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르마타 Aug 19. 2018

다중 (1)

문화연구 스터디 6월 27일 코멘트 페이퍼

Text: Hardt, M. & Negri, A. (2004). Multitude. 조정환, 정남형, 서창현 (역) (2008). <다중>. 5-131쪽.


일단 <제국>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편하게 읽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고 싶다. 일단 난이도 자체가 좀 덜 높은 것 같고, <제국> 때보다 저자들의 의견이 친절하게, 또 오해가 있을 만한 지점에서 반복적으로 자신들의 논의를 잘 제한해주면서 전개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국역본의 번역도 훨씬 더 매끄럽게 느껴진다. 우선, 저자들의 핵심 테제가 ‘권력의 피지배자 의존성’이라는 사실이 잘 눈에 들어온다. <제국>에서는 이것을 ‘자본의 노동 의존성’으로 더 많이 상상하게 됐던 것 같은데, <다중>에서는 정치적인 것, 경제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저자들이 강조하다 보니 자본-노동 관계보다는 지배-피지배 관계로 일반화되어 서술되는 경향이 더 짙은 것 같았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트와 네그리의 저작이 오히려 ‘탈정치화’에 닿아 있다는 비판을 받게 만드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또 어떤 면에서 저자들이 예시로 들고 있는 ‘자살폭파 현상’ 같은 것도 전지구적 제국 권력에 대한 대항권력으로 이해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르토의 ‘전략(strategy)’과 ‘전술(tactics)’의 개념쌍이 주는 느낌과도 상당 부분 겹친다. 역반란 전략이든, 네트워크화되는 지배권력이든 결국 전역적 지배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네트워크화된 ‘다중’과의 조우에서 강대국 혹은 제국이 취약해지고, 편집증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서술은 흥미로웠다.


저자들이 ‘민주주의(democracy)’(또는 ‘자유(liberty)’)를 자신들의 테제나 혹은 예시로 드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동원하고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로웠다. 미국의 ‘예외주의’를 비롯해 여러 국민국가에서 정치권력이 자신을 법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경향, 전쟁과 정치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관용이 침식되는 현상들을 설명하면서 이것을 민주주의, 자유, 자율성 등에 반하는 경향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이해가 편했다. (워낙 명쾌하게 이분법적이라는 얘기도 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다중의 비물질노동을 통한 비물질적 생산이 소통적 방식으로 절대적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욕망을 생산한다는 식으로 이어지니까 또 한 번 이해가 편했다. 사실 이 부분에서는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 라는 글에 등장하는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 신화적(법정립적) 폭력과 신적(법파괴적) 폭력과 같은 개념쌍들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어쨌든 레퍼런스에는 브레히트는 있지만 벤야민은 없는 것 같다.


탈중심적이고 분산적인 네트워크 조직 형태와 제국/다중 시기 사이의 친연성을 강조하는 것 같으면서도, 저자들이 현재 저항의 계보학에 쓰일 수 있는 기존의 사례들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었다. 쿠바, 중국 등 사례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평가하는데, 이러한 조직들은 분산적, 탈중심적 조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중앙집중적 단일체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새로운 운동 형태’로 주목받았던 스페인의 포데모스나 유럽의 여러 청년단체들이 한다는 ‘모두가 동의할 때까지 토의를 멈추지 않기’ 같은 방식들이 신비화된 면이 상당히 크다고 생각할뿐더러, 그러한 방식이 반드시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서 이 부분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토론해보면 재밌겠다 싶었다. 실제로 나는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에서 ‘수평적인 민주주의’를 한다고 생각하는 일반 참여자들을 모아서 길고 긴 논의를 통해 어떤 ‘고퀄리티’의 정책제안이라는 아웃풋을 뽑아내야 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 경우 지식/정보/지위의 차이와 시간의 물리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절대로 절대적인 민주주의가 조직 내에서 달성될 수 없을뿐더러, 그 절대적인 민주주의의 이상대로 조직이 흘러가지 않도록 적절히 제어하는 것이 운영사무국의 과제로 제시되기도 한다. (저자들이 말하듯 ‘조직 그 자체가 목적’인 운동이 계속될 때 늘어지기만 하고 조직이 ‘빠개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빠개진다’는 표현을 쓴다.) 더불어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뇌관 중의 하나인 페미니즘 운동에 관해서도 ‘조직된 운동’과 ‘조직되지 않은 운동’의 이분법이 적합한지, 또한 후자가 ‘새로운 운동’으로서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실 의문을 가지고 있다. (저자들이 텍스트 내에서 정체성 운동이 네트워크 조직의 특성을 갖는다고 설명하기도 해서 생각이 났다.) 나는 최근 운동권이나 페미니스트 학자를 배제하고 우리들끼리 뭉치자고 주장하는 일각의 래디컬 페미니즘 경향을 보면서, 사실상 그것은 평등한 사람들끼리 무엇을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계몽하려(가르치려) 드는 ‘전문가’들을 배제하면서 새로운 위계와 새로운 권력위계를 ‘내 땅’에 만들겠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내가 근본적으로 사회조직 원리에서 분업의 원리를 배제할 수 없는 한 권력관계는 내부로 끌어들이고 통제하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이걸 배제하자는 ‘구호’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저자들이 들고 있는 지구화운동 사례도 마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만으로 ‘놀랍게도’ 결합이 벌어진 네트워크 조직의 사례로 나오는데, 사실 정치적인 것의 원리에 관해 논의해 온 정치학자들이 보면 그것은 그냥 일시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국면의 효과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경우에는 사회운동론이나 정치 이론을 구성해 온 다른 학자들의 의견이 더 합리적으로 들리기는 한다. (직접적인 참조점은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


요즘 커먼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저자들이 <다중>에서 공통된 것(the common)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을 ‘전자본주의적’ 공유지(the commons) 논의와 구별하고 있다는 것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실 ‘마을 만들기’나 ‘공유지’ 논의들이 일정 부분 퇴행적이거나 전자본주의적 농경사회의 이상을 무리하게 현재로 끌어오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물론 남이 열심히 하는 일을 뒤에서 호박씨 까는 건 별로 좋은 태도인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실제로 그런 ‘실험’들을 연구해 볼 기회가 있다면 이런 차원에서도 접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있다.


뻘) 한국판 서문에서 하트와 네그리는 마치 ‘독자 서비스’처럼 한국의 사례를 긍정적으로 평한다. 과연 지금도 그렇게 쓸 수 있을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레이몽 부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