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연구 세미나 시즌1 4주차 RP
읽은 것:
Wallerstein, Immanuel (2004). The Uncertainties of Knowledge. 유희석 (역) (2007). <지식의 불확실성: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을 찾아서>. 파주: 창비. 2부 (137-233쪽).
Burke, Peter (2000). A Social History of Knowledge Ⅰ: From Gutenberg to Diderot. 박광식 (역) (2017). <지식의 사회사 1: 구텐베르크에서 디드로까지>. 서울: 민음사. 5-6장 (135-226쪽)
우선 지식의 불확실성. 후반부가 훨씬 재밌었다! 특히 11장의 뭔가 냉소적인 유머 감각 마음에 들었다. TEDx 같은 것도 시키면 잘 할 것 같다. 넘버링해서 생각 정리.
1) 월러스틴이 “사실 대 가치의 난국에서 많은 학자들이 매우 기만적인 거시-미시의 대립 속에 자기들의 입장을 숨기려고 한다”(151쪽)고 하고 있고 여기에서 행위자 대 구조의 이분법도 지적이 되고 있는데, 뭔가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물론 뒷부분에서 거대서사에 대항하면서 미시서사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어떤 경향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부분을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었지만, - 사실 이러한 이분법에서 한 쪽 편에 서서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이 책의 킬링 문장들이기도 했는데, 보편주의에 대해 권력의 입지를 방어하는 주장이라고 비판하는 그 논리가 “지역주의와 특수주의에도 똑같이 적용 가능하다”(184쪽)고 지적할 때, “미시서사가 거대서사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에 대해 “거시적 배경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결코 미시를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결국 모든 서사는 거대서사”라고 할 때(232쪽), 또 단순한 보편주의를 경계하면서 예컨대 텍스트에서는 등장하지 않은 단어 같지만 ‘인권’ 같은 개념을 쓰는 “세속규범”이 “덜 겸손하다”고 이야기할 때 - 이를테면 결국 미시의 맥락에서 거시의 맥락을 고려하여 중첩되도록 한다고 할 때 거시와 미시의 개념 차원에서의 구분은 유효한 것 아닐까? 더불어 행위자와 구조 역시 그 순환성에 대해서만 잘 이해한다면 유용하지 않을까?
2) 월러스틴에게 기존의 분과학문 구분, 특히 사회과학 내에서의 6개의 분과학문 경계는 그 효용이 다하였다. 따라서 현재의 노동분업을 재통합하고 재분화시키는 것이 하나의 이슈인데, 텍스트 내에서는 법칙정립(양방), 개별기술(질방), 거대서사 이런 식으로 나누어 보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한다. 이때 ‘재분화’는 사회과학의 목표에 대한 인식론적 입장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일 텐데, 실질적으로 별 소용이 없는 것일지라도 현재 연구영역별로 나누어져 있는 분과학문 체계를 지키려고 하는 것을 단순히 ‘문지기’의 작용으로만 격하시킬 수 있는 것인지 약간 의문스럽기도 했다. 물론 행정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학에 사회과학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필요 없는 일일 수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분과의 규모를 지킴으로써 그 기반에서 무언가를 해 볼 수 있는 여지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현재의 분화된 체계가 학문의 다음 단계로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라는 지적 - “대학원생들에게 이 협소한 영역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사회과학자로서 사유하는 학생들의 능력을 훼손하는 것”(200쪽) - 에는 온전히 동의할 수 있다. 일부 이단적인 학생들이 생겨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점점 더 세분화되는 세부전공영역들과 세부연구영역들에 함몰되다 보면 더 큰 방향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는 어떤 시각과 잠재력이 훼손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3) 월러스틴은 새로운 사회과학의 이름으로 ‘역사적 사회과학’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게 왜 ‘문화연구’이면 안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어떤 이상적인 문화연구의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부분과 역사적 사회과학의 구상은 상당히 비슷하기에, 두 단어를 치환해도 적어도 내게는 별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적 사회과학’은 아직 없는 어떤 것이고, ‘문화연구’는 그나마 자원과 역사가 있다. 어차피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가치지향을 어떤 단어에 고정시키는 문제가 항상 오어법(catachresis)적인 이슈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면 그냥 ‘문화연구’이면 안 되나? 문화연구는 인문학에서 나온 것이고, 여기는 사회과학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말을 써야 하는 것인가? 아무튼 경쟁적인 대안들에 대해서 ‘역사적 사회과학’이라는 딱 그 말을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특별히 책 내에서 정당화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나는 모든 사회과학이 과거시제로 쓰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역사학은 과거에 대한 특별한 권리가 없다”(171쪽)고 쓴 부분에서 힌트를 제공하기는 한다. 또한 월러스틴은 사회학과 사회과학을 구별하면서 사회과학에 대한 특별한 합의가 만들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고도 이야기 하기 때문에.
4) 세계체제론을 여전히 잘 알지는 못하지만(세알못), 어쨌든 현재 지식체계 내지는 사회과학이 맞이한 문제의 국면을 “사람들이 아는 세계체제와 지식체제가 모두 변한 결과”(187쪽)로서 세계체제론과 연결지어 설명한 부분은 여전히 인상적인 ‘지식’에 대한 접근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로렌스 그로스버그가 쓰는 ‘복합국면(conjuncture)’이라는 개념도 떠올랐다.
그리고 지식의 사회사.
분류 체제는 뒤르켐, 관료제는 베버, 이 저자도 결국 맑베뒤와의 연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 도서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 재정적 제약과 건축적 제약을 이야기해서 상대적으로 상징적인 ‘돈’ 말고도 물리적인 ‘공간’ (혹은 아마도 ‘시간’) 또한 중요한 제약 요인이 된다는 것이 선명하게 나왔고 흥미로웠다. ; 학문scientia과 기술ars의 구분 등 지식에 관한 구분법이 제시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 누적적 지식이나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진보에 대한 관념이 상대적으로 근대에 조직된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특히 현대의 학문적 이상은 “전통의 전수가 아니라 지적 혁신을 고등교육기관들의 주요 기능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게 된 것”(176쪽)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성암관 혹은 한국 인문사회학계에서 지적 혁신이 얼마나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지에 관해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 버크는 “분화, 전문화, 파편화로 나아가는 반복적 경향”(157쪽)에 관해 언급하고 이것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사실 U자형 곡선을 이야기한 월러스틴 논의와도 배치되는 부분이 있다. 특정 시기에만 한정지어서 보는 역사적 서술을 일반화하는 게 어려운 이유 내지는 함정 같다고 느껴졌다. ; 지식과 지적 권위에 의존하는 비인격적 통치를 하는 그런 관료제에 관한 부분에서 위원회, 협의회의 등장이 마치 초기의 거버넌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비인격적 통치의 이상과 함께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인격적 통치(노, 박, 문, ...)가 그래서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