되면 자꾸 속게 된다. 그러니까 어쩐지 <다중>에서의 ‘민주주의’ 타령도 약간 그렇게 들렸다는 말. (뻘)     


하트와 네그리는 ‘자유 먼저, 민주주의 나중’(287쪽)이라는 식의 담론을 비판한다. 그런데 다중의 민주주의는 이와 어떻게 다른가? 나는 마지막에 나오는 ‘다르게 되기’(422쪽)를 강조하는 하트와 네그리의 말이 굉장히 묘하게 ‘개성’을 찾으라는 신자유주의적인 명령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다르게 되고자’ 할 때, 물론 나는 이것이 굉장히 좋은 가치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정말 ‘공통된 것’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되고자 하는 것일까? 삶정치적 생산은 정말 ‘공통된 것’을 늘리는가? 잘 모르겠다. 최근 더 감각되고 있는 ‘지식의 집단 극화 현상’을 보면(이러한 현상은 언론학에서 양적인 방식으로도 많이 연구되는 것 같다), 삶정치적 생산이 공통된 것을 늘린다는 경향에 대한 하트와 네그리의 진단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의지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여론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하트와 네그리가 ‘민중’을 미심쩍게 보는 것은 바로 ‘민중’이라는 말이 결국 주권을 전제하고 있고, 정치가 결국 ‘일자’로 환원되도록 하는 변형된 형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민중’이라는 말은 다분히 실체가 없이 초월된, 통일된 표현으로 기능한다. 이를 루소를 빌려 ‘일반의지’라는 말로도 표현하고 있는데,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이라는 읽지 않은 책의 내용이 이렇게 연결되고, 이해되는 경험이었다. 오늘날 여론이라는 말, 여론조사라는 말, 구체적으로는 ‘네티즌들은 –라는 반응을 보였다’라는 ‘기레기’의 관용어구 등이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에서도 제시되고 있는 ‘시민사회’ 내지는 ‘협치(governance)’라는 개념의 발명과 이를 통한 주권 권력의 행사에 관한 내용도 ‘여론’과 비슷한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고 인상적이었다. 경제학자 윌리엄 이스털리의 책 <전문가의 독재>에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던데, 사 놓고 읽어보지 못했다. (여론은 커뮤니케이션학, 시민사회/협치는 정치학, 사회학, 문화연구 등의 이슈와 관련이 있다.)     


하트와 네그리는 민주주의와 대의(representation)를 대척 지점에 있는 개념으로 둔다. 혹은 대의는 왜곡되기 쉬운 것으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의가 대의자와 피대의자 사이를 분리시키지 못하도록 제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때 대의라는 작용 자체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방법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하트와 네그리가 다양한 대안적 방법들을 점검하고 있지만, 결국 대의의 삭제 불가능성에서 이들도 빠져나가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직접 민주주의와 다중의 민주주의는 다르다고 스스로 언급하고는 있지만, 대의 작용에 대한 정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이들이 말하는 다중의 민주주의는 비현실적인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제안처럼 보일 것 같다. 비매개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강조하기보다는, 매개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매개, 재매개 개념에 갑자기 꽂힌다. 또 혹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문화매개자cultural intermediary에 대해 잘 연구하거나.)     


하트와 네그리의 인간(본성)론이 궁금하다. “창조성이 엄청난 부의 약속에 의존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전혀 일리가 없다”고 이들이 이해하고 있는데, 그저 이렇게만 본다면 이들은 경제를 화폐경제로만 너무 좁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 정말 사람은 ‘사랑의 행위’를 위해서 ‘공통된 것’을 창조하는 그 자체, 창조성 그 자체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본다면 너무 낭만적이다. 금전으로 곧바로 환금되지는 않더라도 상징경제의 영역에서는 예컨대, 인정이라든지, 상징적 차원의 ‘개인’에게 귀속되는 이익이 발생하고 그것이 사회체계의 구조적 논리를 형성한다는 것이 인류학적 증여에 대한 오래된 이론이지 않나? (물론 내가 간과하고 있는 인류학적 증여에 대한 반대편 논리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여간 또한 하트와 네그리는 ‘비물질적 재산’이 중심적이 되면서 희소성이라는 경제원리도 점차 힘을 잃고 있다고 하는데, 그냥 대표적인 반례로 정동 엔클로저를 통한 플랫폼 자본주의의 영역으로 돌변하여 무섭게 그 페달을 올리고 있는 인터넷의 하트와 네그리가 기대했던 바와는 반대 방향의 경향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민국가, 자유시장, 사회주의, 정치적 대의, 대표, 인권, 노동의 권리’ 그리고 ‘민주주의’까지, 하트와 네그리는 현재의 조건들이라는 맥락 – 이 맥락은 전지구적 맥락이고, 비물질적 노동의 맥락이고, 삶정치적 새산의 맥락이겠지 – 속에서 다시 고찰되어야 한다는데, 고찰되어야 한다고만 하고 고찰을 하지는 않으니까 솔직히 짜증난다. 이 책이 그런 책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제국>에서도 <다중>에서도 결국 끝없이 그런 대안적 이론화는 끊임없이 유예되는 느낌. 지난번 스터디 때 이야기했던 것처럼 결국 기존의 이론체계들이 다중 개념과 잘 붙지 않아서 우리가 결국 사고하는 것도 다중의 맥락에서 사고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니까 그렇다. 하트와 네그리 역시 대안적 이론 체계를 제공하지 않고, 계속해서 관점만 다르게 하면 뭔가 다 해결될 것처럼만 말한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뭔지 그 구체적인 형태가 무엇인지 종국에는 진짜 1도 모르겠다. (1도 없어~)     


뒷부분에서는 ‘폭력’에 관한 논의가 나오는데, 순교의 개념이나 방어적 폭력의 개념이 다소 간디 님의 비폭력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 의아했다. 적어도 내게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 개념이 더 매력적으로 들린다. 운동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인디미디어나 시애틀 사례와 같은 다른 이야기들은 상당 부분 다중 개념을 가정하지 않아도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또 퀴어네이션 사례라든가, 실질적으로 저항의 방향을 이들이 얘기해주지는 않을 것이고 그것을 학자들이 얘기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진짜 액티비스트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울 것 같다. 퀴어네이션 사례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그런 이야기로 들리는데, 정말 그렇게 한다고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냐 라는 근본적 질문을 떠올리게도 한다.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수행은 언제나 의도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다중 개념에 정체성의 정치학이 포함되어 있지만 막상 계급정치인 것처럼 느껴지는 비물질노동 논의와 정체성 정치(예컨대 페미니즘) 논의가 퉁쳐지기에는 잘 붙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카이로스의 개념과 타이밍의 개념이 또 나왔다(423쪽). 세르토와 만하임, 그리고 하트와 네그리 여기서 그런 비합리와 카이로스와 생기와 그런 것들의 폭발적인 힘의 가능성에 대해서 믿기는 믿어야겠지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건 대의제 내에서 이룩한 사례였지만, 구미시장이 된 (세르토 연구자) 장세룡 선생님의 힘을 받아서, 언젠가는 내게/우리에게도 카이로스가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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