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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Aug 19. 2018

자본론의 정치적 해석 (1)

문화연구 스터디 7월 18일 코멘트 페이퍼

Text: Cleaver, H. M. (1979). Reading capital politically. 한웅혁 (역) (1986). <자본론의 정치적 해석>. 서울: 풀빛. 1-2장 (13-137쪽)     


꼼꼼하고 빡빡하게 읽어야 하는 독서라서 좋았다. <자본론>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2차문헌 같은 것으로 마르크스 경제학의 기초를 접한 적이 있어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면서 잘 정리하려고 노력하며 읽었다. 더불어, 정치경제적 해석과 철학적 해석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다양한 문헌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좋았다. 특히 철학적 해석에서는 알튀세르와 프랑크푸르트학파(문화이론)를 비판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1979년 나온 책이기 때문에 그때의 맥락이라는 게 있을 텐데, 아무튼 시대(국면)가 변했기 떄문인지 뭔가 의문이 드는 서술도 있었고, 시대와 상관없이 <제국>이나 <다중>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의문이 드는 서술도 있었다. 일단 CP는 리스트로 정리.     


이 책이 인식론에 대해서 다루는 텍스트는 아니지만, ‘자본의 시각’과 ‘노동계급의 시각’으로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는 “양면 접근법”(110쪽)을 제시하면서 일종의 ‘위치지어진 지식’에 관해 상기시킨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클리버는 케인즈주의 또한 ‘전략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클리버는 <자본론>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해석과 철학적 해석이 모두 ‘자본의 시각’이라는 이유에서 비판하고 있으며, 더불어 두 접근이 모두 노동자 계급의 자율성, 독자성을 이론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꼬집는다. 정치경제학적 해석은 임금투쟁이 어떻게 위기를 앞당기는가를 보지 않고 자본에 권능을 부여하며 신비화한다. 철학적 해석의 경우에도 알튀세의 경우 결국 소박한 경제적 결정론이라는 단순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클리버는 알튀세의 ‘과잉결정’을 자기 쉴드 정도로 생각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대표되는 문화 분석도 헤게모니를 일방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비관적’인 결론에 이른다는 점에서 정통 맑시즘의 기본적인 오류를 재현한다. 감사의 글에 네그리도 언급되어 있고,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전통을 분량을 꽤 들여 언급하고 있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의견이 유사한 것 같다. (그리고 그래서 사실 의외였다. ‘정치적’이라는 말에서 나는 주류(?) 정치학을 먼저 떠올렸기 때문이다.)     


클리버는 ‘공산당’을 매개로 한 노동계급 투쟁을 상대화하면서 ‘공식기구가 아닌 노동자들 자신에 의한 투쟁’ 내지는 ‘매개되지 않은 투쟁’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물론 이것은 당시 상황에서 ‘헝가리 혁명’이나 중국 공산당, 소련 등으로 대표되는 결국 공산당이 오히려 자본에 결탁하고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던 사례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특별히 안 되는 방식도 아니기는 하다. 자본론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 결국 혁명을 위한 ‘계급의식’의 고취에 매몰되게 되고, 그 고취를 주도하는 ‘당’ 내지는 ‘전위’를 강조하는 레닌주의로 빠져 버리는 문제에 대해서도 왜 비판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공산당을 거부하고 그에 맞서는 형태의 운동조직’은 내부에서 위계나 전위나 매개나 대의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사실 존슨-포리스트 운동 같은 사례를 읽으면서도 결국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네임드’가 되는 것이 보이고 그 운동을 누군가가 대의하고, 이끌고, 지도하는 것처럼 보이고, 하다 못해 클리버 자신이 하는 이런 일도 특정한 운동에 힘을 실어주면서 지도하고, 더불어 자신의 상징자본을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쌓게 되는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사실 ‘공산당’을 ‘매개되지 않은 노동자의 투쟁’으로 대체하는 것은 결국 일정한 엘리트 내부의 투쟁으로 환원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더 들게 되는 것은 최근의 운동 사례들에서 ‘운동꿘충’은 빠지라는 어떤 요구가 특정한 이해관계에 의해서 조장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노동과 자본의 문제로만 봤을 때 클리버의 해석은 역사적으로, 정치적/전략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훨씬 더 세밀한 것은 맞지만, 결국 노동/자본의 이분법과 그 계급관계를 통해 진행되는 역사라는 관점에서 물러서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단순하다. 예컨대, 자본의 전략으로 “계급 내의 수직적 분할”을 이야기하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수평적 분할”의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 계급, 인종, 성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수직성hierachy”(101쪽)을 보는 게 아니라 ‘교차성intersectionality’으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클리버는 “모든 것은 계급투쟁으로 축소시키라는 것은 아니다”(108쪽)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노동/자본의 틀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면 거기에는 축소와 환원의 혐의가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존슨-포리스트 운동을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제임스의 흑인노동자에 대한 강조를 노동자 일반으로 확장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데 이때 anti-racism이 탈락하는 문제가 없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검토되지 않는다.) “공장을 넘어 사회로 퍼져나가는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응하는 전략으로서 자본의 계획을 이해”했을 때, 결국 사회는 경제의 다른 말이 되어버릴 뿐이고, 이때 국가나 시민사회나 다른 장field들도 노동/자본, 즉 경제적 이해관계의 장으로 환원된다.     


“계급구성의 각 단계마다 적합한 조직의 형태는 바뀐다”(93쪽)는 내용은 인상적인데, 오늘날 계급구성의 문제는 어떤가를 더 생각해보게 된다. 이것은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계급’으로만 따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클리버는 기본적으로 ‘공산당’이 적합했던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를 나누기 위해서 그런 방편으로 이런 이야기를 써 놓은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책이 쓰인지 40년이 되었고 상황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예컨대 클리버가 “가변자본을 고정자본으로 대체하려는 자본의 장기적 경향”(105쪽)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금융화’가 가장 큰 자본의 이슈가 된 오늘날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잘 몰라서 자신은 없다. ―오늘날의 ‘계급구성’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상상하고 논의해보고 실제로는 연구자료들을 찾아보거나 연구해야만 논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계급투쟁은 점차 노동에 반대하는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134쪽)고 하는데 사실 오늘날도 이것 자체가 이슈이기는 하다. 특히 미래사회에 대한 이야기들 나오는 것을 보면 사실 대표적인 이야기가 ‘4차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노동이 더욱 축소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기본소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나 그것의 기초적인 버전으로 논의되는 청년수당, 청년배당 등 잘 모르지만,, 나는 의견이 조금 다르기도 하다. 그런데 더불어 너무 나의 상상력이 적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는 했는데, 물론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의 노동(labor)의 문제로 보면 나도 “노동 싫어!”이기는 한데 기업가정신이라든지, 일을 통한 자아의 성취라든지 하는 것들을 단순 이데올로기로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왜냐면 나 자신이 요즘 진짜 열심히 일하고 책도 읽고, 스터디도 하고, 연구도 하고 그러는데,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노동(labor)일까? 하는 고민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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