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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Aug 19. 2018

과학철학 very shot intro.

지식연구 세미나 시즌1 5주차 RP

읽은 것:

Okasha, Samir (2016). Philosophy of Science: A Very Short Introduction (2nd Ed.). 김미선 (역) (2017). <과학철학>. 파주: 문학동네.     


생각보다 훨씬 더 입문서였기 때문에, 재밌으나 지루하게 빠르지만 딴짓하면서 잘 읽었다는 소감. RP에 쓸 말이 많지 않아서 분량이 채워질까 고민이지만 일단 시작해 보는 것으로. 


★ 오카샤는 과학철학을 “과학의 탐구 방법을 분석하는 것”(22쪽)이라고 정의한다. 전체적으로 재밌었으나, 아무래도 사회과학보다는 자연과학에 치중된 논의이고 심리학 같은 경우에도 완전히 뇌과학 쪽인 얘기가 나와서 사회과학으로 끌어오려면 나의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했던 점이 약간 아쉬웠다. (그렇다고 ‘사회과학의 철학’ 같은 책을 읽으면 또 이미 읽었던 얘기일 것 아니야(?) 모순.) 


● 인과성의 개념과 관련해서 5년 전에 텀페이퍼를 쓴 적이 있는데,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어서 새로웠다. “경험주의는 인과성의 개념을 의심스러워한다”(81쪽)는 단언이 인상적으로 남았고, 또 “과학연구 초년생들은 상관관계는 인과관계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배우고 또 배운다”(49쪽)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과학적’ 지식들은 ‘인과’의 방식으로 유통된다는 사실이고, 또 인과를 밝히기 어렵다 혹은 그 인과성의 개념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은 뭔가 인과를 찾는 것을 상관관계에 머무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한다. 이러한 전제는 또한 “상관관계는 인과관계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고 또 배우지 않는 질적 연구자들에게 공유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더 일반적이고 보편화할 수 있고 간단하고 인과관계(원인 내지는 이유)를 밝혀주는 설명이 더 우월한 것이라는 공유된 전제에 대해서 어떠한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 오카샤가 “합리적인 믿음의 정도”(55쪽)라고 정의하고 있는 주관적 확률의 개념이 재밌었다. (처음 봤다.) 특히 베이즈주의 같은 경우에는 통계학입문 시간에 배우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최근 통계적 사회과학에서 p-value 방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더 그 중요성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러한 흐름에도 “초기 신뢰도는 순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있다는 것이 새삼 새로웠다. 


♠ ‘의식’의 존재 같은 결코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주장(86쪽)이나 패러다임 간의 공약 불가능성(135쪽)에 관한 내용, 그리고 더불어 데이터 자체도 이론에 의해 오염된다는 ‘이론 적재성’(138쪽)에 관한 내용 등은 과학/학문적 토론에 있어서의 상대주의 내지는 합리적 토론의 불가능성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고 또 일종의 ‘아포리아’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마음이 어렵다. 특히 이 문제가 이 책의 범위 내에서는 과학 일반을 기준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사회과학이나 우리가 하고 있는 문화연구의 안으로 끌고 들어왔을 때는 또 문제가 특수하게 복잡해지는 것 같다. 이를테면 TERF와 스까는 화해할 방법이 있는가? 그 화해를 위해 사회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또는 ‘문빠’와 ‘박빠’는? 또는 오쏘독스 맑시스트들과 리버럴은? 텍스트에도 나오는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은? 환단고기 지지자들은? 물론 만하임은 매우 희망적으로 바로 그 간극을 해결하는 것을 지식사회학의 과제이자 지식사회학이 할 수 있는 일로 설정했기는 한데. 


♥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을 인문사회과학 수준에서 생각해 봤을 때, (이게 또 과학 일반에서도 반실재론이 그래서 실재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간 물질적 전환을 외치면서 신체를 중요시하는 사람들도, 감응/정동을 중요시하는 사람들도, 재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결국 사회과학에서는 자연과학과 같은 방식의 ‘반실재론’을 가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사회구성주의를 반실재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 (뻘.) 오카샤는 다양한 논쟁을 소개하고, 또 논변을 보여주고 그 논변에 대한 반박, 재반박 논변의 방법들을 보여주고 있어서 뭔가 논리학 교재 같다는 생각도 들긴 했는데, 더불어서 계속해서 저자가 그러한 입장들 가운데 무엇에 더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못내 마음에 걸릴 때가 좀 있었다. 이 책은 뭔가 ‘교과서’ 느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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