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와 인간관계의 공통점: 미움의 철학
그런 사람이 있다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 사람
나도 상대에 대해 딱히 맘에 드는 점은 없었는데 그 사람의 태도와 말투로 인해 이제는 그 사람의 미운점 밖에 안 보이는 순간이.
나도 그런 순간이 가끔 생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의문으로 시작한 내 질문은 결국 그 사람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연구를 하던 어느 날 나의 생각이 바뀐 계기가 생기게 된다.
연구란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의 연속이다.
무한번의 실험과 무한번의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내 가설에 맞춰서 실험결과를 보고 싶어 지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특히 실험을 해서 나오는 결과가 수백 가지의 숫자일 때는 어떻게 분석을 하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인지 아닌지도 결국 내가 양심적으로 결과를 분석하는지 아닌지에 달려있다.
이것의 한 예로, 몇 년 전 호주의 한 대학에서 신약개발 관련 실험을 했는데 매우 혁신적인 결과를 내놓았었다. 그로 인해 정부와 다양한 단체에서 지원을 받게 되고 결국 임상실험단계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때 그 연구팀에서 일하던 한 포닥 (Postdoc:연구원)이 발표 콘퍼런스에서 양심발언을 하게 된다.
사실 이 주제의 모든 연구는 조작이 된 것입니다
아예 없는 결과를 만들어낼 때도 우리는 조작이라는 단어를 쓴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결과에서 편차적으로 내가 원하는 결론을 만들어 결과물을 내놓는 것 또한 연구결과조작이다.
만약 그 포닥의 양심 있는 발언이 아니었다면 그 약은 임상실험을 통과해 실제 환자들에게 쓰이게 되고 누군가의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연구를 할 때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정말’ 이 결과가 맞는가?
‘정말’ 내가 편견 없이 결과를 골라서 분석한 게 맞는가?
나도 모르게 잠시 내 양심의 눈을 가리고 결과를 보지 않았는가?
사실 나는, 우리 모두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그 순간에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고 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다면 ‘나 자신 또한’ 속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난 양심의 가책 또한 피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옳은 행위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정말 그게 맞아?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인간관계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사실 때때로 나도 어떠한 이유 간에 그 상대가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근데 단순히 그 사람을 맘에 안 들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이유를 정당화하고 싶어 한다.
‘그 사람이 먼저 나에게 쌀쌀맞게 대해서’
‘그 사람이 날 보는 눈빛이 별로라’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서’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정말’ 그래서 그 사람이 싫은 게 맞는가?
상대가 피곤해서 반응이 없는 건 아니었을까?
바빠서 내 인사를 못 들은 건 아니었을까?
그 사람이 정말 나를 싫어하는 거 일수도 있다.
하지만 실험결과 속에 나열돼 있는 수많은 숫자들처럼 우리의 삶과 상황은 입체적이며 여러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부분을 골라서 결과로 만들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불편한 감정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사실을 벗어나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함을 정당화시켰을 때 가장 힘든 것은 누구인가?
결국 누군가를 미워함으로써 가장 힘든 건 나 자신이니까.
순간의 불편한 감정 때문에 미움이라는 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