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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Aug 19. 2018

레이몽 부동

지식연구 세미나 시즌1 6주차 RP

읽은 것:

Boudon, Raymond (2012). Croire et savoir: Penser le politique, le moral et le religieux. 임지영 (역) (2017). <믿음과 지식은 어떻게 선택될까?: 정치․도덕․종교 현상의 사회학적 분석>. 성남: 북코리아.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던 것을 후회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프랑스 사회학자들이 다 비슷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 사는 동네 다 매한가지 이런 인간 저런 인간 이런 입장 저런 입장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부동이라는 사람이 이런 인간이었구나 알게 된 점에 만족한다. 이 책을 읽기 힘들었던 것은 사회학자에게 기대하는 어떤 역할상에 맞지 않는 문장들을 억지로 사회학 번역기에 돌려 넣으려 했던 것 때문인 것 같다. 사회학이 뭐 별 거 아니거늘. 류석춘 교수 같은 사회학자도 있는 것이거늘... 번역 탓도 크겠지만 고작 이런 사람이 프랑스 현대사회학의 네 흐름 중에 하나의 우두머리 격이란 말이야?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는데, 너무 나이브하거나 얼척 없는 문장이 많아서.. 얼척아 어딨니..


말년에 쓴 책이라 더 투박한가 싶기도 한데, 아무튼 이 책을 그냥 한 줄로 요약하면 ‘내가 만든 일상적 합리성 이론 짱’일텐데, 그래도 이 이론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행동의 이유를 단순한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상, 즉 믿음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 그 자체가 일정하게 ‘사회학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만 본다면 경제학에 가까운 인간론이겠지.) 이해관계 그 자체도 사상/믿음의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종속변수이다. 게다가 ‘합리성’이라는 표현이 결국 그러한 사상/믿음 자체가 구조화, 체계화 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일정한 수학적 함수로 표현될 수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뭔가 기대감을 갖게 되는 점도 있었다. 초반 읽을 때는 방법론적 개인주의, 즉 분석 단위가 개인이라고 하니 경제학에서도 분석 단위를 개인으로 삼지만 변수를 이렇게 저렇게 넣어서, 그 개인을 모두 동일한 가치체계를 가진 개인이 아니라 조금씩 선호가 다른 개인들로 파악하고 모델을 짜는 그런 걸 기대했던 내가 바보처럼 왜 몰랐는지.. (제한된 합리성도 행동경제학에서 중요한 개념이고 경제학의 인간이론을 다른 단계로 내딛게 했던 그런 것이었단 말이다.)


부동 이 사람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맘에 안 드는 것을 두 가지만 꼽자면 우선 하나는 이 인간이 너무 순진하게 단선적 진보에 가까운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베버의 합리화 과정을 그냥 그렇게 해석하면서, 도덕적 민감성과 감수성이 계속해서 나아지기만 하는 것으로 반복적으로 얘기할 때 이 사람 어찌나 순진해 보이던지. 새로운 사상의 불가역성이라는 말은 멋있지만, 정말 불가역한가? 과학적 사회학을 주장하는 부동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을 통해 역사가 꼭 진보하지만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마르크스의 에세이 <브뤼메르 18일>이 훨씬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내게는. 게다가 이 합리화 과정의 근거로 가져오고 있는 세계가치조사(4장과 8장에서 주로 논의)는 심지어 내게 가장 불편한 근거자료였는데, 잉글하트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저런 가치조사는 세대론을 만드는 데도 항상 많이 활용되어 와서 골치 아픈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가 계속해서 낡은 노년 세대의 가치관을 갈아치우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세상과 도덕의 기준이 바뀌어가고 있다면 왜 이 세상은 이 모냥 이 꼴일까. 나는 최소 세계가치조사의 자료를 해석할 때는 합리화 과정보다는 세대-하기(즉, 언제나 구별을 만들어내고야 마는 인간집단 동학의 하나)가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이게 더 맘에 안 드는 것인데, 결국 단선적 진보를 믿기 때문에 어리둥절하게 부동은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합리화 과정은 이미 전제된 것이기에, 현재는 그나마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합리화되고, 좋은 가치가 많이 퍼져 있는 사회인데 여기에 구조주의니 뭐니 하면서 복잡한 이론을 가지고 현재를 비판하려 하는 애들이 부동에게 눈엣가시처럼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현재가 그나마 제일 낫다는 논리. 게다가 이런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여러 사례를 들 때 부동은 일관된 논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허점이 많은데, 한 입으로 여러 말 한다는 것이다. 수단적 합리성과 가치론적 합리성을 놓고 이야기할 때도 어떨 때는 가치론적 합리성의 어떤 방향을 지지하지만, 수단적 합리성을 따져보아야 한다고 한다. “동성인 부부에게 입양 허락은 아이의 사회 편입이나 개인성 형성에 미칠 수 있는 모든 위험한 결과를 무시한다”(97쪽)는데 내가 보기에 그냥 이 사람은 동성혼을 별 합리적 이유 없이 반대하고 싶은 것이다. “교육과 불평등의 문제에서 평등의 원칙 속에 모든 학생들을 공통된 틀에 묶어두는 가치론적 합리성이 왜곡된 결과를 낳았다”(103쪽)고 할 때는 ‘평등’이라는 가치론적 합리성 자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사람 그냥 ‘평등 교육’이 싫은 것뿐이다. 


여론에 대해 얘기할 때도 정말 웃겨 디질 것 같은데, 자기 마음과 맞는 양적 조사 결과가 있을 때는 역시 여론이 짱이라는 둥, 대중이 뭘 모르지 않는다는 식으로 얘기하다가, 자기 마음과 안 맞는 조사 결과는 이것이 마치 소수(특히 지식인, 미디어 등)의 적극적인 활동에 다수의 무관심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올슨 효과인 것처럼 해석하고 자빠지셨다. ‘우수한’ 사회학 타령하시는 분이 이런 식으로 계속 원칙 없이 왔다 갔다 하시는 걸 볼 때, 이건 “과학적 사회학”이라는 권위를 내세워서 스스로가 영향력 있는 소수 되고 싶은 것 아니고 도대체 뭐지? 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우리가 너무 그 논리에 익숙해서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는데 부동이 말하는 ‘공정한 관객 입장’이라는 건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데, 부동은 마치 자신이나 과학적 사회학이 주관이 개입되지 않아야 하며 불편부당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사회학을 하느냐와 상관없이 그 이미지만을 취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완전한 객관 혹은 독립을 주장할 때조차 그것이 어떠한 가치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 내가 아는 한 더 실제에 가깝다. 그래서 마치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또한 인간에게 자율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또한 인간을 평등하게 보지 않고 계급 등에 따라 분리하여 보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는 그의 어떤 객관적인 혹은 인본주의적으로 포장된 시각 뒤에는 사실상 ‘자유주의적’인, 그래서 그로 인해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강화시키고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그런 시각이 숨어 있다. 아 물론 부동은 찾아보니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지식인은 왜 자유주의를 싫어하는가>라는 책도 썼던 사회학자다. 이 사람은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개인주의를 혼동하지 말라 항변하지만, 내가 보기에 인프라-개인주의(근데 이 번역을 믿기 힘들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면서 지키고자 하는 가치인 개인주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에 가깝고, 이를 의도적으로 혼동하는 것은 부동에 더 가깝다. 개인을 쪼개지는 분인(dividual)이라고 보는 관점에서도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동원한 분석이 가능할 것인데, 계급별로 다른 개인이라는 어떤 사회학적 전제를 비판하는 부동이 오히려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혼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부동이 명성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읽은 게 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의 다른 책을 만나고 싶지도 않아졌다. 책 제목은 지식사회학적인 탐구를 할 것 같지만, 사실 믿음과 지식은 어떻게 선택될까? 라는 책의 제목(뭐 사실 원제는 믿음croire과 지식savoir이니까 선택의 의미가 없긴 하다)에 대한 대답은 합리화 과정이라는 것밖에 없다. (또 이것도 문제적인 것이 ‘절대적으로’ 합리적인 방향이 있다는 것을 마치 전제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책 챕터로 ‘과학사회학’이라는 제목도 있고 그래서 기대를 하게 되지만 번역 오류인 것 같다. 부동이 말하는 것은 사회학을 ‘과학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과학적 사회학. 이게 과학사회학으로 번역 가능한 것이더라도, 한국에서 과학사회학이라는 말이 쓰이는 의미를 고려하여 역자가 피했거나 주석을 달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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