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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Aug 19. 2018

다중 (2)

문화연구 스터디 7월 4일 코멘트 페이퍼

Text: Hardt, M. & Negri, A. (2004). Multitude. 조정환, 정남형, 서창현 (역) (2008). <다중>. 135-278쪽.     

20대 여성 영화감독인 정가영의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라는 단편의 예고편에 보면 “나 더 킹 봤는데 조인성이 연기를 잘하다가도 못하고, 못하다가도 잘해!” 이런 대사가 나오는데 <다중>의 2부가 딱 “재밌다가도 재미없고 재미없다가도 재밌고 그래.” 이런 느낌이었다는 말로 시작. 주로 ‘다중’ 개념에 대해서 얘기하게 될 것 같다.     


일단 ‘다중’의 정치적인 잠재력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면서, 다소 <제국>에서 빈자 찬양을 할 때 느꼈던 그 감정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번에 개인적으로 조금 흥미로웠던 경험은, 다중 개념에서 처음으로 아이리스 영의 시리즈(series)로서의 여성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영은 사르트르의 시리얼리티(seriality) 개념에서 출발하여 집단(group)으로서 ‘여성’ 범주를 보지 말고 시리즈로서 봄으로써 정체성 정치의 함정에서 빠져나가고자 한다. 이때 ‘노동계급’에 특권을 주지 말고, 또한 ‘민중’이나 ‘대중’과 같은 식으로 특이성을 뭉뚱그리는 방식으로 사고하지 말고 특이성을 유지한 사람들의 연대로서의 ‘다중’(혹은 ‘빈자’)을 상상하자는 제안은 젠더 관점에서 나왔던 정치적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으로 제출된 시리즈 개념의 계급 버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실제로 ‘계급’ 관점이 ‘다중’ 논의에서 중요하다고 책 어딘가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왜 이것이 떠올랐냐면 어제 다른 스터디에서 메갈리아와 워마드에서 실천되는 ‘여성’ 범주를 시리얼리티로 해석하면서 여기서의 트랜스배제, 남성배제적인 ‘여성’ 범주 구성을 어느 정도 정당화하는 듯한 논문(이화여대 김리나 석사학위논문)을 읽고, 시리얼리티 개념을 잘못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사실 비슷하게, 다중 개념을 촛불시민들에게 적용하는 것도 (일단 운동이 나오면 그걸 어떻게든 긍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커다란 오류가 아닌지에 대해 지난 시간에도 얘기를 나눴었고, 다시 이야기를 해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트와 네그리는 오늘날 ‘민중’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상 ‘다중’이라는 식으로 분석하기도 하는데, 이때 이것이 ‘다중’으로 보아야 운동 내에서 일어났던 패착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면 OK. 그런데 사실 ‘다중’과 ‘민중’이나 ‘대중’ 중에 무엇이 더 동원이 쉬운지를 생각하면 나는 여전히 조직화 되어 있는 편이나 혹은 특이성이 아니라 공통성에 정체성 기반을 두는 방식의 동원이 더 쉽고 전략적으로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비물질노동에 가까운, 프리랜서 노동이나 비정규 노동 혹은 실업자들의 노동조합에 가까운 청년유니온은 왜 그렇게 대중적 동원력이 약한가? 본질주의적 ‘여성’ 개념에 기반한 현재의 TERF 페미니즘은 왜 그렇게 대중적으로 소구하는 것일까?     


다중의 민주주의적 열망에 대하여 희망을 품을 수 있나?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사실상 현재 상황에서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라고 보는데 물론 이 욕망은 굉장히 소중한 어떤 충동이라고 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포장된 자유에 대한 열망이 그간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를 생각해보면, ‘주권적이지 않은 사회적 조직화 양식’이라는 게 정말 뭔가 더 나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개방적이고 모두가 참여 가능한 나무위키? 모두가 참여를 하면서 ‘민주주의’를 되살려냈다는 기호를 점유하고 있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를 없앤 학생들? ‘전문가’는 필요없다고 주장하면서 실제 다른 전문가들을 소환해내서 투쟁하고 있는 수많은 온라인 전사들? (‘한경오’ 저격수들, 난민 저격수들 등 너무 많아.)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언어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다중의 실천이라고 하는데, 언어능력이야말로 사회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것이 부르디외를 비롯한 여러 언어사회학자들이 찾아낸 결과 아닌가?     


사실 개념 자체만 보면 특이성이 보존된다는 측면에서 ‘다중’ 개념이 갖는 이상적인 성격이 분명히 있으나, 위에서 논의한 그런 결 때문에 이 개념을 서술하는 하트와 네그리의 방식 자체가 ‘의지주의적’으로 보인다.     


하트와 네그리가 대의민주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이라는 생각이 시종일관 있어서였는지, 이들의 주장이 다소 아나키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텍스트에서 ‘보장소득’이라고 표현되고 있는 ‘기본소득’ 논의에서는 “구성적 정치적 기획”(175쪽)을 긍정하면서 ‘다중’에 의한 국민국가 제도 내에서의 실천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다소 혼동스러우면서 흥미로웠다.     


사실 ‘다중’이라는 개념이 매우 매력적인 것은 사실인데, 그걸 가지고 막상 무언가를 더 논의해보려고 하면 난감해지는 것이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회이론은 민중, 대중, 공중 개념에 기대는 것 같아서. 다중에 대한 더 나아간 이론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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